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신을 믿는 자도, 신을 믿지 않는 자도, 신의 존재 여부를 알 길이 없다. 각자 주장할 수는 있어도 끝내 증명할 수는 없다. 인간이란 실상 그런 존재다. 신성성이 인간의 곁에 깃드는 순간에도 인간은 그 기척조차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신이 그곳에 있을 때, 우리는 그곳에 없을 것이다. 신이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존재한다면,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저마다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간절해야 신의 응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초에 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적적이라 믿는 어떤 현상도 정작 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일인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선택할 뿐이다.
이렇듯 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신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자기 믿음 안에서 신을 형상화하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그 형상화한 신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인간의 세계에서 신이란 그 존재의 진위를 향한 질문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는 허구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인간의 믿음에 기원한 신과 진짜 신은 다른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바라는 구원이란 실상 우리가 알 길이 없는 신의 뜻을 빌어 말하기보단 인간의 의지로 표명될 때 보다 명백해지는 것 같다. 기도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이 그 기도에 응답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겠지만 가끔씩 누군가는 타인의 기도에 응답하며 스스로 신의 공백을 메우기도 한다.
<더 웨일>은 제목처럼 ‘고래’만큼 비대한 남성 찰리(브랜든 프레이저)에 관한 영화다. 찰리는 몸무게가 600파운드, 그러니까 272kg에 육박하는 초고도비만자다. 보행보조기가 없으면 혼자 일어날 수도, 한 걸음조차 옮길 수도 없을 만큼 비대한 몸은 단지 거동의 불편함에 불과한 문제가 아니다. 급격한 심기능 저하 증상을 유발하는 울혈성 심부전 증세에 그는 서서히 질식당하고 있다. 찰리를 돌보는 유일한 친구이자 간호사인 리즈(홍 차우)는 병원에 가길 권하지만 그는 거부한다. 꺼져가는 등불에 쓸데없이 붓는 기름처럼, 돈만 축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다. 죽고 나면 일찍이 자신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딸 엘리(세이디 싱크)에게 그동안 모아 온 돈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느끼는 탓인지 여덟 살 이후로 보지 못했던 딸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종말론을 바탕으로 세를 넓히는 것으로 보이는 새생명선교회를 전도하는 소년 토마스(타이 심킨스)가 찰리 앞에 나타난다.
구원을 주제로 다루는 서사란 대체로 타인의 구멍을 메워주는 숭고함에 주목하기 마련이지만 <더 웨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타인의 구멍을 메워주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 믿고 살아가거나 자신도 모르게 그 믿음에 매몰된 자들이다. 찰리는 뒤늦게 만난 동성애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가족도 버렸지만 애인의 죽음에서 비롯된 충격으로 섭식장애를 겪고 심각한 초고도비만자가 돼서 집안에서만 은둔하듯 살아가던 중 죽음을 예감하며 그전에 어린 딸과 재회해 무언가를 해주고자 한다. 친오빠의 애인이었던 찰리를 돌보는 리즈는 찰리의 죽음을 막는 것이 오빠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 생각하며 헌신한다. 전도활동에 열심인 토마스는 찰리가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만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 같다. 그러니까 <더 웨일>은 이타적인 헌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도태된 신앙에 매몰된 것처럼 타인을 구원하는 것이라 믿는 행위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삶의 목적을 찾을 길이 없어진 듯한 존재들이 어쩌다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광경을 목도하는 영화에 가깝다.
