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다시 김기영을 보고, 논하는 이유에 관하여.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다. 21세기에 김기영의 영화를 본다는 건 여전히 새로운 발견이다. 한국영화사에 전례가 없었던 야심이자 전설로서 그는 여전히 영화로 존재하며 살아있다.
김기영은 한국영화사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가장 오래된 거장이다. 여기서 ‘첫 번째’가 아니라 ‘가장 오래된’이라고 정의한 건 그가 뒤늦은 재평가를 거쳐 재발견된 거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 100년을 맞이했다고 하나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사는 오늘의 대중에게 낯선 계절이다. 신상옥, 유현목, 김수용, 이만희 등 1960~1970년대 한국영화계를 이끌던 대가들의 역사나 1970년대부터 두각을 드러낸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배창호 같은 이름을 기억하거나 언급하는 이는 드물다. 1970년대부터 왕성하게 활동하다 1980년대부터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의 지위를 얻은 뒤 2010년대까지 꾸준히 영화를 찍어온 임권택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영화사 100년 역사의 너비를 대변한다는 이름이 희귀하다. 그런데 김기영 감독이 나타났다.
물론 김기영이 뒤늦게 발굴된 무명 감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일찍이 그는 한국영화계의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흥행감독이었다. 다만 21세기 이후에도 젊은 영화광에게 추앙받는 새로운 이름으로 대두되는 건 보기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1990년대였다. 1984년에 개봉한 <육식동물> 이후로 별다른 작품 활동 소식이 없던 김기영 감독은 1990년대에 이르러 젊은 영화팬들 사이에서 컬트의 대가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재발견의 본격적인 기점이 된 건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김기영 특별전’이었고 다음 해에는 베를린국제영화제 회고전이 계획되던 중이었다. 새로운 영화 제작에 대한 의지도 상당했다. 하지만 1998년 2월 화재 사고로 자택에서 숨을 거두는 예기치 못한 비극과 함께 그의 영화 역사도 멈췄다. 그러나 김기영이라는 재발견의 여정은 보다 극적인 경로로 나아간다.
김기영 감독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회고전은 예정과 달리 추모전이 돼버렸지만 유럽을 비롯한 서구의 영화 관계자와 시네필들에게 김기영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이 됐다. 2006년 프랑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18편을 한 달간 상영하는 회고전을 기획했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칸영화제에서 설립한 월드시네마재단(WCF) 위원장을 맡고 있는 세계적인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녀>의 복원 사업이 진행된 뒤, 2008년 칸영화제에서 복원된 <하녀>를 상영하며 평단과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 21세기 이후로 한국영화계를 이끄는 젊은 대가로 떠오른 감독들이 김기영으로부터 얻은 영향력을 언급하며 그는 점점 한국영화사가 일찍이 주목해야 했던 거장으로 부상한다. 그렇다면 왜 김기영일까?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김기영과 나란히 한국영화계를 이끌어온 감독들에게도 시대를 선도하는 성취가 있었다. 리얼리즘의 관점을 바탕에 두고 시대를 응시한 유현목 감독의 영화나 장르적인 카타르시스와 파토스를 선사하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는 분명 당대 한국영화계가 닿지 못했던 한 뼘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름이 서서히 잊히는 사이 김기영만 유독 21세기 영화광까지 사로잡는 거장으로 회고되는 저력은 무엇일까? 김기영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 <감독들 김기영을 말하다>에서 <무뢰한>을 연출한 오승욱 감독의 말에 모종의 힌트가 있다. “그 당시 모든 한국영화들이 표백 돼있는 상태였는데 김기영 감독의 영화만이 한국인들, 또는 한국 사회 안에 부패해 있고 썩어있는 냄새들을 김기영 영화만이 풍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기영의 영화는 괴이하고 신랄하다. 시각적으로, 정서적으로 괴이하게 감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당대의 기저 심리를 신랄하게 비춘다. 풍자적인 흥미가 전해지지만 직접적인 메시지로 읽히는 인상은 아니다. 사회적 심리를 관통하지만 그것을 진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독별하게 반영해 영화의 기이한 특질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인용된다. 세태의 밑바닥에서 들끓는 욕망을 진단하려는 야심 대신 그것을 흡수해 기괴한 인상으로 게워내듯 표현한다.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이자 경력의 중대한 전환점이 된 <하녀>(1960)는 그런 기질을 가장 확실하게 대변하는 작품이다.
