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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un 27. 2022

오직 추는 자만이 자유롭다

바야흐로 댄스 전성 시대다. 춤으로 소통하는 시대가 왔다.

일반인이 참가하는 노래 경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이 좁은 나라에 이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다니 신기하구나. 요즘은 SNS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 좁은 나라에 이렇게 춤 잘 추는 사람이 많다니 신기하구나. 사실 SNS에 춤과 관련한 추천 영상이 뜨는 건 귀신 같은 알고리즘 때문일 것이다. SNS 피드를 통해 작년에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대한, 최근에는 <쇼다운>에 대한 썰을 풀었더니 그전까지 추천영상 팔 할을 차지하던 고양이를 밀어내고 일면식 없는 춤신춤왕들이 내 타임라인을 지배했다.


사실 <스트릿 우먼 파이터> 덕분에 한동안 국민체조급 안무가 된 ‘Hey Mama’ 커버댄스 영상으로 SNS가 도배되기 전에도 춤을 추는 영상은 많이 봤다. 지코의 ‘아무노래’ 댄스 챌린지나 BTS의 춤을 ‘복붙’하듯 따라 추는 사람들을 보면서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고등학생 시절에 잠시 방과 후 취미활동 수준으로 춤을 췄다. 덕분에 춤을 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걱정스러운 훈계를 들어야 했다.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당장은 춤이 재미있겠지만 지금 공부하지 않고 춤만 추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는 게 공통된 요지였다.


춤추면 고생한다는 어른들의 인식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출연한 댄서들이 토로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댄서라는 직업의 입지는 아직까지 여러모로 불분명하고 불확실하다. 물론 세상은 바뀌었고, 춤을 일상적인 언어처럼 마주하는 경우가 잦은 요즘 세상에서 몇몇 댄서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플루언서로 등극했지만 여전히 춤을 추기 위해 생계를 해결할 겸업을 하는 댄서도 적지 않다. 물론 누가 강요한 일도 아니기에 그 모든 사정에 관여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국 댄서들의 세계적인 역량을 고려한다면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무대가 생겨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때가 됐다고 말할 시점도 온 것 같다.


JTBC에서 방영한 브레이킹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다운>은 브레이커들의 댄스 배틀을 의미하는 단어 ‘쇼다운(Showdown)’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역동적인 브레이킹을 구사하는 한국의 월드 클래스 댄서들이 대거 출연해 경합을 벌이는 프로그램이다. 아마 이 글이 실린 잡지가 발행됐을 즈음에는 마지막 회가 끝난 이후일 텐데 매회마다 수준 높은 퍼포먼스와 댄스 배틀을 보는 묘미가 대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나 화제성이 저조한 것을 보면 스트리트 댄스가 유행하는 시대에도 일반인에게 브레이킹이라는 장르는 아직 낯선 세계인 것 같다.


브레이킹은 속된 말로 바닥 닦는 춤이라고도 하는데 상체를 댄스 플로어에 가깝게 붙이고 두 다리를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구르는 윈드밀 같은 기술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덕분일 것이다. 아크로바틱 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기술이 상당한 장르라 대체로 남성 댄서인 비보이가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에 일찍이 비보잉이라 불리는 것이 익숙했지만 비걸이라 불리는 여성 댄서가 늘어나면서 공식적으로는 브레이킹이라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도 브레이킹이라는 이름으로 신설 종목에 채택됐다. 그러니까 바야흐로 브레이킹 댄서들도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시대다. 그리고 한국은 세계적인 브레이킹 강국이다.

21세기 초부터 한국 브레이커들은 내로라하는 세계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20여 년 간 전성기를 이어오는 중이다. 한일월드컵 4강 신화로 대변되는 2002년은 한국 브레이킹 역사의 원년이라 할 수 있는 해였다. 1990년대부터 독일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브레이킹 대회 <배틀 오브 더 이어>에서 한국의 익스프레션 크루가 아시아 크루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해였기 때문이다. 현재 <쇼다운>의 저지로 출연 중인 이우성은 당시 익스프레션 크루를 이끄는 단장이었다. 2003년 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고, 그 대회에서 3위에 오른 갬블러 크루는 2004년 대회에서 우승을, 2005년 대회에서 3위에 올랐고, 2009년 대회에서는 다시 우승을 차지했으며 2010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2010년 대회에서 우승한 진조크루는 2018년과 2021년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갬블러 크루와 진조크루는 현재 <쇼다운>에 참가한 크루로 나란히 결선에 진출했는데 <쇼다운> 결선에 오른 크루 중 퓨전 M.C. 역시 2013년과 2014년 <배틀 오브 더 이어>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는 크루다.


“한국 댄서의 위상을 알린 장르가 브레이킹이라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특별 심사위원을 의미하는 스페셜 저지로 <쇼다운>에 출연한 댄서 리아킴의 말처럼 한국의 브레이킹 신은 일찍이 세계적인 수준의 비보이를 배출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면에서 브레이커들의 대중적 인지도가 낮다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향후 몇 년 사이 판도가 달라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한국의 모든 것이 K라는 알파벳을 내걸고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서 브레이킹은 ‘K무엇’이라는 발음에 기대지 않고도 로컬이 아닌 글로벌이었다. 어쩌면 파리 올림픽이 열리는 2024년은 한국 브레이커를 위한 새로운 원년이 될지도 모른다. 국가대표 브레이커가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 무대를 닦아가며 경합을 벌이는 풍경으로부터 한국의 브레이킹 전성기가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한국 브레이커의 수준이 그만큼 높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는 그림이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백문이불여일통'의 시대다. 멋진 건 즉각적으로 통한다.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춤 영상을 올리는 이들이 즐비한 것도 지금 세상에서 가장 잘 통하는 언어를 멋지게 뽐내겠다는 본능의 발휘인 것이다. 춤이 지금 통하는 언어라는 감각을 체감하는 덕분일 것이다. 스스로를 마음껏 표현하고 드러내며 관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서 춤만큼 소통이 원활한 직관적인 언어도 없다. 국적도, 인종도 상관없다. 멋진 건 통하게 돼있다. 그리고 시대도 바뀌었다. 춤이란 자신만의 고유한 육체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지금 내가 즐기는 감정을 만인과 함께 나누는 행위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나 자신을 대변한다는 쿨한 선언에 가깝다. 나를 증명하기 위한 긴 설명이 필요 없다는 작금의 시대 정신이 반영된 본능의 언어다.


그러니까 춤이란 온전히 지금의 나를 보여주겠다는 선언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지금의 나 자신에게 집중해온 브레이커들이 마주한 세계적인 환호가 국내에서도 통용되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 떠나서 춤이나 추면 먹고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구태의연한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로 촉발된 댄서의 전성기가 <쇼다운>을 지나 새롭게 시작한 <비앰비셔스>나 <스트릿 멘 파이터>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시대가 왔지만 지금보다 더 댄서블한 시대가 되길 바란다. 내일의 밥벌이를 위해 오늘의 낙을 포기하는 시대는 지났으므로, 춤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더 나은 미래를 열어줄 것이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6월 두 번째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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