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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20. 2023

아이를 업고 한라산에 등반하는 게 그렇게 나쁩니까?

이시영의 한라산 등반을 지적하는 기이한 손가락에 관하여.

유명 연예인이 SNS에 업로드한 사생활이 기사거리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건 익숙하다가도 종종 낯설다. 심지어 요즘은 잘 모르는 BJ에 관한 기사도 남발된다. 그야말로 ‘안물안궁’의 시대다. 거기에 ‘누리꾼이 어쩌고’ 혹은 ‘네티즌이 뭐라고’ 식의 레퍼토리가 곁들여진 기사까지 보면 문득 ‘기레기’라는 새를 떠올리게 된다. 아니, 그건 새 이름이 아니었던가. 다 떠나서 이제 일상에서 도태된 것처럼 느껴지는 누리꾼이나 네티즌이라는 단어와 여전히 친밀해 보이는 기사들을 보면 늙어버린 기분도 든다. 그러니까 참 쉽다. 언제부턴가 연예인 SNS와 누리꾼 반응만 있으면 기사 하나가 뚝딱 완성되는 시대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온라인 기사를 통해 배우 이시영이 새해에 아이를 업고 한라산 등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시영이 한라산에 오른 비결이 궁금해서 기사를 클릭한 건 아니다. ‘아동학대’라는 단어가 동원된 헤드라인에 낚인 덕분이었다. 잠시 상상해 봤다. 설마 이시영이 어린아이 등에 업혀서 한라산을 등반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아이를 등에 업고 눈으로 뒤덮인 한라산을 등반한 이시영에게 ‘아동학대’나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를 동원해 비판하는 누리꾼이 있었다는 것이 기사의 주요 쟁점이었다. 


한라산 등반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눈까지 쌓인 한라산이라니 오를 때에도 내려올 때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라산은 입산이 금지된 산도 아니고, 입산에 나이 제한이 있는 산도 아니지 않나? 대한민국 국적자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오르고 내릴 자유가 있는 영토 아닌가? 그러니까 무사히 잘 오르고 내려왔으면 될 일일 것이다. 반대로 만에 하나 운이 없게도 사고가 발생했다 해도 그것은 누군가가 부릴 수 있는 자유 안에서 벌어진 불행한 개인적인 사건일 뿐이다.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비윤리적인 행위나 금지된 일을 행한 것이 아닌 이상, 지극히 사적으로 보장된 자유를 누릴 권리는 만인에게 있고,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영을 향한 언어를 다시 한번 곱씹어봤다. 물론 눈이 쌓인 한라산 등반은 주의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고, 어린아이까지 등에 업고 산을 오르고 내리는 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걸까? 정말 그게 ‘안전불감증’과 ‘아동학대’라는 단어로 위시한 비판의 대상이 될만한 사안이었을까? 여기서 가장 의아한 건 이시영을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과연 누구를 위한 비판인가라는 점이다. 만에 하나 이시영의 행동이 아동학대와 안전불감증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 모든 상황의 피해자는 이시영의 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심각한 아동학대와 안전불감증으로부터 그 아이를 빨리 구출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이시영이 가기 싫다는 아이를 강제로 둘러업고 한라산 등반에 나선 것이라는 정황 근거가 있다면 ‘아동학대’라는 비판은 가당할 것이다. 혹시라도 한라산 등반 과정이 위험했다는 목격담이라도 있었다면 ‘안전불감증’이라는 비판은 필요했을 것이다. 확인할 수 있는 건 그저 아이와 함께 한라산에 올라 새해를 맞이했다는 SNS 피드상의 기록밖에 없다. 그러니까 별문제 없이 아이와 함께 한라산을 오르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비판이 아니라 무작위적인 비난이나 힐난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시영 모자의 한라산 등반을 두고 아동학대니, 안전불감증이니, 이런 단어를 동원한 비판은 쓸모없는 연예 기사처럼 낭비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이건 걱정이 아니라 혐오처럼 보인다. '혐오라니, 거 말씀이 지나친 거 아니오?'라고 반문하고 싶은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혐오의 사전적 정의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다. 그러니까 아동학대와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씩이나 동원한, '비판'이라는 단어로 미화된 저 의견에 어떠한 근거가 있느냐는 말이다. 결국 근거 없는 비판은 그저 하고 싶어서 뱉은 말에 불과한 것이고, 하고 싶어서 뱉은 말에 그 대상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이성적 근거가 없다면 그 말이라는 건 충동적인 감정 덩어리에 불과하다. 뭘 알고 뱉은 것이 아니라 그저 뱉고 싶어서 뱉은 것이고, 그게 바로 혐오인 것이다. 근거는 없지만 지적은 하고 싶어서 뱉은, 유사 언어로 둔갑한 썩은 감정의 발화에 불과하다.


