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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Jan 18. 2023

<유령> 단평

원작소설은 읽지 못해서 영화만 놓고 보자면,


영화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후반 구조로 설계된 서사를 전복적으로 나열한다. 전반부는 온전히 후반부의 장르적 변형을 위해 마련된 위장술처럼 보일 정도로 기능적이다. 그런데 그 전반부의 기능성이 제 역할을 해내기보단 시간을 때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난하다. 설사 그것이 전복되는 후반부 흐름을 고려한 의도 안에서 고의적인 전략이라 해도 느슨하게 설치된 알리바이들이 도처에서 난무하고, 내러티브 자체가 맥없이 거듭 불발된다는 건 여러모로 각본에서 간과한 문제가 연출 과정에서 보다 명확해진 결과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결손이 거듭 드러날수록 스타일의 과잉만 점점 도드라진다. 미장센에 잔뜩 힘을 준 공간의 역할도 무색하고, 악역은 무능하며, 감정은 산만한 가운데 몇몇 캐릭터는 의아할 정도로 무성의하게 휘발된다. 일말의 감정적 인과를 연결한다는 의미를 존중하기에는 전반부 자체가 여러모로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포석이다.


후반부는 여성 캐릭터를 위시한 액션 활극처럼 나아가는데 이해영 감독의 전작 <독전>에서 보여준 액션 연출의 장기가 흥미롭게 발휘된다고 느껴지는 신이 더러 있다. 뭔가 있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끝내 제 역할이 없어 보여 의아했던 공간 활용 방식에 물음표를 남기는 전반부에 비해 무대 장치를 활용한 공간의 특성을 반영한 후반부는 액션 연출 설계의 창의성과 해당 신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데 공간의 특성이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공간 구조와 동선에 어울리게 밀착한 역동적인 촬영술도 때때로 근사하다.


그런데 엔딩 시퀀스로 다다를수록 점점 의아해지는 건 이 작품이 일제강점기 경성을 무대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딱히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대성과 대립성이 이 영화에서 기이하게 소모되고 있다는 의심이 짙어지는 가운데 여성 캐릭터를 위시한 클라이맥스와 카타르시스의 쾌감도 함께 겉도는 것 같다. 영화가 활용한 모든 요소가 피상적이고, 인위적이라는 인식을 지우기 어렵다. 정말 많은 것들을 동원하고 있는데 하나 같이 잘 어울려 융화되기 보단 각자 따로 구획돼서 진열되다가 타이밍에 맞춰 서로를 밀어내기 급급한 인상이랄까. 덕분에 과녁을 잔뜩 늘어놓고 난사하는데 제대로 맞은 과녁판이 없다는 것을 목격하는 듯한 기이함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만 같다. 박찬욱, 쿠엔틴 타란티노, 최동훈, 김지운 등 몇몇 감독이 앞서 만들어낸 인상적인 영화의 어떤 장면, 어떤 감정, 어떤 캐릭터들이 떠오르는데 이 모든 기시감을 넘어서는 이 영화만의 인장이 또렷하지 않다. 영화가 자기 삶을 살기 보단 자꾸 스크린 밖의 누군가를 의식하며 경직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여러모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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