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융복합의 새 시대를 위한 과도기적 현상, 문화적 전유에 관하여.
문화란 일찍이 융복합의 역사였다. 동방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리아 3세, 그러니까 알렉산더 대왕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한 뒤 인더스 강까지 당도했다. 7년의 대장정 끝에 인도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인도가 동토의 끝이라 생각했고, 인도를 정복하면 세상의 끝에 다다를 것이라 믿었다. 대왕의 마음은 이미 진군 중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마음은 달랐다. 오랜 행군과 전투에 지친 병사들에게 동토의 낯선 기후와 환경은 그 자체로 거친 복병이었다. 병사들의 마음은 이미 퇴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알렉산더 대왕은 세상의 끝으로부터 등을 돌려 병사들과 함께 페르시아의 수도 바빌론으로 되돌아왔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정복자로 꼽히는 알렉산더 대왕은 단순히 땅따먹기에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통치는 비단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너른 영토를 지배한 비결은 현지화 전략이었다. 스스로 자신이 정복한 페르시아 왕의 공주와 결혼하고 그리스 군인과 페르시아 여성의 결혼을 장려했으며 현지인을 중용했다. 피가 섞이니 생각이 섞이고 자연스레 없던 문화가 탄생했다. 정복자의 야심으로 나아간 역사와 함께 새로운 문명이 탄생했고, 훗날 헬레니즘 문화라 명명됐다. 동서양 문화를 융복합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력으로 언급되는 간다라 미술이란 인간의 형상을 한 최초의 불상이 제작된 간다라 지역의 불교미술을 의미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유행이었을 것이고, 유행은 널리 전파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로 꼽히는 영광 법성포 지역에서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새삼스럽게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꺼내 든 건 주제넘게 역사 강의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엉뚱한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오늘날 말하는 문화적 전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침략과 정복의 인과로 도래한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결실은 오늘날 말하는 문화적 전유와 무관할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화적 전유란 말인가?
사실 한국에서는 문화적 전유가 아직은 다소 낯선 개념일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제국주의 시대에 타 대륙 국가를 침략하고 문화를 점유한 대부분의 서구 국가와 백인들의 문화적 침탈과 전유에서 비롯된 비판적 용어가 일제강점기 시대를 지난 아시아 국가에게 적용될 가능성이란 만무하기도 하다. 그런데 문화적 전유라는 용어의 쓸모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 같다. 그리고 문화적 전유라는 언어 자체가 발음할수록 낯선 것도 사실이다. 마치 미국산 김치 같은 느낌이랄까. ‘문화적 전유’라고 번역된 한국어가 ‘Cultural Appropriation’이라는 영어의 본래 의미를 정확히 대행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한편으로는 ‘혼자 독차지하여 가짐’이라는 의미의 ‘전유’보다는 ‘남의 물건이나 명의를 몰래 씀’이라는 의미의 ‘도용’이 한국 실정에는 더 어울리는 단어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적 전유가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에 둔 착취라고 이해한다면 동시대 한국 대중문화를 지칭하는 K콘텐츠의 전 세계적 인기 안에서 분명 해결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는 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서 문화적 전유라는 언어가 눈에 띄기 시작한 건 K팝을 둘러싼 몇 가지 논란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K팝 산업에서 기획한 아이돌 세계관의 콘셉트에서 불거진 논란이다. 이를 테면, 블랙핑크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힌두교의 신 가네샤 상이 바닥에 놓여있는 것이 인도인에게는 모욕적인 문제가 된다는 논란이나 오마이걸의 유아가 솔로 데뷔 앨범을 발매하며 공개한 타이틀곡 뮤직비디오에서 에스닉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해당 복장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원주민 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콘셉트라는 지적이나 NCT 멤버들이 노래를 하는 무대 배경으로 이슬람 모스크 사원이 등장한 것이 종교 모욕이나 다름없다는 문제제기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이 모든 논란은 선을 넘어서 생긴 일이다.