영화는 극 중 인물 가운데 일말의 연고도 없는 토마스가 처음 아이다호를 찾아오는 장면을 원경으로 포착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오클리 대학 원격 강의 프로그램으로 비대면 온라인 강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이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긴다. 동일한 크기로 질서 정연하게 구획되고 이어지는 사각 틀은 저마다 다른 학생들의 얼굴을 중계한다. 그 사이 한가운데 뻥 뚫린 구멍처럼 홀로 시커먼 어둠으로 채워진 사각형 하나가 눈에 띈다. 유일하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이는 바로 그 에세이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다. 그는 노트북 카메라가 고장 나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그 어둠 너머로 들어서듯 카메라는 서서히 전진하고 끝내 스크린 가득 칠흑 같은 어둠이 채워진 뒤 영화의 제목 <더 웨일>이 떠오른다. <더 웨일>의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의 전부나 다름없다. 누군가가 찾아오고, 누군가의 어둠 속을 들여다보는 이야기.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 동안 한 공간을 벗어나는 신이 거의 없는 연극적인 설정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퇴장하는 인물들이 드러내는 건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뻥 뚫린 구멍이다. 칠흑 같은 심연이다.
까만 어둠 너머의 강사는 영화의 주인공인 찰리다. 그의 카메라는 멀쩡하다. 솔직하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삶을 연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찰리의 첫 등장도 예사롭지 않다. 게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찰리는 단말마 같은 신음을 내뱉는다. 바라는 쾌감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다. 심장에 무리가 간 탓이다. 원했던 건 당장의 쾌락이지만 그마저 얻기가 어렵다. 심장에서 전해지는 위태로운 통증을 잠재우기 위해 그가 하는 행위는 약을 먹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전화하는 것도 아니고, 종이에 적힌 문장을 읽는 것이다. 누가 쓴 것인지 몰라도 내용으로 봐서는 <모비 딕>에 관한 감상을 늘어놓은 에세이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 앞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마치 신처럼, 토마스가 찾아온다. 미처 덮지 못한 노트북 모니터 덕분에 남사스러운 사생활을 일면식도 없는 청년에게 들키고 말지만 대신 에세이를 읽어줄 입이 생겼고, 그 덕분에 가까스로 통증은 진정된다.
“당장 죽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들으려고요.” 찰리의 말처럼, <모비 딕>에 관한 에세이는 찰리를 살리는 동아줄이 아니다. 그는 당장 죽기 직전이라면 그 에세이를 한 번이라도 더 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다만 후회를 남겨둔 채 죽게 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에게는 일찍이 가족이 있었고, 어린 딸이 있었다. 일찍이 선택한 건 사랑이었지만 이제는 가족을 버린 후회만 남아있다. 전자를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후자에 대한 죄책감은 떨쳐지지 않는다. 특히 어린 딸에 대한 미안함은 쇠약해지는 심장과 반비례하게 강해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딸 엘리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여덟 살 무렵과 달라진 모습만큼이나 녹록지 않다. 자신을 떠난 아빠를 향한 그리움을 모조리 미움으로 환산해 버린 것처럼 말 한마디마다, 시선 하나마다 뾰족하고 냉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는 엘리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주고 싶다. 딸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증명하고 싶은 게 있다. “알아야겠어!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걸!”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오프닝 시퀀스와 달리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진 엔딩 시퀀스의 스크린은 그 자체로 영험한 체험이 되길 바라는 것만 같다. 자신이 버린 딸의 인생에 일말의 보상을 남긴 존재로서 기억되길 원하는 찰리의 마음은 자신을 옥죄는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한 마지막 시도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끝내 모든 삶을 망가뜨린 것은 아니라는 최후의 절박함이기도 하다. 가족을 등지고 선택한 애인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고, 그 선택이 끝내 딸의 인생까지 망친 것은 아니어야 자신이 선택한 사랑도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찰리는 엄마(사만다 모튼)조차도 ‘사악하다(evil)’고 말하는 딸이 오히려 타인을 구원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보다 나아질 가능성을 역설한다. 마치 심해처럼 깊은 어둠 속에 침전하듯 살아가는 찰리가 기대하는 마지막 빛은 엘리밖에 없다. 그래서 엘리는 늘 빛을 등지고 찰리 앞에 서있거나 앉아있다. 찰리의 마지막 사명은 결국 그 빛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이 빛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찰리에게는 그것이 사랑도, 가족도, 그럼으로써 제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통의 인간이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무엘 D. 헌터의 말처럼, <더 웨일>에 등장하는 이들은 타인을 감복시키고자 조형된 캐릭터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특별한 교훈이 없다. 그저 누군가의 삶이 있는 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솔직한 관점이 더러 확인될 뿐이다. 저마다 바라는 구원에는 특별한 경지가 없다. 그저 지극히 사적인 충족과 안도를 위해 그들은 그저 바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 웨일>은 관객과 영화의 거리감을 측정하게 만드는 일종의 바로미터 같기도 하다.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말 역시 이런 의도를 충실히 대변한다. “오늘날 문화가 직면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에서 비극의 형태가 상당 부분 제거되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같은 것만 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전히 달성할 수도 없고, 현실에 뿌리내릴 수도 없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이 너무 쉬운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런 감정을 느끼기 위해 어두운 곳으로 갈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감정을 느꼈을 때 보다 인간적일 수 있고, 나 자신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보다 솔직하고 진실해질 수 있을 것이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더 웨일>에서 보고 싶었던 건 빛으로 다다르기 이전까지의 어둠이었던 것 같다.