김기영 감독은 신문을 읽을 때 늘 범죄를 다룬 사회면부터 보고, 거기서 영화의 소재를 얻기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녀> 역시 김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기사에서 소재를 얻은 영화다. 구체적으로는 한 가정부가 자신을 고용한 집안의 남자와 내연 관계가 된 뒤 그 집안의 다섯 살 난 아들을 연못에 빠뜨려 죽인 사건이 모티브가 됐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해당 사건을 신문으로 읽고 그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는 부부의 모습이 등장한다. 하지만 <하녀>는 단순히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영화라는 평가보다도 영화적 표현 방식 안에서 놀랍게 회자되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김기영 감독은 <하녀>를 대변하는 색깔이 ‘어둠’이라고 말했다. 타이틀 시퀀스에 등장하는 한자어 제목은 자신이 직접 검은 배경을 바탕에 두고 그렸으며 글자 끝에 피를 뚝뚝 떨구듯 섬뜩한 느낌이 오는 이미지가 되도록 연출한 것이라고 그 의도를 설명한 바 있다. 시작부터 참혹한 비극을 그릴 것이라 예고한 셈이다. 그 참혹한 비극을 야기하는 건 바로 문제의 하녀이지만 <하녀>가 단순히 한 집안을 집어삼킨 악녀에 관한 영화라고 정의하는 건 너무 단순한 처사일 것이다. <하녀>에는 명확한 악인이 없다. <하녀>에서 본질적인 악은 어느 개인이 아니라 시대상의 변화와 함께 일어나는 각기 다른 욕망 그 자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방직공장의 여공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남편과 재봉틀을 돌려 삯바느질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아내는 다리가 불편한 딸과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아들을 키운다. 그들은 2층 양옥집을 새롭게 지어 이사를 가는데 그 과정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 각자 열심히 일한다. 당장 고된 삶에 허덕이지만 부부는 가정에 충실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집안을 돌봐야 한다. 그래서 하녀를 들인다. 시골에서 상경한 하녀는 서울의 평온한 가정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틈입한다. 평소 품행이 방정했던 남편은 하녀의 노골적이고 끈질긴 유혹 앞에 무너지고 그 이후로 가정의 안위도 무너진다. 남편과 내연의 관계를 맺게 된 하녀는 이를 빌미로 그 집안을 장악한다. 삯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아내도, 남편도 집안의 치부를 드러낼 수 없기에 하녀의 폭주를 막지 못한다.
계급적 통제가 용이했던 구시대에서 벗어나 신분의 이동이 가능한 자본주의 체제의 가능성 안에서 자라나는 욕망은 <하녀>를 위한 서스펜스의 탄환과도 같다. 영화는 전통적 가치가 풍비박산 나는 풍경을 과녁이라도 삼듯 그러한 욕망을 마음껏 격발한다. 불륜과 낙태라는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 치부였던 시대였기에 그 치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막고 가정을 지키려 했던 부부의 선택은 되레 가정의 몰락을 자초하고, 풍족한 삶에 대한 욕망은 팽배했지만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시대상의 아이러니가 2층 양옥집을 오르내리며 예측할 수 없게 괴이하고 신랄한 파국의 흐름이 형성된다. 집안에 있는 모든 이가 그 파국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통제할 수 없는 욕망으로 자라나 모두를 삼켜버린다.
김기영 감독은 <하녀> 이후로 몇 차례 거듭 스스로 이를 리메이크했다. 김기영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어낸 <화녀>(1971)와 <충녀>(1972) 그리고 경력의 쇠락 기미가 여실했던 <화녀82>(1982)와 <육식동물>(1984)은 각기 다른 시대상 안에 자리하는 <하녀>의 처지와 입지를 대변하는 것만 같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유효한 욕망과 유효하지 않은 욕망의 상반된 처지와 입지가 그 흐름으로 대변되는 인상이랄까. 반면 김기영 감독은 <하녀>와 함께 여성 캐릭터를 욕망의 주동자로 내세워 시대적 변화와 의식적 한계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개인의 욕망을 도발적으로 몰아세운다.
<하녀>와 그 리메이크 판본들 외에도 <육체의 약속>(1975), <이어도>(1977),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수녀>(1979), <느미>(1979), <반금련>(1981), <자유처녀>(1982) 등, 김기영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억척스럽게 삶을 꾸리는 주도자들이다. 그 곁에 자리한 남자들은 무기력하거나 기이하게 헤매거나 자기 욕망을 잘 모르거나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처럼 자리한다. 어쩌면 그건 유신시대의 검열과 국책영화를 제작해야 하는 압박 속에서 창작자로서 그런 시대를 거스르는 자신만의 인장을 남기겠다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야심이 일관되게 반영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창작을 억압하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자신만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분투가 자기 복제와 반복으로 투사된 것만 같다.
전문적으로 영화를 배운 바 없는 의사 출신 감독이기도 한 김기영은 수많은 영화를 섭렵한 영화광이었고, 끝내 자신만의 문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로 젊은 영화팬들에게 컬트의 대가로 재평가되는 상황 속에서 ‘1960년대와 70년대의 흥행감독이자 문제감독’이라고 자평한 김기영 감독은 의외의 반응이지만 좋은 평가를 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것을 만들고자 하는 감독으로서 야심이 팽배했다. “나에게는 영화의 원칙도 없고 변조도 없다. 내가 만들어야 할 영화는 철저하게 김기영적 영화면 된다.” 그렇게 영화는 증명한다. 거기 김기영이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일찍이 독보적이었던 야심은 결국 전설이 됐다. 김기영, 그는 전설이다.
(CJ ENM과 <B>미디어 컴퍼니의 합작 매거진 <Untold Originals>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