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 관람을 권하며.
오는 11월 5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에 메가박스 이수 아트나인에서 시작하는 <세계의 주인> 상영 후 윤가은 감독님과 함께 GV를 진행할 예정. 이미 자리는 매진된 상황이지만 이참에 <세계의 주인> 관람하기를 한 번 더 권해보고자 써보는 글.
요즘 영화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다고 여기는 이를 만나면 대뜸 <세계의 주인> 꼭 보라는 이야기부터 한다. 그만큼 좋은 영화라 기꺼이 추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하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필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란 결국 좋은 대화로 이어지는 법이다. <세계의 주인>은 그런 대화의 장을 열어주는, 좋은 영화다.
<세계의 주인>을 보고 나서 ‘세계’라는 단어에 대해 곱씹게 되었다. 세계란 나를 둘러싼 너른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라는 내면으로 수렴해 찬찬히 유영할 수 있을 때 유심해지는 우주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둘러보고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 나라는 존재를 둘러싸고 채우는 또렷한 경계를 발견하고 모험할 수 있는 언어로서, 세계가 다시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 ‘주인의 세계’가 아닌 ‘세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거듭 곱씹게 된다. 영화가 품은 세계와 그로부터 자라난 소녀 주인이 한없이 너르고 더없이 너그러운 세계에서 마음껏 생장하는 주인이었고 그러리란 믿음을 기꺼이 기약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 뜨겁게 차오르는 기분이란 결코 영화 속에서만 허락되는 허상이 아닐 것이다. 어린 세계 속에 일찍이 뿌리내린 비정을 솎아내거나 뽑아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염려로 메마른 마음에 끝까지 길어 올리고 부어주는 고운 결의를 놓지 않을 때 비로소 다다를 수 있을 듯한 품성의 경지가 바로 이 영화에 있다.
당장 SNS만 봐도 모두가 달디단 행복과 보람으로 점철된 듯한 매일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단편적인 이미지 저편의 마음은 어떠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밝고 명랑하고 쾌활하게 대면하는 그 얼굴로 누른 사정이 일찍이 어떤 형상이나 형태로 흐르는 피였을지, 부서지는 살이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가려진 마음을 비로소 대면한다 해도 그 마음의 주인이 애초에 감당했을 세계에 무엇이 있었을지 역시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지는 삶에서 무력하고 헛헛한 심경이 용솟음칠 때 그러한 지금을 기꺼이 함께 받아내고 기다려주는 이들의 세계가 곁에서 나란히 자리하고 이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살아간다는 말을 헛되지 않게 꽉 채워주는 위안이나 용기도 가능한 세계라는 것에 다시 한번 악쓰고 박차며 가다듬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세계의 주인>은 한 사람의 심연이 이토록 깊고 깊어 온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면서도 한 사람을 너르게 포괄하는 이들이 이루는 공동의 세계 속에서 가능한 연대와 회복과 전진을 벅차게 선언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소녀 주인의 세계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곁에서 함께 자리하며 살아가자고 말할 수 있는 주인이 머무는 세계에 관해서 명백하게 설득하고 명료하게 감응하도록 이끈다. 그렇게 한 사람을 키우고, 지키고, 채워주는 세계란 실로 다행이지 않은가. 개인의 심연 안에서만 드리우는 그림자를 홀로 마주하는 세계란 지독하게 외롭고 고단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한 세계를 보듬어주겠다고 말하는 이들의 장벽 또한 자신을 두르고 있는 세계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가능한, 우리들의 세계에 관한 신실한 믿음. 그것이 바로 <세계의 주인>이 귀하게 품고 기꺼이 내어주는 마음일 것이다.
결국 <세계의 주인>을 보자고 권하는 건 그런 마음을 마음으로 이어 줄 수 있다는 믿음에 응답하고 기꺼이 그 믿음을 이어갈 새로운 ‘세계의 주인’을 찾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일지도.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주인>이 내미는 손을 꼭 붙잡아주시길.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을 위하여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