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과 '플랜75'로 보는, 초고령사회에서 맞이할 죽음에 관한 고찰.
얼마 전 일이다. 아내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 처가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가 장례식장을 찾았다. 처남이 미리 대여해 놓은 상복으로 갈아입고 조문을 했다. 40대가 넘었지만 여전히 낯선 것들이 많다. 부고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는 일은 이제 익숙하지만 죽음이란 여전히 생소한 세계다. 죽음 앞에서 마주한 이들과 무어라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가끔씩 초현실적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죽음 너머로 부재한 이들과 여전히 남아 존재하는 이들 사이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는 너무 선명한 경계 같아서 거짓말 같다. 그럼에도 죽음은 명백한 현실이다. 더 이상 실존할 수 없는 끝으로 완벽하게 수렴해 버린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나면 애초에 그것을 부정할 마음이 없었음에도 실제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입관’이란 고인을 관에 넣는다는 의미의 단어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장례식에서 입관식에 참여하려면 해당 고인의 가족이나 친인척 관계에 포함되는, 대체로 가까운 사이여야 한다. 덕분에 나도 손녀사위 자격으로 입관식에 참여했다. 혈연관계가 아닌 입장에서 그 자리에 참석할 자격은 얼마나 될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지만 돌아가신 고인의 모습을 접하고 잡념 따윈 완전히 잃어버렸다. 육안의 감각으로 목도하는 죽음은 실로 압도적인 실감이었다. 눈이 감긴 채 코와 입의 구멍을 탈지면으로 가득 메운 얼굴 아래 단단하게 꽉 여민 수의의 자태가 더 이상 생동할 수 없는 육신의 허망을 육체적으로 전이했다. 죽음이 저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 안으로 쑥 찌르고 들어오는 기분. 문득 죽음 앞에서 삶이 손쉽게 가소로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퍼뜩 삶이 되레 절박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긋이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에게는 다소 치기 어린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음은 어차피 그것으로 완전한 결말일 것이므로, 어찌 됐건 끝난 것이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가 들수록 두려워지는 건 그쪽이다. 아직 여생이 한참인 40대에 다다랐을 뿐임에도 20대나 30대 시절과 다르게 손쉽게 방전되는 체력과 방심하면 쉽게 낡아버릴 것 같은 육신의 한계를 예감할 때마다 그 이후의 삶을 좀처럼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 가끔은 두렵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삶을 조명하거나 이를 둘러싼 세상을 조망하는 영화들에 관심이 간다.
죽음을 택할 수 없는 노인의 사회
은심(나문희)은 종종 죽은 사람을 본다. 귀신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오래전 죽은 엄마의 모습을 본다. 그때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치매에 걸린 탓이다. 약에 의존하며 기억의 퇴행과 육신의 쇠락을 막아보지만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와중에 자식농사도 실패한 것 같다. 프랜차이즈 가맹점 사업을 하던 아들은 가맹점에 저가 기름을 값비싸게 납품했다가 발각돼 언론의 도마까지 오른 탓에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받은 대출빚을 떠안게 생겼다며 다 큰 처지에 엄마에게 손을 벌린다. 일찍이 대준 사업자금을 갚기는커녕 하나 남은 집까지 달라고 애걸복걸한다. 그 와중에 의외의 손님이 은심을 찾아온다. 유년시절 고향 친구이자 사돈지간이 된 금순(김영옥)이 십수 년 만에 방문한 것. 이에 은심은 금순이와 함께 60년간 내려가보지 못한 고향 남해를 찾기로 결심한다.
노년기에 접어든 두 친구의 동행을 그린 영화 <소풍>은 지극히 전형적인 작품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좀처럼 철이 들 줄 모르는 아들에게 시달리는 노년기의 여성이 동년배의 단짝 고향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귀향한 뒤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하고 뜻밖의 갈등을 겪으며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지금의 생을 살핀다는 내용에는 특별한 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놀랍게 형형한 진짜 얼굴들이 있다. 나문희, 김영옥, 박근형 등, 노년 캐릭터를 연기하는 명배우들의 연기가 이토록 뻔한 허구에 생생한 삶의 희비를 불어넣는다. 주름진 얼굴과 느릿한 걸음에서 긴 세월 동안 이기고 버틴 중력의 무게가 여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주할 때만큼은 짓궂게 웃고 장난기가 배인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시간의 법칙을 거스르듯, 함께할 때만큼은 그 세월이 무색하다.
