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선한 환상만을 제시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몰입한 시청자라면 이 대사가 빠져나갈 수 없는 회전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대사는 우영우(박은빈)라는 인물의 정체성 자체를 온전히 반영한 인사말처럼 들린다.
소위 자폐증이라 불리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증상이 있는 우영우는 빙글빙글 도는 회전문을 좀처럼 통과하지 못하고 제 자리로 돌아오기 일수다. 그러니까 일반인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우영우 입장에서는 쿵짝쿵짝 여러 번 리듬을 맞춰봐도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가 도와주면 쉬운 일이지만 스스로 나아가지 못하면 늘 제자리에 머무는 셈이다. 결국 스스로가 극복하고 그 회전문 너머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매번 회전문과 함께 뱅그르르 돌아 출발선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영우는 다시 한번 그 시작점에서 박자를 맞추며 그 너머로 나아가려 애쓴다.
사실 불안했다. 기대보단 우려가 컸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일으킨 반향을 뒤늦게 접한 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자폐 증상이 있는 변호사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이상한 거부감을 느꼈다. 1화를 보면서도 그런 시선을 좀처럼 거둘 수 없었다. 이건 장애인의 현실을 표백한 판타지가 아닐까? 이 모든 열광은 결국 현실과 무관한 환상을 향한 예찬이 아닐까? 그리고 지난 10화까지 이 드라마를 줄곧 보면서 역시 그런 물음표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더 이상 거부감을 느끼진 않을 뿐이다. 물음표는 남아있지만 그 물음표를 남기는 것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미덕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졌다.
좀처럼 말이 없는 어린 딸이 걱정돼 병원에 데려간 아버지는 의사로부터 자폐 스펙트럼 증상 진단을 받고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법조항을 달달 외우며 입을 연 딸을 보고 천재적 기질을 직감한 아버지는 자신의 딸의 말문을 여는 법전을 소통의 열쇠로 활용한다. 어쩌다가 법전이 어린 딸의 말문을 여는 처방전이 된 것인지 몰라도 어쨌든 우영우는 법전을 통째로 머리에 입력하듯 달달 외우는 소녀였고 자폐 스펙트럼 증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법학과와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한 수재였다. 그렇게 변호사가 된다.
제목 그대로 우영우는 이상한 변호사다. 스스로 정상적이라 인식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세계에서 남의 말을 복사하듯 따라 하는 반향어 증세는 반항처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버릇처럼 여겨진다. 뒤뚱뒤뚱 걷는 걸음걸이와 좀처럼 눈을 맞추지 못하는 시선만으로도 자질이 의심스럽다. 하지만 우영우는 단지 법전만 잘 외우는 암기력의 천재가 아니다. 정상적인 변호사들이 보지 못하는 관점을 파고들어 간과된 법리의 틈새를 벌리고 재판의 양상을 되돌린다. 승소에 유리한 법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유무를 가리고 피의자 혹은 피해자의 억울함을 돌보는, 법조인의 직분으로 돌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거꾸로 해도 달라지지 않는 우영우라는 이름은 앞과 뒤가 다르지 않은 변호사라는 직업의 본질을 강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기기 위한 법리가 아니라 따져야 하는 법리를 살피고 물어야 하는 법도를 외면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어색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이 가진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인정하지만 “법을 사랑하고, 피고인을 존중하는 마음만은 여느 변호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호인으로써 피고인을 도와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이 봐야 할 곳을 보고, 해야 할 일을 하는 변호사임을 명확히 선언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명백히 의도된 판타지일 것이다. 현실을 곧이곧대로 반영한 결과이기보단 바라는 현실을 적용해 포장한 허구적 현실에 가깝다. 일종의 우화다. 물론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변호사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장애가 있지만 변호사로 활동하는 우영우가 현실에서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고자 기획된 드라마처럼 보이진 않는다는 의미다. 우영우처럼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변호사가 현실에 필요하다고 강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드라마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제목은 언뜻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우연히 ‘이상한 나라’로 들어선 앨리스가 그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취급을 당하며 기이한 모험을 하는 것처럼 우영우 역시 종종 진짜 ‘이상한 변호사’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이상한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법리를 따져 의뢰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는 것이 변호사의 책무라고 하지만 그것이 송사에서 유리한 법리 해석에만 능하다면 과연 그 변호사는 좋은 변호사일까?
우영우는 “자폐인은 남의 말에 잘 속고, 거짓말을 못하기로 유명합니다”라고, “거짓말에 속지 않으려면 매 순간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의 유무와 무관하게 승소를 위해 자기 의뢰인에게 유리한 법리 해석에 능한 변호사가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세계에서 우영우처럼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변호사란 끝내 이상한 변호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영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인 셈인데 그 물음표를 받아들이는 건 시청자의 몫일 것이다.
“만약에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게 있다면 그건 우리 드라마라기보다는 우리 드라마를 계기로 쏟아져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한다. 저도 우리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를 최대한 겸허하고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려고 하고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각본을 쓴 문지원 작가의 말처럼 우영우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앞으로 시청자를 인도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물음에 각자의 방식대로 답하길 권하는 안내자인 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그려지는 재판 장면은 대부분 현실에서 일어난 실제 송사를 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드라마의 화제성을 더욱 를 모으고 있다. 이는 이 드라마가 천재 장애인이라는 캐릭터로 특별한 이목을 끄는 것보다도 그런 캐릭터가 실제적인 현실의 문제를 비장애인 변호사보다도 더 예리한 시선으로 명확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현실에 좀처럼 존재하기 어려운 장애인 변호사가 존재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허구로나마 소비하는데 탐닉하길 권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되레 지극히 비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장애인 변호사의 시선을 빌려 정상적으로 판단했다고 여긴 답변을 뒤집어 질문해보자는 물음을 설계한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장애인의 현실을 왜곡한다고 비판한다는데 그 주장에도 나름의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천재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허구적인 설정이다. 하지만 이 모든 화두는 우영우 덕분에 발생한 것이다. 실제로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장애의 정확한 명칭도 이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중요한 건 ‘드라마가 현실을 잘 반영하는가?’ 아니라 ‘드라마가 던진 질문에 우리는 좋은 답을 찾고 있는가?’일지도 모른다. 옳은 건 늘 옳고, 그른 건 늘 그르다. 정상과 비정상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를 묻고 답해야 한다. 비록 장애가 있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우영우는 늘 그렇게 묻고, 답한다.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늘 그대로인 우영우라는 이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