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간이 대중음악 아이콘이 되는 시대가 곧 도래할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눈도, 입도, 코도 없지만 말귀를 알아먹고 시키는 대로 작동하는 인공지능 스피커, 일명 AI 스피커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까진 아니라 해도 사람 이름처럼 기계에 호명해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부탁한다. TV 틀어줘. 노래 들려줘. 불 켜줘. 오늘 날씨 어때? 그러니까 밥 차리고 청소하고 빨래까지 해주는 가사도우미 수준은 아니라 해도 가만히 누워서 켜고 끌 수 있는 음성 버튼 역할 정도는 확실히 해낸다. 20세기에 상상하던 미래 사회처럼 자동차가 날아다니거나 로봇이 집안일을 해주는 시대는 아직 도래하진 않았지만 되레 그 시절에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미래는 찾아왔다. 세계의 풍경이 일거에 뒤집어지는 시각적인 변혁이 대신 일상 속에 자리하며 의식의 틈새를 벌려 어느덧 익숙해진 기술의 인격화가 이뤄진 것이다.
20세기에는 21세기쯤이면 인간과 판박이처럼 닮은 로봇이 인간의 삶을 위협할 것이라는 상상이 난무했다.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외형과 다를 바 없는 터미네이터 같은 로봇이 나타나 인류의 존재 이유를 거칠게 물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2022년이 도래한 인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현실은 <터미네이터>가 아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홀로 일상을 살아가던 한 남자가 사만다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AI 기반 대화 서비스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다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근미래 설정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현대인의 고독을 그린 이 작품은 AI 스피커로 소통하는 사물인터넷 시대가 기계와 인간의 선을 넘는 가상 인격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몇 년 전 TV로 어느 은행 광고를 보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딘가 묘하게 진짜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생생한 실물감을 갖고 있지만 묘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3D 합성 기술로 만들어낸 가상 인간이었다. 하지만 광고를 위해 1회성으로 만들어진 모델이 아니라 이미 로지라는 이름으로 정식 활동하는, 심지어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12만 명 이상인 인플루언서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버추얼 인플루언서라고 명명한다고 했다. 정말 시대가 바뀌었다. 사실 이런 가상 인간이 대중 앞에 등장한 건 오래전 일이었다. 1996년에 등장한 사이버 가수 아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가상 인간의 존재는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한 사건에 불과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생생한 존재감으로 각광받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가상 인간의 시대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보다 중요한 건 매력의 유무이며 선망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믿음이다.
가상 인간 한유아는 게임회사 기반의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기업과 시각 특수효과 전문 기업에서 공동으로 인공지능 기반의 3D 그래픽 기술로 구현한 버추얼 아티스트다. 가상 인간이지만 생일도 있고, 별자리도 있고, 탄생석도 있다. 소속사도 있는 연예인이고,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3만 명이 넘는 인플루언서다. 2019년에 데뷔한 이후로 모델 활동을 하며 음원 발표 준비를 해왔다는데 지난 4월에 첫 싱글 ‘I Like That’을 발표하며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현재 유튜브 조회수 700만 회를 돌파한 뮤직비디오에서는 실제 댄서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실제 인간과 함께 합성된 이미지에서는 아무래도 위화감이 드는 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어색하기보단 신기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면도 있다. 메타버스 시대의 도래와 함께 자기 분신 격인 아바타를 만들고, 비현실의 세계에 존립하기 위한 ‘부캐’를 운영하는 요즘 시대에 가상 인간의 존재란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처럼 보인다. 게다가 코로나19 유행과 함께 VR로 구현된 가상의 무대에서 비대면으로 공연하는 가수들의 공연을 종종 본 덕분인지 몰라도 실제 인간과 섞인 가상 인간의 존재가 이질적인 존재로만 인식되는 것을 넘어 디지털 플랫폼에서 탄생한 새로운 종의 기원을 목격하고 있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 같다. 어차피 이제 현실감을 지운 무대를 바탕으로 실제 인간의 춤과 노래를 관람하는 시대인데 되레 가상 인간이 등장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버추얼 리얼리티의 시대, 즉 VR로 대두되는 가상현실의 시대에서 가상 인물의 탄생과 활동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다만 기술적인 완성도와 대중적인 인식 측면에서 아직 과도기적인 상황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흥미로운 건 이런 가상 인간의 재능이란 것이 발견이 아닌 제작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라는 사실이다. 보통 예술적 재능이 있는 가수를 찾아내는 과정은 발견과 탐색을 통한 결과다. 물론 K팝 시장의 핵심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아이돌 뮤지션은 연습생이라는 수련 시절을 거쳐 재능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훈육의 과정이 도모되기도 하지만 결국 연습생 역시 어느 정도 가능성을 인정받는 인재를 대상에 둔 발굴과 육성 시스템에 편입되는 인재이기에 본질적으로 가상 인간을 탄생시키는 과정과 완전히 궤가 다르다. 한유아 같은 경우 다양한 연령대를 지닌 수백 명의 목소리 데이터를 합성해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는데 결국 만인이 좋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추출해낸 셈이다.
