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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세계의 정면과 이면 그리고 가능한 우리들

2025년 최고의 한국영화 '세계의 주인'이 품은 세계와 마음들.

by 민용준

쾌활하고 털털한 성격으로 교우들 사이에서 늘 주목받는 고등학생 소녀 주인(서수빈)은 늘 열심이다. 학교 생활도, 태권도도, 봉사활동도, 집안일에도 열심인 주인은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묻는 선생님의 질문 앞에서는 시큰둥하더니 장난스럽게 ‘사랑’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주인은 친한 친구로부터 “연애 좀 살살하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연애도 열심이다. 하지만 주인은 사랑이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어려운 일이 찾아온다.


같은 반에 있는 수호(김정식)는 아동 성폭행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됐던 범죄자가 형기를 마치고 복역 전에 거주하던 자신의 동네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린 여동생이 있는 수호는 학우들에게 이를 반대하는 서명을 받다가 주인과 충돌한다. 주인은 취지는 알겠지만 틀린 말도 있어서 결코 서명할 수 없다고, 구체적으로 피해자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회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이로 인해 충돌하는 주호와 주인은 끝내 예상치 못했던 비밀과 고백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된다.

<우리들>과 <우리집>을 연출한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세계의 주인>은 겉으로 드러난 면면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는 심연에 관한 영화다. 겉보기에 마냥 명랑한 소녀의 마음속에 일찍이 들이친 파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언뜻언뜻 잡히던 기미는 정확히 영화의 러닝타임이 한복판으로 다다르는 1시간여쯤 담담한 고백으로 발화된 뒤 이윽고 강렬한 감정으로 폭발한다. 마치 영화의 전후반을 가르듯 점프하는 이 대목에서 <세계의 주인>을 바라보던 관객 입장에서는 방금까지 마주하던 얼굴이 삽시간에 낯설어지는 경험이 될 것이다.


"<세계의 주인>도 여전히 주인공의 관점을 따르는 영화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주인공을 어떻게 보고, 이야기하고, 판단하는지 보여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그 과정에서 의문이 제기되길 원했고, 그래서 3인칭 서사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윤가은 감독의 말처럼, 초등학생 소녀들을 주인공으로 둔 윤가은 감독의 두 전작과 달리 고등학생 소녀를 내세운 <세계의 주인>은 전작과 달리 어린 주인공의 시점으로만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해 주인을 둘러싼 세계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이들의 얼굴과 생각과 언행을 통해 한 사람의 안팎으로 깊게 채워지고 너르게 에워싸는 ‘세계’가 제각각 다른 표정을 하는 이들의 총체이면서도 한 사람으로 수렴하는 방향성을 가진 심연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주인의 세계는 변화한다. 주인은 스스로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실제로 스스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듯 일상을 보내지만 몰랐던 사정을 뒤늦게 알게 되는 친구들은 더 이상 그전에 알던 그 친구들처럼 마냥 스스럼없이 주인을 대하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인을 염려하면서 함께 앓듯이 가족 몰래 과음을 하던 어머니(장혜진)는 끝내 딸을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고, 급기야 탈이 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주인에 관한 타인의 사정과 심정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뿐, 주인의 삶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주인도 짐작하지 못했던 깊은 속내와 마주하는 경험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주인을 향해 날아드는 네 개의 쪽지를 보여준다. 주인의 비밀이 드러나기 전에 한번, 드러난 이후로 두 번, 그리고 마지막에 한 번, 그렇게 주인 모를 쪽지는 주인의 태도를 비난하기도 하고, 힐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 차례에 걸쳐 활자로만 읽히던 쪽지가 영화의 결말에 다다라 모두의 목소리로 들려질 때 <세계의 주인>이라는 제목은 비로소 명명해진다. 쪽지의 발신인은 끝내 드러나지 않지만 그 쪽지의 수신인에게 전해지는 마음이, 인상은 몰라도 심정은 충분히 알 수밖에 없는 타인에게 전해진 진심이, 그것이 끝내 자기 삶을 아끼고자 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다다른 용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주인의 세계는 비로소 세계의 주인들과 함께 나란히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쥐여준다.


주인에게는 일찍이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주인이 스스로 말하기 전까지는 주인처럼 상처를 감추거나 누르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세계의 주인>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이겨내야 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일단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역시 삶이다. 살아진다는 건 의지가 아니라 자연 같은 원리다. 혹자는 상처를 견디고 살아갈 누군가의 일상이 위로로 충족돼야만 가능한 일상일 것이라 손쉽게 단정 짓지만, 실제로 그런 순간도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다른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살아간다는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평범한 나날이 가급적 이어지고 가능하다는 반복과 안심이 깊게 깃들고 믿음조차 필요 없이 거기 관성처럼 안착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주인>은 그런 세계 속에 자리한 주인과 진정으로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된, 주인과 또 다른 주인들에 관한 영화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좋은 이들과 환경을 가진 행운아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영원히 마음속에 남는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야 한다. 사람마다 트라우마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윤가은 감독의 말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정면과 이면 사이에 켜켜이 자리한 마음의 형태란 각기 자라나고 때론 일그러지기도 하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리처럼 들린다. 그래서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마음도 있지만 그래서 더 없는 단짝이 되는 마음도 있다는 것. 이처럼 다채롭고 이채롭게 맞물리고 어긋나는 마음 사이에서도 개인의 심연 안에서만 지독하게 드리우는 그림자를 홀로 마주하는 세계의 지독한 외로움과 고단함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어주는 이들이 곁에 있다면, 그러한 이들이 두르는 장벽 같은 세계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고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가능한 우리들의 세계. 그런 세계에 관한 신실한 믿음을 귀하게 품고 기꺼이 내어주는 마음이 <세계의 주인>에 있다.


사과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주인에게 친구는 말한다. “사과는 싫어하기에는 너무 무난한 과일 아닌가?” 아이러니하지만, 그렇다. 사과를 싫어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은 사과를 싫어한다는 주인의 특별한 사정이 드러나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사과를 싫어하는 이도 존재할 것이다. <세계의 주인>은 주인이 사과를 싫어하는 이유를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실상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이런 물음도 가능할 것이다. “사과를 싫어하는 데 꼭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세계의 주인>은 그렇게 세계의 장벽을 넘어 가능한 우리를 사유하길 권하는, 품성의 경지를 지닌 걸작이다. 관람을 권한다.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간절하게.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발간하는 'The-K 매거진' 12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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