K팝이라는 언어 자체가 그러하듯 한국 대중가요는 이제 더 이상 한국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한국 대중가요 안에서 ‘로컬이 아닌 글로벌’로 분류되는 아이돌 음악 장르가 그렇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기록적인 유튜브 스트리밍 조회수를 기록하고 빌보드 핫 100 차트 2위에 오를 때만 해도 이 모든 일은 흥미로운 사건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거듭 이름을 올리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이제 K팝은 전 세계적인 주류 문화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빌보드’를 기입하고 엔터키를 눌러보면 빌보드 차트에 차트인 됐다는 K팝 아이돌 그룹의 이름이 주르륵 뜬다. 과거 MTV나 채널V 같은 해외 음악채널을 시청하며 팝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에게 K팝의 세계적인 인지도는 생경한 일이겠지만 동시대의 10대들에게는 K팝이 주류인 세계가 공기로 호흡하듯 당연한 일상일 것이다.
사실 K라는 알파벳으로 위시한 세계적인 반향은 비단 K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으로 황동혁 감독과 배우 이정재가 에미상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주요 부문 트로피를 거머쥐며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르고,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바야흐로 K콘텐츠의 시대다. 물론 뾰족하게 드러난 성취로 해당 산업의 모든 결과가 전 세계적인 취향과 소비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영화, 한국 드라마, 한국 대중음악 등 K라는 알파벳을 내건 한국산 콘텐츠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 더 이상 무색한 일이 아니다. 한류라는 유사 잠룡 같은 언어로 솜사탕처럼 부풀린 국뽕을 빨댄 시대는 정말 확실히 지났다. K콘텐츠는 실체가 있는 현상이다. 다만 유명세가 높아질수록 그만한 명암도 따라오는 것이다. K로 위시한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는 문화적 전유라는 새로운 시대의 허들을 넘어야 한다.
일단 스토리텔링 기반의 한국영화나 드라마는 K팝에 비해 문화적 전유의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같다. 이를 테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등장하는 인디언 모자나 인디언 텐트가 문화적 전유의 논란에 휘말리지 않은 건 그러한 소품이 등장하는 배경 자체를 공감할 수 있는 기저 심리가 그 작품 안에 마련된 세계관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확보한 덕이다. 체 게바라라는 공산주의 혁명가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티셔츠에 프린팅 된 아이콘으로 상품화되는 것처럼 인디언 문화나 역사에 관한 맥락을 무시하듯 인디언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소비하는 자본주의 속성은 <기생충>의 메시지를 되레 강화하는 미장센으로 기능한다고 평가할 만하다. 영화의 맥락과 무관하게 우스꽝스럽게 동원된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심리를 강변하는 은연 중의 풍경이라 인정할 수 있다. 물론 <기생충>이 아닌 여타의 작품이나 창작자의 관점이 문화적 전유의 논란을 부를 수도 있겠지만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야기와 무관한 장식을 동원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기에 그런 논란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것이다.
K팝과 관련된 문화적 전유에 관한 논란은 대체로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소품과 공간에서 비롯된다. 뮤직비디오에도 나름의 스토리텔링이 동원되지만 언어 그대로 ’비디오’인지라 아티스트와 음악을 위해 기획된, 아티스트와 음악을 수식하는 병풍이자 부속물에 가깝다. 그만큼 면밀하게 디테일을 채워 넣을 수도 있겠지만 단편적인 기획인 만큼 방심할 확률도 클 것이다. 이를 테면 ‘에스닉한 콘셉트’ 혹은 ‘오리엔트 스타일’ 같은 콘셉트로 정의된 시안을 바탕으로 시각적으로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마구잡이 세계관이 세워지는 경우도 더러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는 K팝이 이제 한반도 남한에서만 향유하는 콘텐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덕분에 잘 모르지만 뭔가 콘셉트에 어울리고 그럴듯해 보이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채우고 세운 미장센에서 드러나는 타문화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의 비판 대상이 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는 것이다.
