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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02. 2024

마블의 새로운 엔드게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다른 가면을 쓰고 마블로 돌아온 이유에 관하여.

“이해가 안 돼. 이제 악당인 건가?” 기네스 팰트로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하, ‘로다주’)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댓글을 남겼다. 가면을 마주 보는 로다주의 사진과 ‘새로운 마스크, 같은 임무(New mask, same task)’라는 문구가 적힌 게시물이었다. 이 가면과 문구의 정체는 미국 현지시각으로 지난 7월 27일 샌디에이고 ‘코믹콘’ 현장에서 공개됐다. 마블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신작 라인업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녹색 의상을 입은 이가 가면을 벗자 장내가 뒤집어졌다. 로다주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복귀 선언을 알리는, 성공적인 쇼였다. 


로다주의 MCU 복귀작은 2026년 5월 1일 개봉과 2027년 5월 7일 개봉이 예고된 <어벤져스: 둠스데이>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라고 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로 명맥이 끊어진 새로운 <어벤져스> 프랜차이즈를 위해 로다주가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아이언맨이 아니라 닥터 둠이었다. 영웅이 아니라 악당으로 돌아온 것이다. 기네스 팰트로가 헷갈린 이유다. 멀티버스 사가라는 콘셉트 안에서 배우의 얼굴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합리가 됐지만 로다주는 MCU의 시작점과 정점을 만든 상징적인 얼굴이라는 점에서 실로 놀랍고 대담한 선택이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MCU 복귀 계획이 공개된 코믹콘 현장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우측 하단)

원래 <어벤져스> 프랜차이즈 신작으로 예정된 건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에 등장한 새로운 최종 빌런 정복자 캉을 앞세운 <어벤져스: 캉 다이너스티>였다. 계획에 없던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랬다. 2023년 12월 마블 스튜디오는 정복자 캉을 연기한 배우 조너선 메이저스의 하차를 발표했다. 조너선 메이저스는 여자친구 폭행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뒤 끝내 유죄가 확정됐다. 최종 빌런이 사라진 새로운 <어벤져스>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애초에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에서 압도적인 능력과 매력을 설득하지 못하며 우려를 산 캐릭터라는 점에서 적잖은 고민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긴 했으나 이런 식의 퇴장은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마블 스튜디오의 CEO 케빈 파이기에게는 새로운 계획이 있었다.


최근 로다주가 한 팟캐스트 방송에 나와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마블 복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건 코믹콘의 깜짝쇼를 벌이기 1년 전쯤이었다고 한다. 케빈 파이기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기적인 만남을 이어가던 로다주는 그로부터 새로운 가면을 쓰고 마블에 복귀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게 됐다고 한다. 닥터 둠이었다. 이 아이디어에 동조한 로다주는 케빈 파이기에게 디즈니의 CEO 밥 아이거에게 곧바로 의견을 구할 것을 권유했고, 밥 아이거는 거부감 없이 의견을 수락했다. 밥 아이거는 케빈 파이기의 아이디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로다주가 손가락을 튕겨주길 기대할 뿐이었다.


‘가망이 없어.’ 28억 달러의 전 세계 개봉 수익을 기록한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로 마블 스튜디오에는 오역 같은 평판만 더해졌다. 작품이 공개될 때마다 열광 대신 조소가 더해졌다. 디즈니 플러스에 구독자를 모으는 핵심 전략이 될 것이라 여겼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서사를 연계한 시리즈 제작 방식은 되레 마블 극장 영화들을 볼품없게 만드는 함정이 됐다. 평범한 수준의 시리즈들은 기존 캐릭터의 매력을 끌어내리는 악수였다. 마블 영화를 기다렸던 관객들은 멀티버스 콘셉트를 남발하는 스토리 라인에 피로감을 느꼈다. 더 이상 믿고 보는 마블 영화가 아니었다. 거르거나 의리로 보거나.


지난 2020년에 은퇴했던 밥 아이거는 지난해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CEO로 복귀했다. 픽사와 마블, 루카스 필름, 20세기 폭스 인수와 디즈니 플러스 론칭 등 디즈니의 새로운 황금기를 이끈 밥 아이거가 다시 디즈니의 구원 투수로 등판한 것이다. 콘텐츠 왕국으로 불리던 디즈니 산하의 모든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개봉 영화들의 위세는 예전같이 않았다. CEO로 복귀한 밥 아이거는 디즈니 산하의 창작자들이 스토리텔링보다 정치적 올바름의 메시지 전달을 우선으로 여기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연이어 야기된 PC 논란과 관련해 흥미를 설득하지 못한 정의는 더 이상 디즈니의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CEO 밥 아이거(좌), 밥 아이거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디즈니랜드의 놀이 기구 시연에 참석한 모습(우)

밥 아이거의 취임 직후 디즈니 산하의 스튜디오에서 제작을 밝힌 작품은 <겨울왕국 3>와 <토이 스토리 5> 그리고 <주토피아 2>였다. 당분간 보수적인 프랜차이즈 전략으로 콘텐츠 회사로서 신뢰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팽창한 세계관의 볼륨을 줄이고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제작에 주력할 것이라 밝혔다. 마블 스튜디오는 이러한 진단과 처방을 적용할 주요 대상이었다. 2024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을 계획했던 마블 스튜디오의 계획도 전면 수정됐다. <데드풀과 울버린>을 제외한 세 작품의 제작을 연기했다. 그 과정에서 은밀하게 새로운 가면을 마련하며 로다주의 복귀를 모색하고 마블의 새로운 펀치라인을 구상한 것이다.


올해 마블 스튜디오의 사정은 어느 해보다 밝다.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 2>가 16억 불 이상, <데드풀과 울버린>이 12억 불 이상의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수익을 올리며 밥 아이거의 리더십에 그린 라이트를 밝혔다. 로다주의 복귀가 은밀하고 신속하게 결정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찍이 마블의 황금기를 열었던 페이즈3를 구상하고 결정할 전권을 마블 스튜디오의 브레인 케빈 파이기에게 쥐여준 것도 밥 아이거였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믿는 밥 아이거는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디즈니와 마블의 엔드게임을 이끌며 청사진이 될 미래를 찾고 있다.


물론 아직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대중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프랜차이즈 제작이 꼭 성공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로다주의 복귀가 새로운 <어벤져스>의 영광을 재현하는 핑거스냅이 될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다. 악수가 된다면 되레 영광이라 여겼던 유산마저 훼손될 수도 있다. 하지만 로다주의 복귀 선언과 함께 마블 스튜디오와 MCU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커진 건 분명하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의심을 부르던 분위기가 호기심으로 변했다. 이처럼 되는 일을 발 빠르게 되게 만드는 리더십의 힘이란 인피니티 스톤을 모은 인피니티 건틀렛을 낀 손처럼 위력적이다. 로다주는 확실한 게임 체인저였다. 마블의 엔드게임이 시작됐다. 


('Noblesse MEN' 매거진 2024년 10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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