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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Sep 25. 2022

'헤어질 결심'이 그렇게 갖고 싶습니까?

<헤어질 결심>이 부추긴 소유욕, 영화 각본집이 팔리는 이유에 관하여.

‘나왔구나… 마침내!’ 그렇게 시작됐다. <헤어질 결심 각본> 온라인 서점 예약 판매가 시작된 지난 7월 18일, 해당 서적의 한줄평에 뜻밖의 백일장이 열렸다. 소위 말하는 ‘<헤어질 결심>에 미친 자’들, 일명 ‘헤친자’들이 <헤어질 결심> 대사를 패러디한 한줄평 드립을 융단 폭격하듯 쏟아낸 것이다. 그리고 ‘헤친자’들이 ‘드립칠 결심’만 한 건 아니다.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한 <헤어질 결심 각본>은 예약 판매 시작 당일 주요 온라인 서점인 ‘예스24’와 ‘알라딘’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28일 정식 출간 직후에는 온오프라인 판매를 병행 집계하는 교보문고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다. 영화 각본집이 예술/대중문화 분야가 아닌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건 <헤어질 결심 각본>이 처음이었다. 


“각본집은 출판계에서 봤을 때 ‘갑툭튀’ 아이템이긴 해요.” 한스미디어 이나리 편집자의 말처럼 영화 각본집은 현재 출판계의 뜨거운 감자다. 영화 각본집이 적극적으로 출판되고 높은 판매고를 올리는 현상은 채 10년이 안 됐다. 처음으로 제법 팔린다는 인식을 심어준 건 2016년 ‘그 책’에서 출판한 <아가씨 각본>이었다. 그해 <아가씨> 각본을 비롯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 네 편의 각본집을 출간했고 그중 <아가씨 각본>이 3만 부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며 나름의 반향을 일으켰다. 


“문화 소비의 양태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거 같아요. 좋아하는 영화와 관련된 상품을 사서 즐기고 소장하는 관객이 있다는 거니까요. 그게 아니면 <아가씨> 각본을 출판하거나 OST 앨범을 LP로 내겠다는 생각조차 못했겠죠.” 박찬욱 감독은 영화 <아가씨> 제작 과정을 면밀히 기록한 백서 <아가씨 아카입> 출간이 가능했던 이유가 관객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 답변은 13인의 감독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에 수록돼 있다. <아가씨>와 관련한 다양한 서적이 출판되고 이 모든 책이 상당한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던 건 해당 영화에 충성도가 높은 팬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련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관객이 존재한다면 각본집을 포함한 서적을 기획해봐도 좋다는 사례를 <아가씨>가 확실히 증명한 셈이다.

“1년 전 박찬욱 감독님을 뵀을 때 차기작 각본집도 내보자고 가볍게 말씀드린 게 시작이었어요.” <헤어질 결심 각본>을 출판한 을유문화사 정상준 대표의 말이다. 정상준 대표는 일찍이 출판사 ‘그 책’ 대표 시절에 <아가씨 각본>을 비롯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네 편의 각본집 시리즈와 <아가씨 가까이> <아가씨 아카입>을 출판했던 전력이 있었다. 소문으로는 <헤어질 결심> 각본집 판권을 얻고자 노력한 출판사가 적지 않았다는데 <헤어질 결심 각본> 이전까진 영화 각본집 한 번 출판해본 적 없었던 을유문화사가 낙점된 건 아무래도 박찬욱 감독이 과거 자신의 영화와 관련한 서적을 출판한 바 있는 정상준 대표를 신뢰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된다. 그 근거는 영화 <헤어질 결심>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서래(탕웨이)가 보내는 투서에 타이핑한 글자의 서체는 을유문화사에서 개발한 서체 ‘을유 1945’이기 때문이다. 을유문화사의 서체 개발 소식을 미리 들었던 박찬욱 감독이 출판사에 요청한 덕분에 이뤄진 결과였다.


