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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n 14. 2022

좋은 멘토는 먼저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당신을 위한 멘토는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MBTI 시대다. 모두가 자신의 MBTI를 알고, 타인의 MBTI를 궁금해한다. 물론 알파벳 여덟 개로 조합해 분류한 16종 유형만으로 만인의 성격을 온전히 분류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곤란하겠지만 적당한 호기심을 쥐고 자기 자신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나마 얻겠다고 그 내용을 들춰보는 심정이란 결코 이상한 게 아닐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됐든 나 자신을 알 수 있는 힌트로 통용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작금의 시대에서 당연한 일이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도 없었고, 개개인의 불안이 이만큼 팽배했던 시절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문명이라는 것을 이룩한 이후로 가장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시간을 지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당장 삶에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무엇이 1년 후에도 유효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혁신과 같은 단어를 지금만큼 추앙했던 시대도 없었을 것이다.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현대인은 불안하다. 새로운 것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건 기존의 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므로 그때마다 나라는 사람의 허물을 벗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춰 나를 거듭 규정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정말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같은 심정이랄까. 한쪽에서는 매번 새로운 무언가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라 요구하는데 한쪽에서는 나 다운 것을 추구하고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라고 하니, 아, 어쩌란 말이냐, 흩어진 이 마음을 좀 누군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말 누군가 알려주는 서비스가 활개를 친다. 한때 힐링과 멘토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니까 '힐링'이, 새로운 변화와 함께 보다 성장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지도가 필요하니까 '멘토'가 제공된다. 다양한 미디어에서 힐링과 멘토라는 단어를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변화가 빠른 시대에서 힐링이나 멘토라는 단어 역시 어느새 낡아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힐링이나 멘토의 역할이 사라진 건 아닌 것 같다. 특히 소위 말하는 멘토링은 과거보다 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 계발에 목이 말랐다. 1년 후를 장담할 수 없는 시대를 산다는 건 10년 후의 미래를 앉아서 기다리거나 상상만 해선 곤란하다는 의미로 곧잘 통용된다. 그래서 꾸준히 배우고 익힌다. 비단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실무적인 자격증을 따는 방식을 넘어서 다양한 강연을 듣고, 무언가를 구독하며 어떤 식으로든 생각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몇 년 전까지 테드나 세바시 같은 강연이 주목을 받은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지금 내가 사는 방식 이외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작금의 시대에서 자기 계발이란 전문지식을 쌓거나 특별한 취미를 향유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관계를 건설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영역인 것 같다. 다양한 커뮤니티 서비스가 각광받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어느 정도 성인의 나이를 넘어서면 관계라는 것이 자신의 일상적 규격 안에 갇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학창시절에는 1년마다 학급이 바뀌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었지만 사회에 나와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무실이 지금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영역을 한정하는 규격이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이직을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먹고사는 업에 예속되는 관계의 알고리즘을 거듭 체험할 뿐이다.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 혹은 마케팅이나 비즈니스처럼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는 커뮤니티 서비스가 생겨난 건 익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재화를 투자하는 시대다. 직장 동료와는 나눌 수 없는 사적인 취향을 공유하고, 운이 좋으면 시시콜콜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 이는 힐링이나 멘토라는 단어가 유행하던 예전의 욕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힘이 되는 위로를 하고,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건 익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여전히 명망 있는 이에게 큰 가르침을 얻길 바라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과 사람의 거리가 예전보다 더 가까워진 시대다. 대단한 전문가의 강연도 스마트폰 앱으로 접속하면 손쉽게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적인 관계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지는 시대인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두고 위로나 조언을 얻을 수 있는 멘토가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서해안에 해당하는 이오니아 해에 제도를 이루는 여러 섬 중 하나인 이타카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어린 왕자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부탁하며 트로이 전쟁에 출전한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기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 20여 년의 세월에 관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다. 그렇게 2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친구가 충실히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 왕자가 장성하기까지 좋은 조언자 노릇을 하며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해줬다는 사실에 감복한다. 바로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다.


그러니까 멘토란 단순히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을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좋은 조언이란 상대방에 대한 사려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다. 근래 들어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건 왜곡된 멘토링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른다. 한때 동기부여 같은 것을 주겠다고 윽박지르듯 개개인의 단점을 지적하는 강연 같은 것이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잘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문제라서 못하는 것이라는 식의 고압적인 태도가 강사의 실력처럼 여겨지는 시절도 있었다. 단언컨대, 그건 결코 좋은 멘토링이 아니다. 그런 이를 멘토로 삼는 건 바늘을 물고 밥을 먹는 것과 같다. 뱉어야 한다. 그리고 밥만 먹으면 될 일이다. 말을 달리게 만드는 것은 채찍질이 아니라 말을 다루는 기수의 요령일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멘토는 기세로 장악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먼저 말하지 않는다. 차분하게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그렇게 전해 듣게 된 말로부터 말을 얹는 것이다. 상대의 고민을 듣고 그에 어울리는 위로나 조언을 해주는 것이지, 상대의 말을 반석 삼아 자기 무용담 같은 것을 쌓아 올리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가진 고민의 심연을 파악하기 위해 성실하게 물음표를 던지며 함께 고민할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멘토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가진 물음을 자기 것처럼 함께 물어주고, 그럼으로써 나 스스로 그 답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야말로 진정한 멘토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사려 깊은 사람을 쉽게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미 당신 주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명함은 경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비례한 것이다’라는,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말처럼 당신의 말에 차분히 귀 기울여주고 내 입장이 돼서 고민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당신의 진짜 멘토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결코 추억으로 떠올리는 인연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현재진행형의 인생 안에서 두고두고 만날 수 있도록 예의를 지키고, 당신 역시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주길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게 아마 당신의 복일 것이다. 


(KGC인삼공사에서 발행하는 계간 매거진 <심> 여름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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