빛과 어둠은 실상 한 몸이다. 빛이 있으니 그림자도 있다. <더 웨일>은 인간의 마음에 드리운 그림자가 희망을 통해 형성되는 것일수도 있음을 가리키는 영화다. 리즈가 ’누가 누굴 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때, 찰리는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가 없다고, 사람은 놀라운 존재’라고 말한다. 서로 상반된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은 사실 서로에게 둘도 없이 의지하는 존재다. 두 사람의 내면이 나름의 방식으로 간혹 일그러지고 피폐해지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데에서 매번 다시 만나고 끌어안는다. 결국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외형과 다변한 감정을 모두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 이상일 수 없을 것이다.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혐오를 서슴지 않는 엘리의 태도가 되레 누군가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고, 신성성에 기대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토마스는 끝내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한다.
어쩌면 찰리의 말대로 인간은 정말 놀라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부정과 편견과 혐오와 악의를 품은 그 마음으로 사랑과 존중과 관용과 선의도 함께 품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 인간에게 필요한 건 신성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신성하고 존엄하게 여길 수 있는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누군가를 손쉽게 단정 짓고, 혐오하는 세태를 비판하거나 교정하려는 시도가 꼭 영화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역시 이 세상의 솔직한 단면이라면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체험 역시 영화의 한 뼘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 <더 웨일>은 그것을 설득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럼으로써 서로 반목하고, 충돌하고, 갈등한다 해도 끝내 서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영화일 것이다.
<더 웨일>은 작품의 제작 과정과 함께 보면 더욱 드라마틱한 영화다. 2012년에 덴버에서 초연된 뒤 시카고, 뉴욕 등지에서 상연을 이어간 연극 <더 웨일>을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처음 인지한 건 <뉴욕 타임스> 리뷰를 통해서였다. 기이하고 독특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궁금해서 극장을 찾았고, 관람 후에는 마음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다음날 원작 희곡을 쓴 사무엘 D. 헌터에게 연락을 했고, 그렇게 만나 영화화 제안을 했고, 그에게 각본 작업을 부탁했다. 사무엘 D. 헌터는 ‘에베레스트 산에 등반한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일찍이 영어 교사로 일하며 찰리처럼 학생들에게 글쓰기 수업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실제로 믿는 진실한 글을 쓰길 요구했다. 그리고 한 학생이 쓴 문장에 감화됐다. ‘흥미진진한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 거란 걸 받아들여야 한다(I think I need to accept that my life isn’t going to be very exciting).’ 이 문장은 연극에도 영화에도 똑같이 등장하는데 영화에서는 후반부에서 찰리가 마지막 비대면 강의를 할 때 애덤이라는 학생이 쓴 글이라며 읽는 문장으로 등장한다. 누군가 꺼내 놓은 솔직한 마음이 담긴 한 문장에서 시작된 영화가 바로 <더 웨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단박에 이뤄진 건 아니다.