그러니까 가상 인간은 실제 인간보다 기회비용이 낮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감내할 필요도 없고, 재능을 거듭 확인할 필요도 없다. 만인이 좋아할 만한 재능을 설정하고, 매력을 입히면 된다. 물론 여기서 변수는 기술력이다. 원하는 모델을 구현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기술과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은 가상 인간이 등장하고 실제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상황을 보면 가상 인간의 미래는 무궁무진할 것 같다. 물론 아직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VR이나 메타버스가 보편화될수록 가상 인간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가능성도 경험적으로 확장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경향은 해당 경험을 상대적으로 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하다. 게다가 사회적인 물의나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켜 브랜드 가치를 스스로 훼손시킬 염려도 없다. 그야말로 완벽한 매니지먼트가 가능한 스타라고 할까?
디지털 국악 뮤지션을 표방하는 김화니는 지난 5월, 딥러닝을 활용한 리마AI라는 인공지능 음악 플랫폼으로 작곡한 세 번째 싱글 ‘누가 대고 소리를 내었는가’를 발표했다. 국악기를 중심으로 레게, 힙합, R&B, 소울 등의 장르와 국악의 결합을 시도하는 퓨전 국악 장르의 음악을 거듭 시도하고 있다. 음악과 IT 융합에 특화된 기업으로 꼽히는 이모션웨이브에서 개발한 ‘애임플’은 디지털 뮤지션 프로듀싱 플랫폼을 표방하는 메타버스 기반 NFT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이며 가상 인간 김화니는 에임플로 탄생한 네 번째 디지털 뮤지션이자 세계 최초 디지털 국악 뮤지션이라고 한다. 디지털 국악 뮤지션이라는 단어처럼 김화니는 디지털 뮤지션 즉, 가상 인간이다. 국악기를 중심으로 레게, 힙합, R&B, 소울 등의 장르와 국악의 결합을 시도하는 퓨전 국악 뮤지션으로 딥러닝을 통해 직접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창작하고 연주한다고 한다. 아직 싱글 발표를 통한 창작 활동의 결과물 외에 실제적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한유아를 비롯한 여타의 인플루언서 가상 인간만큼의 인지도는 없지만 가상 인간의 세계가 새로운 영역까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서 유효해 보인다.
이런 시도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뜻밖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김화니는 AI 작곡 엔진 ‘리마 AI’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국악 연주를 데이터로 딥러닝 해서 작곡한 싱글을 발표해왔는데 이는 관성적인 창작으로 보다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어려운 인간보다 예상 밖의 신선한 음악적 시도를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인공지능을 기반에 둔 딥러닝을 통한 창작이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데이터를 기반에 둔 결과라는 점에서 기존의 음악과 큰 분별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인데 이는 결국 딥 러닝을 통해 다양한 데이터를 읽어낸 인공지능이 그만한 분별과 해석을 도모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달할 수 있도록 현실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만큼 가상 인간의 대중적 접점을 만들어내고 인식의 저변을 넓히는 시도도 중요할 것이다. 만인이 원하는 매력을 어필할 수 있어야 그만한 각광도 받는 법이다. 가상 인간이든, 실제 인간이든, 다를 게 없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웹진 <월간 공진단> 8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