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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pr 14. 2022

하늘은 스스로 구하는 자를 구한다

'클로버필드'와 '해프닝'으로 보는 기후 위기의 징후에 대하여.

그날 밤 그 남자는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서 일본지사 임원으로 승진한 덕분에 곧 뉴욕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런 그를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 중이었다. 뉴욕의 고층 빌딩에 자리한 너른 공간에서 그의 승진을 축하하고, 송별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초대했다. 그렇게 흥에 취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날 밤 뉴욕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정체를 알 길이 없는 무엇으로 인해 뉴욕은 난리통으로 변하고 있었다.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 머리가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초현실적 상황 속에서 혼비백산하는 사람들은 일단 어디로든 뛰어 달아나야 했다. 파티는 끝났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 <클로버필드>는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대표적인 호러물 중 하나로 꼽히는 문제적인 영화다. 여기서 파운드 푸티지란 말 그대로 공개되지 않은 ‘원본 영상(Footage)’을 ‘찾았다(Found)’며 관객에게 진지한 거짓말을 시도하는 페이크 다큐 형식의 장르물을 지칭한다.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실제처럼 위장하며 스크린 너머의 관객을 생생한 현실감의 포로로 만드는 장르다.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캠 버전으로 중계되는 영상은 대체로 화질이 엉망이다. 덕분에 <클로버필드>가 개봉할 당시 멀미 증세를 호소하는 관객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만큼 실제적인 혼란과 공포가 객석으로 생생하게 전이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매트 리브스 감독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받게 될 느낌에서 시작한 영화”라고 말한 것처럼 <클로버필드>는 삽시간에 대도시를 공포로 장악해버린 주체가 무엇인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영화다. 보이지 않는 공포를 상대한다는 것의 두려움은 객석의 공포 또한 극대화한다. 위협적이라는 감각으로 생생하게 전해질뿐 그 위협의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공포를 상대한다는 건 서서히 밀려드는 지진해일을 마주하고 서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재앙이라고 말한다. 재앙의 사전적 의미는 ‘뜻하지 아니하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불행한 사고’라고 한다. 재앙은 무뢰배처럼 들이닥친다. 결코 예의 바른 손님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자연재해 역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예측이 재앙을 막아주는 방파제까지 쌓아주는 건 아니다. 예측을 시도한 주체가 그 예측의 결과를 지혜롭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예측은 그저 다가올 공포를 미리 상상하는 티저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원했지만 페이크 다큐 같은 걸 만들어버리는 꼴이 된다. 인간의 과학은 자연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보다 유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꽃피는 봄이 왔지만 언제부턴가 꿀벌을 보기가 힘들다. 기분 탓만은 아닌 거 같다. 한국양봉협회는 지난 3월 전국 양봉협회 소속 농가를 대상으로 꿀벌 실종 피해를 조사했다. 그 결과 지난겨울 월동 중이었던 꿀벌 중에서 78억 마리 이상이 사라진 것으로 집계됐다. 여기서 양봉 중인 벌통에서 꿀벌이 사라졌다는 걸 단순히 꿀벌이 가출했다는, 개인의 일탈이라 생각하는 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꿀벌은 지구 상에서 가장 조직화된 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집단이다. 그리고 꿀벌의 조직적인 생활은 인류의 삶을 영위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꿀벌은 ‘화분매개’라는 자연 순환의 선봉에 서있는 종이다. 그러니까 종자식물의 수술에서 꽃가루를 제 몸에 묻혀 암술머리로 실어 나르는 배달부 역할을 하는 곤충이다. 이러한 화분매개를 통해 수많은 과일과 채소와 작물이 자라고 인류는 그것을 수확한다. 간단히 말해서 꿀벌이 태업한다면 인류의 식탁에 오르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셈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무, 당근, 우엉처럼 뿌리채소라 불리는 야채를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진다. 단순히 채소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축산도 어려워진다. 소나 돼지에게 먹일 사료는 작물 수확을 통해 공급된다. 사람만 먹을 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러한 꿀벌 실종을 말할 때마다 인용되는 영화가 있다. 여기서도 지금 그 영화를 언급해볼 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정체불명의 테러집단이 일으킨 화학 공격으로 인한 사태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공격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공격의 주체는 신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행동을 멈추더니 거꾸로 걷다가 당장 스스로 가능한 죽음을 스스럼없이 실행한다. 거리낌 없이 자살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 됐다. 공원에서 책을 잃던 여자는 자신의 머리를 고정하던 비녀를 뽑아 목에 깊숙이 찔러 넣고, 공사 중이던 고층건물의 인부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혼잡한 도로를 정리하던 경찰이 총을 뽑아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해프닝>은 이렇듯 갑자기 고장 난 사람들로 인해 벌어지는 참사로부터 달아나는 이들이 벌이는 생존 투쟁에 관한 영화다. 시작부터 전례도 없고, 터무니도 없는 대자살 사태를 그린 영화는 필라델피아의 한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긴 뒤 과학교사의 입을 빌려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꿀벌들이 사라진다는 기사 읽었어? 전국적인 현상인데 수천만 마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섬뜩하지? 이유가 뭘까?” 한 아이가 답한다. “병에 걸려서요.” 하지만 24개 주에서 그 많은 꿀벌이 한 번에 사라진 이유의 가설이 되기에 질병의 근거가 빈약하다. 환경오염에 의한 결과라는 추론은 그럴듯하지만 시체도 보이지 않는 실종 상황의 근거로 보기엔 빈약하다. 그때 다른 학생이 말한다. “지구 온난화요.” 선생은 말한다. “그럴듯해.”


우리는 꿀벌이 사라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국내에서 꿀벌이 대거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침입종의 침투, 살충제나 벌초제 사용 등의 이유를 추측하고 있지만 이런 국지적인 원인으로는 전 지구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결국 지금 지구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현상이 정답으로 수렴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온도 상승이 꿀벌의 실종과 연관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로 일컬어지는 이유란 그래서다. 쉽게 말하면 꿀벌 실종은 하나의 거대한 징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가 꿀벌 실종을 야기한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 생각해보자. 꿀벌과 기후 변화가 무관하다면 그건 다행일까? 기후 위기로 인해 꿀벌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기후 위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기후 위기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인간처럼 생존력이 강한 생물에게 위협적인 위기는 꿀벌에게도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만에 하나 기후 위기가 당장 꿀벌 실종의 문제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 해도 두 문제는 결국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당장의 숙제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기후 위기가 꿀벌 실종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 자체가 하나의 징후일 것이다. 지난 100년 사이 지구의 온도는 1℃나 상승했다. 고작 1℃ 상승한 것을 두고 호들갑이냐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100년 이전에 2000년 동안 지구의 온도가 1℃ 상승했던 사례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의 뇌에 문신처럼 새겨주고 싶다. 그러니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지구에서 살아있던 무엇이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미 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 지구에서 지금 꿀벌의 차례가 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언제 인간의 차례가 도래할지는 모를 일이다. 


우리는 질서 정연하게 순서를 지키며 재앙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끝이 뻔한 결과를 막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일일 것이다. 지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신호를 주고 있다. 살고 싶다면 지금부터 노력하라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은 지구의 위기가 아니라 인류의 위기일 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스스로 구하는 자도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노력해야 한다. 지구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환경부 공식 블로그 '지구랩소디' 섹션에 게재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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