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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7시간전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영화가 아니다

미국에서 한국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현상에 대하여.

<패스트 라이브즈>는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으로 올해 오스카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데뷔작으로서 이례적인 성취다. 유년시절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와 극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투영한 자전적 서사의 영화다. 덕분에 한국 출신의 미국인 이민자로서 자전적인 경험을 반영한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미나리> 역시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한국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특별한 인기를 끄는 걸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실 한국계 미국인의 서사가 인기를 끌기보단 아시아계 미국인 이민자 서사, 즉 아시안 디아스포라 창작물이 팔리는 상황이라 보는 것이 보다 마땅하다. 


지난 몇 년 사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선전한 영화들을 보자. 지난해 무려 7관왕을 차지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비롯해 작품상과 감독상을 차지한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 그리고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작이 된 <미나리>와 무려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까지, 이 모든 작품의 공통점은 아시아계 감독이나 배우들이 관여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에미상 시상식 주요 부문을 수상한 <오징어 게임>과 <성난 사람들(BEEF)> 역시 그렇다. 

그러니까 최근 몇 년 사이 북미권에서 아시아계 감독이나 배우가 참여한 영화나 드라마가 주목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결코 기분 탓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걸까? 갑자기 아시안 디아스포라 스토리가 각광받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미국의 유명한 컨설팅기업 맥킨지 앤 컴퍼니에서 지난 4월에 발표한 리포트에 따르면 아시아 태평양계 커뮤니티가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히 커진 것으로 보인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내린 진단이 아니다. 


리포트에 따르면 이런 변화를 주도한 건 바로 스트리밍 기반의 OTT 서비스 플랫폼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다양한 구독자를 확보해야 하는 글로벌 OTT 서비스가 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시아 구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을 선택했고, 그들에게 어울리는 콘텐츠 제작에 투자하는 과정이 그 영향력 증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현지화 전략을 바탕으로 다양한 로컬 콘텐츠를 자사 플랫폼의 플레이리스트에 구비하는 글로벌 OTT 플랫폼은 북미, 유럽, 남미 등의 지역에 아시아에서 제작된 콘텐츠의 원활한 배급망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제작된 콘텐츠의 위력이 상당한 힘을 발휘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오징어 게임>이다.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 최초로 전 세계 정식 서비스되는 94개국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로 에미상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뒤 6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 이전에도 일찍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처럼 아시아인의 삶을 주소재로 삼은 영화가 서구권에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미국 자본으로 완성한 미국 영화라는 사실과 달리 <오징어 게임>은 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라는 사실이다. 넷플릭스의 투자가 바탕이 된 작품이긴 하나 한국 현지 프로덕션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을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 서비스로 스트리밍 배급한 셈이다. 이는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영화 <기생충>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제작한 영화나 드라마가 해외에서 주목받게 된 건 어쩌면 아시아인의 문화가 하나의 주요한 소재로 떠오르는 분위기가 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K팝과 K컬처를 비롯해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지대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동석과 박서준이 마블영화에 출연하고, 이정재가 <스타워즈>의 스핀오프 시리즈 <애콜라이트>에서 주연을 맡은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지금 해외에서 분명 어느 때보다 ‘핫’하다.


K팝의 인기를 비롯해 한국에서 제작한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같은 드라마와 영화가 각광받는 상황은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인식하고 관심을 갖게 만드는 강력한 계기가 됐다. 그 과정에서 <미나리>나 <성난 사람들> <패스트 라이브즈>처럼 한국계 미국인 창작자가 만들어낸 흥미로운 결과물이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 활발해진 미국 내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는 흐름을 파도처럼 타며 기회를 얻었고, 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인식을 보다 강화하는 역할을 해내는 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미나리>나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영화가 아니라 한국을 가리키는 ‘미국영화’라는 사실일 것이다. 

<미나리>
<미나리> 촬영 현장의 정이삭 감독(오른쪽)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 촬영 현장의 셀린 송 감독(왼쪽)

물론 한국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에 선을 긋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모종의 공통점을 짚기 위함이다. <미나리>와 <패스트 라이브즈>는 공통적으로 한국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바탕으로 미국에 뿌리내린 이민자 서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두 영화 사이에도 극명한 차이가 있다. <미나리>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보다 뚜렷해 보이는 이민자 가족이 미국에서 자리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한국인에게도 이입할 수 있는 정서가 상당한 영화였다. 반대로 <패스트 라이브즈>는 미국인의 정체성이 보다 뚜렷한 이민자 2세의 관점이 보다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한국인보다는 미국인의 기호에 더 어울리는 작품처럼 보인다. 한국인보다 미국인 입장에서 보다 흥미롭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다분한 기질을 가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을 한국어로 발음하는 극 중 대사를 통해 해외에서 큰 화제를 모았지만 한국에서는 특별한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인 네이티브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유태오의 부정확한 발음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국내 관객들의 리뷰가 적지 않게 보인다. 이는 <패스트 라이브즈>가 명백한 미국영화라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결과 같아서 되레 흥미롭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한국어 대사 발음이 한국인이 듣기에는 부정확하다 해도 한국어 뉘앙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외국인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건 한국과 관련한 작품이 미국에서 제작된다는 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건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장차 한국에서 제작된 콘텐츠나 한국인 창작자 혹은 배우의 해외 진출에 너른 기반이자 큰 밑천이 될 것이다. 현재 공개를 앞둔 <파친코 2>나 <오징어 게임 2>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매킨지 리포트는 아시아 태평양계 커뮤니티를 보다 이해하고 그들의 공감대를 구할 수 있는 작품을 구상하길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한국은 분명 그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우선순위에 놓인 이름일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을 대변하는 알파벳 K는 분명 허수가 아닌 상수라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디아스포라 영화와 드라마가 등장하고 각광받는 건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이민자 2세대 창작자들이 등장한 덕분이기도 하다. 이국에서 가족을 건사하고 자리 잡기 위해 생업에서 분투한 이민자 1세대 부모의 슬하에서 자란 2세대가 비로소 자신들의 경험이 반영된 예술을 할 수 있게 된 미국인으로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리>나 <패스트 라이브즈>는 한국계를 포함한 아시아계 미국인 이민자 2세대가 미국 사회에 정착해 주류로 진입하고 있다는 정황 증거로서 유효하다. 결국 이런 인과가 미국영화의 다양성을 한 뼘 넓힌 셈이다. 역시 사람이 미래다.


('Noblesse MEN' 매거진 2024년 7~8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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