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은 똑바로 보려고 노력할수록 많은 것들이 드러나고, 보이는 영화다. 영화 곳곳에 자리한 시각 정보와 입으로 발화된 대사의 의미가 단일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각적인 촬영술과 편집술로 그 모든 정보와 의미를 공교로울 정도로 절묘하게 응집시켜 파도처럼 밀고 나가는 저력이 실로 대단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저력의 끝에서 차오른 감정이 좀처럼 빠져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공할 여운의 영화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살인 사건이 뜸하네.” 시작부터 정말 이상한 대사다. 날씨와 살인 사건의 빈도를 연관 짓는 형사 장해준(박해일)의 말은 분명 일말의 일리도 없는 것이지만 실없는 농담 같아서 딱히 반박할 만한 거리도 못된다. 해준은 시종일관 매사가 진지함으로 충만하고 뻣뻣할 정도로 자기 원칙을 고수하는 형사다.그리고 일상에서 구사하는 어휘가 남다른 사람이다. “잠복해서 잠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잠이 부족해서 잠복하는 거야”라며 말장난스러운 언어를 잘도 구사하다가 “죽은 자가 간 길이고, 우린 경찰이니까”라는 결연함을 드러내기도 하며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라며 그윽하게 심상을 울리는 시적인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발음한다.
마침내, 그런 해준 앞에 송서래(탕웨이)가 나타난다. 오르는 동안 미끄러지기 일수라 ‘기름봉’이라 불린다는 가파른 구소산 비금봉을 우아하게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까지 감상하며 초밥 집어먹듯 가볍게 오른다는 기도수(유승목)의 난데없는 추락과 사망을 확인하러 경찰서로 온 그의 아내 서래는 이렇게 말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한국어에 서툰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들어도 이상한 이 말을 듣고 공교롭게도 해준은 감탄한다. “한국말을 저보다 잘하시는데요?” 서래는 해준이 거듭 숨을 들이켜게 만드는, 더 알고 싶은 패턴이었다. 서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오수완(고경표)에게 “젊고, 예쁘고, 외국인이라서 피의자가 돼야 하냐”라고 강변하지만 해준은 처음부터 알았고 이렇게 말한다. “서래 씨가 나와 같은 종족인지 진작 알았어요.” 서래는 처음부터 해준에게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었다.
친절한 형사가 전해준 방수 밴드를 손등에 붙인 서래는 그 위에 향수를 뿌리고 주문을 걸 듯 입김을 불어 본다. 그리고 취조실의 해준은 주문에 걸린 듯 마주한 서래의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켠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두 사람이 내뱉는 날숨과 들숨이 하나로 맞춰지는 듯한 그 순간, 서래의 알리바이는 차돌처럼 단단해진다. 서래는 기민하고 영리하며 강직하고 솔직하다. DNA를 좀 주셔야겠다는 해준의 쉬운 설명을 듣고 구강상피세포 검사를 하기 위해 경찰서로 온 서래는 결혼반지를 낀 해준의 손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도 결혼반지를 다시 낀다. 서래는 그렇게 해준에게 우리가 같은 종족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무 초밥이나 먹지 않는 해준의 입맛으로 선택한 특선 초밥을 맛있게 먹은 뒤 함께 테이블을 닦고 정리하는 것도 능숙하다. 결벽증에 가깝게 깔끔한 해준이 닦고 정리하는 일상의 패턴처럼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서래도 닦고 정리하는 패턴이 익숙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같은 종족이다. 하지만 엇갈릴 운명이었다. 시집 내도 좋겠다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문학적인 언어를 쓰는 해준에게 서래가 뱉는 고풍스러운 어투는 들이켜고 싶은 날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극을 보고 말투를 따라 하며 익힌 서래의 언어는 실상 자기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숨은 뒤늦게 맞출 수 있었겠지만 두 사람이 우리로서 함께한 일은 깊은 바다에 버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친절한 형사의 마음을 갖고 싶었지만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달라는 번역기의 오류처럼 서래의 알리바이는 끝내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품위 있는 경찰의 자부심까지 무너지고 깨어진다. 서래에게는 해준과 함께했던 우리 일로 인해 사랑이 시작됐지만 해준이 서래와 함께했던 우리 일은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찾게 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이건 엇갈린 사랑이야기다. 늘 로맨스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해온 박찬욱 감독이 느끼는 대중과의 괴리 앞에 작심하고 결심해 내놓은 멜로 영화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전형적인 감정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전형적이지 않은 형상과 심상으로 꽉 채워진, 결코 범상치 않은 멜로 영화를 계획했고 완성한 것 같다. 사랑이란 인과가 명확하지 않은 결과다. 빠져드는 마음이란 언제나 까닭이 확실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비련한 사랑은 통속의 드라마로 구전되는 신화와 설화의 주요한 소재가 된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사랑이란 대체로 각기 다른 양태의 정념으로 치닫는 카타르시스이자 파토스였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박쥐>에서 사랑하는 이들은 저마다 처참해지고, 가련해지고, 파열함으로써 온전히 정화되는 결말로 종착한다면 반대로 섹스 신으로 끝난다는 공통점을 지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아가씨>는 격정적인 결말로 역동한다.