하지만 함께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던 친구 사이에 나란히 찾아온 세월은 만만한 적이 아니다. 부모의 둥지에서 떠나간 자식들은 제 한 몸 건사하느라 여지가 없고, 그렇게 홀로 자기 한 몸 누일 곳이나마 유지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작은 시골 마을에 리조트를 짓겠다며 자본을 밀고 들어온 외부 세력에 의해 마을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가장 심상치 않은 건 건강이다. 함께 늙어가는 사이를 넘어 이제 함께 죽어가는 사이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닌 노년기의 두 친구는 죽음보다 빨리 찾아오는 노환으로 인해 거동이 힘들어지는 현실 앞에서 곧잘 비통해진다. 서로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서로 힘이 되지만 누군가의 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역시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때마다 힘이 풀린다. 병상에 누워있던 금순은 자신을 돌보는 동갑친구 은심에게 말한다.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저 외국에서는 주사를 놔준다 하대? 안 아프게 가는 거.” 은심은 알고 있다. ‘존엄사’에 관한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것이 쉽게 허락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아직 이 땅의 것이 아니다.
죽음을 권하는 사회의 노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근미래 일본을 배경에 둔 영화 <플랜 75>는 75세가 된 노인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에서 ‘플랜 75’라는 정책을 시행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다룬다. 당연히 실화가 아니다. 하지만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며 노인 인구 문제에 직면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 속에 잠재된 불안을 있는 그대로 건져 올리듯 또렷한 질문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건 이것이 비단 일본만의 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 중인 한국 사회는 노인 인구 비율이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는 것은 물론 인구가 감소세로 내려앉으며 인구 소멸 위기까지 대두된 상황이다. 그만큼 늘어가는 노인 인구와 줄어드는 청년 인구의 격차가 어느 나라보다 커질 가능성이 다분하며 이로 인한 사회 갈등이 불거질 수도 있다는 예상도 뒤따른다.
<플랜 75>는 이런 심각한 현실을 정면에 놓고 주시하며 담담하고 차분한 문체로 기술하듯 내다본 작품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그리고 있지만 다분히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75세가 넘은 미치(바이쇼 치에코)는 호텔에서 객실 청소일을 하며 홀로 살아가는 독거노인이다.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나이대에 일을 하는 노인들이 많기에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적적함을 달랜다. 문제는 직장에서 쓰러진 동료로 인해 누군가가 노인에게 노동을 시킨다는 것에 문제제기를 했고, 이로 인해 고령의 노인을 고용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미치는 설상가상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할 처지로 내몰린다. 새 일자리도, 새 보금자리도 구할 길이 요원한 가운데 미치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플랜 75를 설명하는 브로셔다. 쓸모를 찾지 못한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란 미소 띤 얼굴로 권하는 죽음이다.
과연 <플랜 75> 같은 삭막한 미래가 올 수 있을까? 정말 이런 정책을 실행하는 정부가 존재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이것이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한때는 수명이 길어지는 것이 인류의 청사진이라 여겼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새로운 문제를 직시하게 됐다. 삶에는 비용이 든다. 오래 산다는 건 계속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일자리는 드물다. 노인과 빈곤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어울리는 시대가 된 건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으나 모든 노인에게 적절한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질 수 없는 현실에서 비롯된 결과다. 존엄한 생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그 와중에 젊은 세대는 줄어들고, 늙은 세대는 점차 늘어난다. 사회가 돌볼 수 있는 여건에도 한계가 있고, 저마다 각기 다른 사정 속에 놓인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삶이 버겁다. <플랜 75>는 이러한 아이러니에서 태어난 질문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왜 없는가
<소풍>과 <플랜 75>는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지만 끝내 같은 곳을 바라보고 묻는 영화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렇다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은 그 자체로 가벼울 수 없다. 죽음이란 결국 그 삶을 온전하게 만드는 마지막 형태이기에 어쩌면 탄생만큼이나 중요한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태어난다는 건 그 누구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평하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공평한 죽음은 무엇일까? 죽을 때를 기다리며 사는 데까지 사는 것일까? 만에 하나 자신의 삶을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불합리한 것일까? 물론 죽음을 종용하거나 권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역시 그의 삶에서 중요한 선택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삶이 힘들다는 이유로 죽음을 선택하려고 한다면 사회가 다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닐까?
존엄한 삶은 결국 존엄한 죽음을 통해 귀결될 것이다. 그러한 삶과 죽음을 개개인의 완벽한 대비만으로 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개인의 불행을 방치하는 사회는 끝내 그 모두가 불행한 예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인의 불행은 결국 이 사회의 불행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노인을 위한 나라를 꿈꾸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생각 이상의 불행을 경험할 확률이 클 것이다. 존엄사 제정의 가부를 논의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존엄사를 원하는 노인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들어보고 고민하는 자세일 것이다. 개인의 이해와 공감 그리고 사회의 합의와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노인도 한때는 청년이었다. 누구나 늙어갈 수밖에 없다. 결국 노인에 관한 고민은 우리 모두를 위한 현실이자 미래일 것이다. 그러므로 듣고 물어야 한다. 노인은 왜 불행할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왜 없는가? 그와 함께 이 물음도 보다 합당하고 현명해질 것이다. 그대들,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한국수목장문화진흥재단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기억과 숲' 여름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