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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30. 2023

그래서 우리는 함께 축구를 한다

우리는 각각의 삶을 사는 존재로서 하나의 세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지 몰라도 연말에 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새삼 반가웠다. 반짝이는 트리를 보며 올 한 해도 어찌어찌 무사히 버텼구나 실감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제법 많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다. 한 해의 끝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올해의 안녕을 빌고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이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는 세상 모든 이들의 마음이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프로축구 클럽 리버풀 FC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살라는 최근 일부 이슬람교도에게 비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집트 국적의 무슬림인 살라가 자신의 SNS에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찍은 사진을 게재한 것을 두고 무슬림들이 종교적 믿음을 배신했다는 비난의 댓글을 남긴 것이다. 이렇듯 크리스마스트리가 모두의 마음에 평화를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하나마나한 말이겠지만 그건 트리 탓이 아닐 것이다. 트리는 트리일 뿐, 문제는 늘 사람이다.


첫겨울 월드컵이자 대한민국의 16강 진출과 메시의 아르헨티나 우승으로 여러모로 인상적인 기억을 남긴 제22회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에 나선 이란 대표팀 선수들은 국가를 제창하지 않았다.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의문사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에 대한 소식이 알려지면서 촉발된 자국민들의 반정부 시위에 연대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덕분에 선수들의 용감한 행동을 응원하는 목소리도 상당했지만 선수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기우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경기 후 이란 선수들이 자국 정부 관계자로부터 심각한 협박을 받았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역설적이지만 공존은 이런 것이다. 여전히 정부에 반대하는 태도만 드러내도 목숨이 위태로운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도,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도, 4년에 한 번씩 한 나라에 모여 축구를 한다. 살아가는 환경과 누리는 문화와 신앙하는 종교와 피부색은 다르지만 축구는 동일하다. 네모난 그라운드 안에서 둥근 공 하나를 상대의 골 안으로 밀어 넣기 위해 기량을 펼치고 자웅을 가린다. 각기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축구를 통해 하나의 규칙을 공유한다. 그렇게 다양한 세계가 동일한 행위와 목적으로 잠시 뒤엉킨다. 서로의 차이는 상관없다. 그저 축구를 할 뿐이다. 덕분에 우리는 평소 접할 수 없던 세계와 조금이나마 가까워진다. 


카타르월드컵에서 한국이 조별예선에서 맞붙은 국가는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이었다. 남미와 아프리카, 유럽의 국가와 한 번씩 경기를 치렀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익숙하지 않은 나라의 얼굴을 축구로 대면한다. 물론 축구 경기 한 번 했다고 해서 그 나라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인식은 생긴다. 저 세계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누군가는 월드컵을 통해 한국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의 의미란 어쩌면 이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넓은 지구상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축제가 4년마다 찾아온다. 그렇게 서로의 차이를 부정하지 않고 한데 모여 하나의 놀이를 즐기다가 때가 되면 흩어진다. 


물론 세계인들이 함께 모여 공을 찬다고 해서 전 세계가 마냥 평화로운 건 아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는 전쟁터다. 심지어 러시아의 공습으로 전력 공급 시설이 파괴된 탓에 한겨울에 전력이 끊겨 난방을 할 수 없어서 추위로 신음하는 이들이 1000만 명은 족히 된다고 한다. 그 와중에 이상 기후 현상으로 미국과 일본에서는 혹한과 폭설이 덮쳐 적지 않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관련 사고가 속출했다고 한다. 이런 극단적인 날씨는 인류가 배출한 온실가스로 인해 일어난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의 양상과 막을 길이 요원해 보이는 기후 위기 상황의 공통점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은 어쩌면 인간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을 인간으로서 살게 만드는 것 역시 결국 인간 자신일 것이다.


겨울이 돼야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듯 겨울에만 들을 수 있는 소리도 있다. 이번 겨울에도 구세군자선냄비 모금을 독려하는 종소리가 찾아왔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냐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낯익은 풍경이었지만 막상 주머니에 가진 돈이 없어서 무색했다. 요즘에는 현금을 갖고 다닐 일이 없어서 마음이 동한다 해도 마음을 나눌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우였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다. 구세군 냄비는 거들뿐,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심지어 디지털 지갑의 페이 결제도 가능했다. 기술의 편리가 선행의 편리로 이어지는 시대다. 


한 해의 끝자락에 다다라 본격적인 겨울과 함께 구세군자선냄비가 찾아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12월에는 기부할 결심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1월부터 11월 사이 월평균 금액과 비교했을 때 3~4배 가까이 증가한다고 한다. 연말정산을 대비해 세제혜택을 받기 위해 기부금을 내는 사람이 많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춥다는 감각이 되레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덕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생각해 본다. 어떤 식으로든 남을 돕겠다는 마음이 모이는 풍경이란 그 자체로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혐오와 비관을 자아내고, 냉소와 염세를 부추기는 자극적인 온라인 기사가 다루지 않는 사소한 희망과 행복은 구세군자선냄비의 종소리처럼 실상 우리 주변의 도처에 널려 있다. 


어쩌면 희망이란 간절한 기다림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반복을 통해 거듭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빨래와 청소 같은 것이랄까. 때가 되면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를 돌려야 하고, 바닥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야 한다. 때를 놓치거나 미루면 그다음부터는 번거롭기 십상이다. 그렇게 제 때 하지 못한 것들은 처리하거나 해결해야 하는 업보로 쌓인다. 결국 각자 자기가 해내야 할 것들을 꾸준히 해내면서 세상의 시계와 함께 돌아간다. 그렇게 자신의 일을 해내고, 자신의 것을 책임지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이 채워진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이 쌓여 공존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렇게 각기 다른 얼굴과 생각과 생활을 통해 세상은 다양해지고 그럼으로써 완전해진다. 그렇게 각자를 보존하고 우리로서 공존한다. 그럴 것이다.


(한국서부발전에서 발행하는 사보 <서부공감> 2023년 1~2월호에 기고한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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