<헤어질 결심>은 결벽과 정념이 기이하게 뒤엉킨, 아가페와 에로스가 신묘하게 엇갈리고 어우러지는 감각과 의미의 향연 같다. 그리고 전반부와 후반부로 명확히 나뉘는 서사의 구조는 반복과 상징, 대칭과 대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기준선을 마련하는 것과 같다. 좀처럼 한국적이지 않은, 심지어 그 주변에도 그와 같은 행색이 아닌, 슈트를 입은 역대 최연소 경감이라는 엘리트 형사 해준은 어쩌면 이 작품이 그리는 이질적인 내러티브를 위한 전제조건처럼 보인다. 그는 사랑을 품지만 끝내 사랑을 뱉지 않는다. 마음이 이끄는 데로 바라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죽은 자들의 눈을 내려다보는 사람이다. 스스로 깨끗하다. 영화가 해준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하늘을 향하듯 올려다본다. 그는 대체로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제대로 보길 원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해준이 보기에 꼿꼿한 서래는 언제나 당당하다. 비록 거짓을 품고 있기도 하지만 계획했던 것을 그대로 실행한 이후에 얻어진 결과를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거짓말탐지기 앞에서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고 말한다. 서래가 좋아하는 품위는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목소리다. 자신이 피우는 담배냄새조차 참지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가 아니라 손수 담뱃재를 털고 입에 물려주는 남자다. 겉보기만 화려할 뿐 오타처럼 엉망이 된 삶을 사는 남자를 고풍스러운 단어의 쓰임새에 감탄하는 정갈한 남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걸 서래는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람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는 서래의 운명은 어째서인지 늘 그런 남자하고 결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조부모의 유골을 잃어버린 선산에 뿌리며 꼿꼿한 기품을 지킨다. 그렇게 내려앉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한다. 그래서 영화가 서래를 비추는 시선은 늘 높다가 낮아진다. 고매한 심성을 갖고 있지만 현실은 늘 만만치 않게 그녀의 삶을 끌어내린다.
일찍이 잃어버린 역사에 맞선 대가를 짊어진 후손의 삶이란 억척스럽지만 끝내 고결하다. 해준은 그걸 똑바로 보고 아는 단일한 사람이지만 살인과 폭력이 함께 있어야 행복한 세계를 조망하고 따라가야 하는 자신의 자부심에 집중하길 더 원하는 사람이다. 결국 인자하지 못해서 산은 싫지만 바다를 좋아하니 지혜로운 서래는 바다가 좋다고 하면서도 산을 떠나지 못해서 끝내 붕괴하는 해준이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도록 일찍이 깊은 바다에 버려서 아무도 못 찾게 만들어야 할 목소리의 봉인을 풀어버린다. 그리고 끝내 그 목소리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사랑한지도 모르고 사랑을 끝냈고, 결국 사랑한다는 목소리를 외롭게 기억하고 되새기는 서래만 미결 사건 같은 마음을 품고 402일 전에 붕괴한 남자의 피의자가 되길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렇게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던 다른 남자와 여전히 미결한 결심을 위해, 죽은 사람이 간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믿는 남자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는 것만이 그의 마음에 낀 안개를 걷어내고 자신이 말했던 사랑한다는 목소리를 듣게 이끄는 유일한 길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끝내 품위가 있고, 꼿꼿해서 가련한 애사다.
“이 산의 봉우리는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대사처럼, 사랑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헤어질 결심>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보는 순간 헤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끝에서 시간을 돌려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고 싶은, 영화의 끝에서 영화의 매혹이 보다 거세지는 경지의 감각이다. 이전이 봤던 것처럼 생각나는 것이 있는 것 같지만 끝내 없는, 단일한 성취이다. 파도처럼 덮치거나,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들거나. 한 번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7월 첫 번째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