연극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사무엘 D. 헌터는 몇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그것은 자신이 학생들에게 주문했던 진실함이었다.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과거의 일에서 단서를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찰리라는 캐릭터가 나타났다. 아이다호 출신이자, 일찍이 성정체성을 알았던 게이 소년이자, 근본주의적인 교리를 지향하는 기독교 학교 출신이자, 섭식 장애로 인한 비만을 경험했던 자신의 과거를 무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쓴 희곡을 투고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상상을 못 했고, 그것이 무대에 올려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뤘다고 생각했지만 시카고와 뉴욕으로 무대를 옮기며 상연이 이어지고, 극찬이 더해지며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연락까지 받았다. 그렇게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정상에 오를 날이 찾아온 것이다.
복병은 배우였다.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많은 배우들을 만났지만 그 안에 찰리는 없었다. 사실 본인이 감독을 맡지 않고 제작자로 나서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톰 포드가 제임스 코든을 주연으로 감독을 맡길 강력하게 피력했지만 대본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이뤄지지 못했고, 조지 클루니가 감독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272kg의 몸무게를 지닌 배우를 캐스팅할 수 없다면 연출을 맡기 어렵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렇게 기약 없이 흘러가던 영화화 계획은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예고편 속 배우를 통해 비로소 시작된다. 2006년에 개봉한 <저니 투 디 엔드 오브 더 나잇>은 브라질 상파울루 배경의 범죄영화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본편도 아닌 예고편 속 브랜든 프레이저를 보고 무엇에 꽂혔는지 몰라도 그렇게 만남을 청했고 끝내 확신했다고 한다. ‘신사적이고, 다정한 사람이며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배고픈 배우’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찰리를 찾았다.
브랜든 프레이저는 한때는 대단한 프랜차이즈 스타배우였지만 언젠가부터 과거형 시제가 어울리는, 소위 말하는 퇴물이었다. 물론 그가 연기 활동을 멈춘 건 아니었다. 예전만큼 대단한 인기를 자랑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닐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단지 인기의 여부가 아니었다. <미아라> 시리즈는 브랜든 프레이저를 세계적인 스타로 등극시켜 준 동시에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허리와 무릎, 성대 등, 과도한 액션 연기에 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고, 7년간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그 이전에 아내와 이혼하며 막대한 위자료를 감당하는 통에 재정상태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2003년에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주관하는 외신기자협회 회장직을 맡았던 필립 버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지만 협회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장난이었다고 사건을 무마해 버렸고, 이에 상처를 받은 브랜든 프레이저는 그 뒤로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보이콧했다. <더 웨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올해에도 그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듯 부침이 많았던 세월을 건너온 브랜든 프레이저에게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최고의 청부사였다. <더 레슬러>로 애초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잊힌 듯했던 왕년의 스타배우 미키 루크를 다시 링 위로 복귀시켜 경력을 재조명하게 만들었고, <블랙 스완>의 나탈리 포트만은 생애 첫 오스카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게 만든 것처럼 브랜든 프레이저 역시 생애 첫 오스카 후보 지명을 받았다. 시상자로는 단상에 오른 적 있지만 수상자로 오를 기회를 얻은 건 처음이었다. 브랜든 프레이저는 272kg의 고도비만자를 연기하기 위해 130kg에 달하는 보철 분장을 몸에 뒤집어쓰고 무게와 더위를 견뎌야 했고 홍 차우와 세이디 싱크를 비롯해 그와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들은 매 순간 그의 고생을 덜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연기에 집중했다고 한다. 브랜든 프레이저가 과연 오스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이미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인간이자 배우일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따라갈 수 없지만 어떤 영화는 가끔 현실을 마주하고 새로운 숨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리고 <더 웨일>은 당신을 구원하는 영화가 아니겠지만 당신 스스로를 구원하게 만드는 영화일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