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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14. 2023

'대깨반일'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왜 보냐고?

가자.

인스타 DM 요청을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무릎 반사처럼 뉴진스의 ‘OMG’ 뮤직비디오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가자.’ 이 뮤직비디오는 동시대에서 참 여러모로 실용적이고 상징적이라니까. 그러니까 이 칼럼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라고 시작하는 ‘행운의 편지’처럼 인스타 DM에서 비롯돼 얼룩소까지 당도하게 된 것이다. 일면식도 없지만 어딘가 단단히 꼬인 작자가 보낸 듯한 DM 따위는 무시해 버리면 될 일이고, 환자는 전문의의 상담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라 내 소관도 아니었지만 한없이 엉망진창으로 수렴하는 저 문장 사이로 묘하게 뒤틀린 심사가 읽히는 것이 기괴하게 흥미로웠다.

내가 만든 쿠키는 아니고 내가 받은 인스타그램 DM

이제부터 DM을 보낸 이를 연진이라고 지칭하겠다. 그러니까 이 칼럼은 내게 DM을 보낸 연진이에게 보내는 답장이기도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 관람 여부가 친일과 반일을 구획하는 기준이라 여기는 수많은 연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연진이가 보낸 DM은 자기 수준에 어울리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반일은 정신병’이라던 그가 ‘존나게 반일하더니 슬램덩크는 왜 보냐’라는 문장으로 점프하는 과정이 매우 의아했다. 내가 언제 ‘존나게 반일’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는데. 내가 전생에 이토 히로부미라도 저격했나? 아, 그건 반일인 아니라 항일인가? 아무래도 잘 모르겠어, 연진아. 그런데 연진이가 보낸 세 번째 DM에서, 구체적으로는 ‘니 같은 대깨반일정신병자새끼들’이라는 아무말대잔치의 포로가 된 단어들 사이에서 일말의 단서를 찾아낸 것 같다. 


‘대깨’란 소위 ‘대깨문’이라 부르는, 문재인 전 대통령 지지자를 비하하는 언어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추정해 보자면 연진이는 문재인 정권에 유감이 많다. 그래서 대일외교 강경노선이 분명했던 문재인 정부를 반일정권으로 규정한 것 같고, ‘대깨’와 ‘반일’이라는 두 단어를 한일합병하듯 묶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여긴 것 같다. 물론 연진이가 문재인 정권이 싫어서 ‘반일’에 골몰하게 됐는지, ‘친일’ 성향의 연진이가 문재인 정권의 대일 강경 외교 정책에 열이 받아서 ‘대깨’라는 단어를 쓰는 아이가 됐는지, 그 전후 맥락을 알 수는 없지만 연진이는 지금 분명 ‘대깨’와 ‘반일’을 하나의 몸통이라 여기는 아이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그러니까 연진이에게 ‘대깨’와 ‘반일’은 한 몸이고, 연진이 기준에 그들은 곧 ‘정신병자새끼들’인 것이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 연진아. 왜 내가 ‘대깨반일’인 거지? ‘정신병자새끼들’은 열받으라고 쓴 거 같은데, 그전에 내가 대깨반일로 규정된 이유가 뭘까? 내 입장에서 추정해 보자면 연진이는 지난 정권을 싫어하는 마음과 비례하게 현 정권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SNS상에서 현 정권에 비판적인 멘션을 몇 번 올린 내가 못 마땅한 것 같고, 현 정권을 사랑하지만 전 정권을 싫어하는 자신처럼 내가 현 정권을 비판하니까 전 정권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대깨’로 규정했고 ‘대깨는 곧 반일’ 알고리즘이 작동해 ‘대깨반일’ 프레임을 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 대깨반일주의자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과몰입해서 SNS에 하루에도 몇 번씩 관련 포스팅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내로남불처럼 느껴졌을까? 내 말이 맞지, 연진아? 그렇지 않고서야 노재팬의 ‘ㄴ’ 자도 언급해 본 적 없는 내가 너의 ‘대깨반일’이 될 수 있겠어. 