“시장 예측을 전혀 못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5000부만 찍으려고 할 정도였죠. 그런데 예약 판매 이후로 주문이 밀려들어서 정말 몇 쇄가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인쇄를 계속 돌렸어요.” 정상준 대표의 말처럼 <헤어질 결심 각본>은 예상 불가능한 파도였다. 9월 중순 기준으로 15쇄를 찍었고 8만 부 정도가 판매된 것으로 집계되며 올해 안에 10만 부 가량 판매될 것으로 추계된다. 사실 <헤어질 결심>은 한 영화를 극장에서 여러 번 관람하는, 소위 말하는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많은 영화로 꼽혔다. 그만큼 화제성도 상당한 작품이었는데 특히 대사를 패러디하는 것이 SNS상에서 유행하며 대중적 회자가 활발했던 작품이라 영화에 호감을 가진 관객이라면 각본집에 거는 기대도 상당했을 것이고, 일찍이 소유욕이 동했을 것이다. 인상적인 대사를 활자로 다시 읽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영화로부터 파생된 책 자체를 소장하겠다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일종의 검증된 콘텐츠에 대한 소장 욕구가 아닐까 싶어요. 이젠 책도 하나의 굿즈로 여기면서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한경BP 편집자인 김정희 팀장의 말이다. <헤어질 결심> 각본집의 인기가 상당하지만 실제로 대중적인 판매가 더욱 원활한 건 영화 각본집보단 인기 있는 드라마 대본집이다. 올해 7월까지 예스24에서 집계한 2022년 드라마 대본/영화 각본 베스트 10 가운데 여덟 권이 드라마 대본집이다. <그 해 우리는>과 <나의 아저씨> <멜로가 체질> 등 팬덤이 상당한 드라마 대본집이 수위를 차지했는데 지난 9월에는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대본이 출간돼 역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드라마 대본집의 인기는 현재 출판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각본을 소설로 각색한 도서의 편집자였던 김정희 팀장은 해당 도서 판매가 기대에 비해 부진했다고 한다. 그 이유로 드라마 주시청자층이 도서 주요 고객인 30~40대 여성이 아닌 40대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꼽았다. 현재 출판 시장에서 주된 고객인 30~40대 여성 독자에게 어필하지 못하면 드라마의 인기가 꼭 책의 판매로 이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결국 영화의 팬덤도 중요하지만 출판 시장의 주요 고객을 고려한 기획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새는 애매하게 기획된 책은 어려워요. 사람들이 수동적인 소비자로 존재하지 않고 직접 경험하고 해석하고 즐기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진 거 같아요.” 이나리 편집자의 말처럼 좋은 책을 잘 만들어서 판다는 말은 동시대 출판 시장에서 순진한 소리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독자가 선택할 만한 책을 기획하고 판매해야 한다는 강박이 출판계에 만연한 건 그만큼 책을 팔기 어려운 시대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시대에서 영화 각본집과 드라마 대본집은 황금알까진 몰라도 알을 낳는 거위 정도는 되는 법이다.


물론 독자가 원하는 책만 만든다면 그 역시 출판시장의 빠른 종용을 권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헤어질 결심 각본>도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기보단 박찬욱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는 정상준 대표가 일찍이 각본집 낼 결심을 한 덕분이었고, <헤어질 결심> 스토리보드북을 비롯한 관련 서적도 일찌감치 기획돼 출판을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도 각본집은 촬영이나 편집 과정에서 덜어낸 분량을 온전히 갖고 있는 오리지널 판본이나 다름없다. 고로 각본집을 읽는다는 건 영화를 한 번 더 새롭게 관람하는 행위에 가깝다. 이는 영화도, 책도, 새로운 감각으로 인식하는 경험일 것이므로 그런 관객과 독자가 늘어난다는 건 분명 영화계에도, 출판계에도 긍정적인 신호일 것이다. 영화가 끝났다고 각본집 보기를 중단할 수 없는 관객과 독자에게도.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1st Look' 매거진 9월 두 번째 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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