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세기말 분위기가 세상을 감싸던 1999년 1월, 정확한 날짜까진 기억나지 않던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이정재와 정우성이 주연을 맡은 영화 <태양은 없다>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당시 극장은 지정좌석제가 아니었다. 멀티플렉스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던 그 시절의 극장은 대체로 단관극장이었다. 심지어 좌석수가 넘쳐도 티켓을 팔던 시절이었다. 수요가 있으면 무조건 공급했기에 인기가 있는 영화 같은 경우 상영관에 들어왔다가 좌석이 없어서 낭패인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면 통로 계단에 앉거나 서서 영화를 보던 시절이었다. 반대로 착석한 좌석에서 일어나지 않을 결심을 하면 다음 상영을 봐도 상관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온종일 극장에 앉아있을 수도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스크린을 응시하던 나와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 별말 없이 다시 시작하는 영화를 한 번 더 봤다. 그렇게 한 번 더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빠져나와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온 길을 걸으며 줄곧 <태양은 없다>와 도철과 정우성과 홍기와 이정재에 관해 떠들었다. 유치하게 내가 도철, 내가 정우성, 네가 홍기, 네가 이정재, 이러면서 길을 걸었다. 아무래도 이정재가 연기한 홍기보단 정우성이 연기한 도철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인데 남의 등쳐먹고 도망이나 다니는 홍기보단 권투선수 출신의 과묵한 아웃사이더 도철이 훨씬 멋있게 보일 나이였다. 어쩌면 절세미남 정우성의 섀도 복싱 장면이 너무 멋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복싱은 얼굴이구나’ 착각해도 무방할 정도의 멋짐이랄까.
그게 벌써 23년 전이라고 했다. 정우성과 이정재가 함께 출연한 <헌트>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헌트>는 정우성과 이정재가 <태양은 없다> 이후로 함께 출연한 23년 만의 영화다. 23년 전 남루한 청춘을 연기하던 두 젊은 남자는 이제 거대 권력의 배후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두 중년 남자가 됐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덧없이 무상하기만 한 세월이 두 사람에게는 참 멋지게도 무상했나 보다. 더 이상 젊은 나이가 아님에도 온몸을 내던지는 액션 연기를 펼치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육신의 능력이 놀라웠다. 잘 늙는다는 의미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연기였다.
잘 늙어가는 배우가 비단 두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재와 정우성의 현재를 이토록 조명하고 싶은 건 두 사람이 불세출의 스타로서 지위를 공고히 다져온 성실한 별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시절에는 유산 같은 언어가 됐지만 소위 말하는 ‘길거리 캐스팅’이란 것이 존재했던 90년대는 이정재와 정우성을 스쳐 지나는 인연으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압구정동 카페에서 알바를 하다가 ‘나랑 일해볼래?’라는 매니저에게 명함을 받았다는 미남, 미녀들이 득세했던 시절에 ‘탑티어’급 외모를 가진 두 사람이 받은 명함이 한두 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잘생기고 멋진 두 배우이지만 90년대에 두 배우의 모습은 한국의 미남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는 네오 창세기이자 넥스트 레벨 그 자체였다. 요즘 젊은 미남 그 누구를 갖다 붙이고 밸런스 게임을 해도 그 시절의 이정재와 정우성을 이기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정재와 정우성의 멋은 단순히 외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 같지 않다. 최근 영화 홍보에 매진하며 갖은 미디어에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두 사람의 멋진 투 숏에는 일말의 거추장스러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를 대하고 받아들이는 친밀함이 산천이 어우러지는 풍경처럼 자연스럽다. 함께 세월을 지나온 동료에 대한 예우가 각별해서 놀랍다. 단순히 서로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형식적 예의를 넘어 진정으로 서로를 아끼고 응원한다는 것이 느껴지는 우정의 예우에서 품위와 자부심이 느껴졌다. 23년의 세월을 거쳐 함께 50대에 들어서는 또래 배우가 그런 각별함을 유지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강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정재와 정우성은 한 시절을 풍미했던 과거형의 스타가 아니다.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 현재진행형의 반짝임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별이다. 스타는 시절을 추억하게 만든다. 90년대 바이브 같은 언어가 괜히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시절의 바이브는 그 시절에 빛나던 어떤 존재를 통해 더욱 형형해진다. 그러니까 스타란 지난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게 만드는 고향 같은 존재다. 그런데 그것이 비단 돌아보지 않아도 눈앞에 존재하는 현실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 모든 추억은 시간여행처럼 펼쳐지는 동시대 기억이 된다.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 감정은 세상을 보다 아끼고 싶은 마음을 낳는 근원적인 감각이기도 하다. 결국 그런 지위를 유지하는 스타를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건 나름 기쁘고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다.
이정재와 정우성을 보는 반가움은 그들이 멋진 배우로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 이상으로, 나잇값을 하는 어른이 되고 있다는 인상 덕분인 것 같다. 물론 두 배우의 경력이 언제나 꽃길은 아니었다. 대표작도 있지만 소위 말하는 망작도 있고, 연기력이 평가절하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배우로서 거듭 도전하고 증명하며 끝내 자신의 경력을 온전히 인정받고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선택을 해냈다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귀감이다. 특히 <헌트>는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이자 각본가로서 도전하고 훌륭한 성취를 일궈낸 이정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의 팬을 자처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정말 멋진 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취가 오랜 절친과 함께 거둔 결실이라는 사실은 어느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한 현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정우성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난민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물러섬이 없다. 블랙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통수권자에 대한 비판에도 거리낌이 없다. 꼿꼿하다. 나는 이런 사실이 정우성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배우에게 사회 문제에 관한 발언을 해야 할 책임이나 당위는 없다. 오히려 그런 발언을 의식해서 뱉는다면 되레 어색할 것이다. 몸에 힘이 들어간 연기가 좋지 않은 것처럼 목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도 좋은 메시지가 되긴 어렵다.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정우성의 발언과 행동은 진지한 만큼 자연스럽다. 그만큼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일 것이다.
이정재가 공적으로 사회적 발언을 자주 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헌트>는 그 자체로 그가 사회와 역사를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 같다. 군부 독재 시절을 배경에 둔 이 팩션 영화는 화술과 연출의 성취만큼이나 우리가 끝내 청산하지 못한 부조리한 역사를 뼈 때리듯 통감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연사 외치듯 힘줘서 말하지 않아도 작품을 통해 그런 시선과 관점을 드러낸 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이정재와 정우성은 세상과 동떨어진 별이 아니라 이 세계에 두 발을 딛고 함께 숨 쉬는 존재로서, 품위 있게 빛나는 길을 선택했다. 우리에게는 귀감이 될만한 아이콘이 필요하다. 고로 이정재와 정우성처럼 스스로 빛나는 스타를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별은 스스로 빛나야 제멋이다. 그 빛을 응원한다.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9월 첫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