아무래도 연진이는 세상을 색약처럼 보는 아이 같다. 세상만사가 알록달록하다는 걸 잘 모르는 것 같다. 인간만사가 친일과 반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로만 돌아간다면 오히려 연진이가 나에게 이런 DM을 보낼 일도 없었을 것이고, 내가 이런 칼럼을 쓸 일도 없을 것이다. 연진이는 아마 유니클로나 아사히 같은 일본 브랜드를 결코 소비하지 않겠다는 노재팬 운동 같은 것을 공공연하게 외치는 이들을 싫어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현 정부에 불만이 많은 전 정부 지지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연진이가 보는 세상은 지지정당 혹은 지지하는 정치인 성향에 따라 친일과 반일이 정해진다고 믿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납작한 사람들의 세계인가 보다. 그건 아마 연진이가 그런 삶을 살고 있으니까 남들도 그렇게 사는 것이라 믿는 것이겠지. 그런데 연진아, 사람들이 다 너처럼 ‘모 아니면 도’처럼 세상만사를 판단하며 살아가는 건 아니야.

민주당 지지자라고 해서 노재팬 운동에 열성인 것도 아니고, 노재팬 운동에 열성이라고 해서 윤석열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인자하고,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지혜롭다고 해서 산을 좋아하면 지혜롭지 않은 것도, 바다를 좋아하면 인자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윤석열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일본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 인식을 비판한다고 해서 일본의 모든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연진이의 세상에서는 일본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현 정부를 지지해야 할 것이고, 대깨도, 반일도 아니어야 할 것 같지만 세상만사가 그렇게 간단한 논리로 작동할 리 없는 법이다. 윤석열 정부를 싫어하면서 일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문재인 정부를 싫어하면서 노재팬 운동에 적극적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결코 단순할 수 없는 개개인이 모여 이루는 세계의 복잡함은 사실 연진이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연진아, 너의 단순한 세계도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니? ‘대깨반일정신병자들’이라니, 제정신이 박힌 머리로는 이런 조합의 단어들을 떠올릴 수 없을 거 같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진이는 분명 화가 많이 나 있는 거 같고, 그 이유가 ‘반일’하는 ‘대깨’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환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 거 같다. 물론 여전히 내가 왜 연진이를 화나게 만든 ‘대깨반일’로 지목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정말 멋진 작품이라는 건 확실히 안다. 그리고 이상적인 세상이란 어쩌면 북산고 농구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친하지도 않고, 그런 멤버들 덕분에 주장은 화가 많이 날 때도 있지만 같은 목표로 뛰는 코트 안에서는 원 팀이 된다. 정직하고 공정하게 농구를 할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가 다 각자 다른 것을 인정하며 살아가면서 농구를 할 때는 농구에 옳은 방식대로 농구를 하고, 그렇게 옳고 그름을 인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것과 틀린 것은 결코 같지 않은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대깨반일정신병자’ 같은 언어를 쓰는 이와는 한 코트에서 뛸 수 없다. 혐오는 자유도, 규칙도 아니다. 그건 틀린 것이다. 반칙이다. 그건 정정당당한 농구가 아니라 경기장에서 노상방뇨 같은 짓거리를 하는 것이므로 퇴장당해야 마땅하다. 애초에 실격 대상이다.


혹시라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는 것이 친일이고, 매국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역시 연진이와 다를 바 없는 비좁은 세계일 것이다. 물론 어차피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열광하고 그 세계가 품은 가능성에 일찍이 감화된 이들에게는 좀처럼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연진이의 마음속 ‘대깨반일정신병자’ 혐오 같은 데 영향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연진이는 참 외로운 사람 같다. 이름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익명 계정의 인스타그램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그런 메시지나 보내는 건 일상에서 뱉을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믿고 있는 그 부끄러운 속내를 꺼낼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 테니까. 그런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며 주변의 멀쩡한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동조하는 척 살아가다가 끝내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못난 구석을 내밀고 그것이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대단한 무기일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런데 연진아, 다 틀렸어. 하나도 안 맞아. 네 마음, 네 생각, 네 태도. 골방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비좁게 인식하고, 세상만사를 멋대로 왜곡하고, 규정하고 뒤틀린 정치적 심사에 골몰하다 끝내 멀쩡한 사람들의 세계에 울림을 안기는 예술의 존재마저 호도하면서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길이 없겠지. 이런 식으로는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연진아, 어차피 너는 모르잖아. 알록달록한 세상. 그러니까 이제 핸드폰은 그만 보고.


('alookso'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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