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희사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Aug 24. 2022

사랑 따윈 필요 없는 연애쇼

사랑이 희귀해지는 시대에 연애 리얼리티쇼가 흥하는 역설에 관하여.

이별 위기에 처한 연인들이 한 공간에 모여 서로 상대를 바꿔가며 데이트를 즐긴다. 그리고 2주 후에는 선택해야 한다. 기존의 애인과 다시 시작되는 연인으로 거듭날 것인가, 그곳에서 만난 다른 이성과 함께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것인가 혹은 혼자가 될 것인가. 그러니까 커플끼리 체인지 데이트를 즐기고 연애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체인지 데이즈>다. 


카카오TV에서 제작했지만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찐’이다. 실제로 연애 중인 네 쌍의 커플이 등장하고 서로가 이별 위기에 놓여있다는 직감을 스스럼없이 표한다. 각기 다른 양상의 위기를 겪고 있지만 이별 위기에 놓인 연애라는 징후의 공통분모 위에 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서로 연인을 바꿔가며 데이트를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연인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호감을 발견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죄책감을 함께 감당한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커플은 다른 이성과 보낸 만 하루의 데이트에서 지금의 연인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만족감과 편안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은근하던 연인 간의 반목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일 정도로 거세지고 첨예해지곤 한다. 


공교롭게도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이라는 가수 신승훈의 노래 제목이 떠올랐다. 무려 2002년이라는, 20년 전에 발표된 옛 노래 제목이 떠오른 건 그렇게 마주할 때마다 반목하고 갈등하던 커플이 각각 개별적인 인터뷰를 할 때에는 상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참 이상한 사연이다. 그렇게 사랑하고 좋아한다면서 왜 서로 얼굴만 마주하면 표정이 굳고 얼굴을 붉히고 언성이 높아지고 신경이 곤두서는 걸까. 처음 만난 이성과 데이트하는 풍경의 화기애애함은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연인 앞에서 곧잘 휘발된다. 사랑하니까 헤어지기 싫다는 마음은 함께할 때마다 쉽사리 붕괴된다. 그런 당사자들의 아이러니를 관전하는 패널들의 탄식도 함께 짙어진다. 그 이후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흥미진진하다. 


그러니까 남의 연애 이야기에 이렇게 과몰입할 일인가 싶겠지만 실상 이것이 남의 연애 이야기이기 때문에 과몰입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남의 연애사를 관전하는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생겨나는 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프로그램은 그저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연출하는 허구가 아니다. 사랑하지만 갈등하고 반목하며 질투하고 애증하는, 갖은 감정이 난무하는 리얼리티쇼다. 각본 없는 드라마이기에 예측할 수 없고, 스포츠 경기처럼 관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서 다양한 연애 리얼리티쇼가 기성 방송채널부터 OTT 플랫폼까지, 가리지 않고 쏟아지듯 제작된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연애 리얼리티쇼가 하나씩 생기는 것 같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로지옥> <나는 솔로> <돌싱글즈> <환승연애> <비밀남녀> <에덴> <이별도 리콜이 되나요> <썸핑> 등 연애사도 각양각색이다. 커플이 될 결심을 하려고 출연한 솔로도 있지만 솔로라고 다 같은 솔로는 아니다. 이런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매력적인 출연자도 있고, 모태솔로라는 단어를 납득하게 만드는 출연자도 있다. 그리고 단순한 솔로만 나오는 게 아니다. 헤어진 연인 몇 쌍을 한 자리에 모으기도 하고, 한 차례 이혼한 경험이 있는 남녀가 모이기도 하고, 심지어 헤어진 전 애인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랑과 연애라는 미명 하에 펼쳐지는 재회와 결별의 서사가 자연스럽게 진전된다. 

타인의 사정에 관심을 갖거나, 타인의 삶을 엿보고 싶다는 심리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관심과 관음은 다른 영역의 욕망이다. 리얼리티쇼는 관음의 욕망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제공하는, 합법적인 망원경과 같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연애라는 행위와 심리가 쇼 프로그램의 소재가 된다는 건 만인의 공감대를 자극할만한 보편성과 각자의 일상 안에서만 존재했던 사정의 개별성이 자연스레 한 데 묶이는 결과가 된다. 실제로 저런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해도 공감하거나 이입하는데 무리가 없고, 타인의 감정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이한 자격까지 안기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방영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의 평범한 일반인이었을 출연자들의 감정과 행위를 응원하거나 손가락질하는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된다. 


그러니까 타인의 감정이 흥미로운 쇼 프로그램의 소재가 된다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과 연애가 쇼의 영역에서 팔린다는 것 자체가 동시대의 세태를 대변하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태초에 <사랑의 스튜디오>가 있었고, <짝>이 있었지만 ‘돌싱’이나 ‘환승’이라는 단어를 동원하며 이혼과 결별까지 만인이 시청하는 리얼리티쇼의 영역에 포함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이 시대의 인식이 어느 정도 진보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만남이 자연스럽다면 헤어짐도 자연스러운 것이듯, 결혼도, 이혼도 가릴 일이 아니고, 만남도, 결별도 쉬쉬할 일이 아니다. 불미스러울 이유가 없는 일이 더 이상 불미스럽지 않게 여겨지고 중계된다는 건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보다 자연스러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연애라는 행위가 주요한 쇼가 된다니 작금의 시대에서 사랑과 연애의 처지가 새삼 궁금하다. 한때 청년세대는 연애, 결혼, 취업 등을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살고 있기에 N포 세대라 명명됐다. 느낌적인 느낌에 의거한 주장은 아닌 것 같다. 통계청에서 조사한 ‘2021년 혼인 이혼 통계’ 발표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21년 사이 혼인건수는 33만 건에서 19만 건으로 4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혼인 감소에 대한 인식은 심각한 문제라고 답변한 응답자가 57%에 달한 반면, 결혼에 대한 인식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고 답한 응답자가 51%에 달해서 사회적 인식과 개인적 인식의 차이가 기이하게 엇갈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결혼하지 않는다 하여 연애까지 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비혼을 선택하는 인구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연애세포 자체가 쉽게 증식되기 어려운 사회적 심리를 추측하게 만든다. 취업 관련 포털사이트 인크루트와 아르바이트 모집 서비스 업체 알바콜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0%가 자신을 비혼주의자라고 밝혔고, 비혼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남성은 ‘경제적 여건 부족’을 가장 큰 이유로, 여성은 ‘출산/육아에 대한 부담’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팍팍한 현실에서 결혼과 연애가 사치스럽다.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아닌 허구로 체험하는 것이 익숙한 감정이자 행위로써 보다 자연스럽다.


역설적이지만 로맨스 멜로 영화가 좀처럼 제작되지 않고, 흥행하지 못하는 시대에서 연애 리얼리티쇼가 거듭 기획되고 제작되고 인기를 얻는 건 사랑하지 못하는 시대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사랑하지 못하는 혹은 사랑할 마음이 없는 이들에게 부재한 ‘리얼리티’란 그 자체로 쇼다. 사랑하는 감정보다도 사랑으로부터 파생된 연애와 결혼이라는 선택 자체가 하나의 관전 소재가 된다. 사랑 따윈 필요 없는 이들의 시대에서 사랑이 팔린다는 아이러니. 연애 리얼리티쇼의 시대는 더욱 길어질 것이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8월 두 번째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어떻게 읽어도 똑같은 이름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