K팝은 근본적으로 서양의 팝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국 내수 시장 안에서 소비하는 과정에서 웰메이드 콘텐츠로 가공하는 프로덕션이 발달했고 그것이 끝내 전 세계적인 수요에 어울리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증명한 결과에 가깝다. 태생적으로 한국 문화에서 태어난 산물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한국 문화의 산업 기반 위에 받아들여 깎고 닦아낸 수련의 산물에 가깝다. 태생의 결과가 아니라 입양해 잘 길러낸 결과라는 의미다. 그리고 처음부터 세계 시장에 진입할 야심을 갖고 길러낸 결과가 아니라 독자적인 내수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보다 너른 세계 시장까지 다다랐고, 그 접점을 새롭게 고민해야 할 시기가 왔거나 이미 지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K팝은 더 이상 하위문화가 아니다.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는 변두리 간판 같은 것이 아니다. 전 세계 팬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소비하는 주류 문화이자 주요 트렌드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본의 아닌 무례함 같은 것을 방치할 겨를이 없다. 사소한 실수가 산업적 손실이 되는 시장을 확보해버린 입장이라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선 타민족과 타인종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반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문화적 전유의 기준선을 마련하고 견지하는 태도도 중요할 것이다. 직접적으로 드레드락 헤어 스타일을 한 박재범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가 업로드된 유튜브 영상에 그것을 문화적 전유로 규정하고 공격적인 댓글을 남긴 흑인들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렇다. 드레드락 헤어 스타일에 얽힌 흑인들의 고단한 역사를 존중하기 위해서 그런 스타일을 할 권리가 흑인에게만 있다는 주장은 이해는 하나 온전히 납득하기 힘든 면도 있다. 드레드락 스타일을 한 아시아 힙합 뮤지션은 애초에 성립 불가한 것일까? 이 물음은 일찍이 자신의 입장을 정중하게 표방한 박재범의 댓글을 통해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흑인 문화와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다. 흑인 문화에서 비롯된 것을 통해 주변에 사랑을 전파하고 발전시킨다.”
결국 이 모든 건 예의와 심지의 문제다. 뭣이 중한지 모르면 뭣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를 것이다. 추구하는 바가 그릇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제 몸에 두르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면 최소한 문화적 전유의 비판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더 나아가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타문화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문화적 전유를 경계하며 타문화를 배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21세기에 하나의 혈통으로만 이어온 단일민족이라는 언어가 허황된 것처럼 단일 문화라는 것도 불가능한 전제일 것이다. 전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늘을 맞이했고, 오늘날에는 더 많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뒤섞이고 얹고 얹혀 보이지 않는 층위로 혼재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전통은 결국 쇠퇴하고 퇴락하기 마련이다. 쓰지 않는 칼도, 향유하지 못하는 문화도 녹스는 법이다. 한국인도 입지 않는 한복을 입고 궁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이것을 문화적 전유로 여기고 금지하려 든다면, 그냥 그런 주장 자체를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한국 대중문화의 저력이 앞으로도 이어질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거듭해서 절정을 갱신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 덕분에 한국인이라면 매년마다 예정에 없던 거대한 불꽃놀이를 우연히 보는 기분을 느끼고, 평소 국뽕을 혐오하던 이들도 그날만큼은 마음껏 취해보자고 여기는 이벤트가 종종 찾아오는 것 같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위상이 올라간다고 해서 좋은 인식까지 정비례하게 상승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 전유에 관한 지적은 K팝으로 위시한 한국문화가 간과해온 시선과 관점을 한 번 더 깎고, 다듬을 시기를 종용하는 것 같다. 동시에 주류 문화를 이끌고 있다는 위상을 재인식하며 세계 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도 새로운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 전유는 금기의 십자가가 아니라 주목할 만한 복음일 것이다. 존중하되, 건너야 할, 그 너머로 다다라야 마땅한 과도기적 언덕인 셈이다. 넘으면 비로소 또 보일 것이다.
('alookso'에서 기획한 문화적 전유 특집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