물론 내가 연예인 걱정으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사를 봤는데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걱정까지 할 생각은 없다. 다만 ‘비판’이라고 포장된 그 비뚤어진 심리로 뒤틀린 여론을 조금이나마 반듯하게 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시영을 향해 던져진 ‘아동학대’나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를 동원한 힐난이 비단 이시영만을 향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엄마와 아이 사이에서 가능했을, 실제로 이뤄졌을 교감을 무시하는 발상이자 행위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러한 무작위적인 혐오와 무시의 대상은 비단 이시영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시영의 어린 아들은 두 발로 잘 걸어 다니는 것으로 보이니 어느 정도 자기 의사표현도 할 줄 알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정도 수준으로 발달한 나이의 아이들은 그 정도 수준의 자의식 정도는 표현할 줄 안다. 애가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하면 그건 그저 당신의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이시영이 어린 아들과 함께 한라산을 오르는 과정이 폭력적인 강요에서 비롯됐다면 그건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이시영이 어린 아들과 함께한 한라산 등반 전후 사정은 말 그대로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그와 가까운 주변인이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개인사다. 고로 그 과정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영을 향한 비판은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던지고 싶어서 던지는 비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문제이지만 어린아이가 어떤 의사 표현을 했는지 알 필요가 없다는, 부모와 자식의 교감 과정 자체를 무시하는 행위에 가까워서 역시 문제다. 어린아이가 자기 의사를 표현해서 엄마와 함께하는 등반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정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납작한 인식이자 선입견을 드러내는 짓에 불과하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두 발로 딛고 걸어 다니는 것은 물론 성인만큼 충분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이 가능한 아이는 분명 부모와 적정 수준의 교감이 가능할 것이다. 비록 엄마의 등에 업혀서 오른 산이라 해도 엄마와 함께 오른 산이었을 것이다. 그건 이시영의 추억이자 삶이기도 하겠지만 아이의 추억이자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동학대’니, ‘안전불감증’이니, 이런 단어를 동원한 비난은 이시영의 아이가 어떤 추억을 갖게 됐는지, 그것이 그 아이의 삶을 이루는 어떤 하루였는지, 딱히 이해할 겨를도 없고, 애초에 그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폭력적인 무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건 걱정이라는 단어와 무관한 간섭이고, 염려라는 언어와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오지랖이다. 아이를 업고 눈이 쌓인 한라산에 등반하는 건 모든 엄마에게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엄마가 있고, 그렇게 아이와 함께 새해를 맞이할 추억을 만들었다는 것을 만인이 알 필요까진 없다고 해도 그렇다고 했을 때 그것을 두고 비난할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고 여기는 건,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어딘가 꼬여도 단단하게 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혐오는 특별한 게 아니다. 바로 이런 것이다.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만한 비윤리적 행위 혹은 범법적인 일탈을 벌인 것이 아닌 이상, 누구나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와 당연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삶의 행복을 찾아가면 될 일이다. 그렇게 엄마가 되고, 자식이 되고, 대화를 나누고, 추억을 쌓아가며 누군가는 살아간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모자의 추억과 삶을 들여다보며 기이한 삿대질을 해댄다. 정말 불행하고 한심하지 않은가? 당연히 이건 그들을 걱정하는 물음이 아니다. 그럴 리가.


('alookso'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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