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의 일생' 새로운 오늘과 가능한 나를 위하여

오늘을 지나 또 다른 오늘의 나를 만난다는 것, '척의 일생'에 관하여.

by 민용준

이 세상이 끝나가려 한다면, 그것이 덧없는 불안이나 막연한 짐작이 아닌 확실히 다가올 미래라는 걸 알았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무리 자명하다 해도 만약 그 죽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당도할 것이라는 걸 명백하게 알아버렸다면, 자기 삶에 대한 대단한 기대까진 없었다 할지라도 생각지 못한 종착지가 기다리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당장 그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처럼 초연할 수 있을까? 그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허락된 하루에 충실할 수 있을까? 그저 죽음을 향해 끌려가고 있다는 허무에 빠져들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집 <피가 흐르는 곳에>에 수록된 동명 단편 소설을 바탕에 둔 영화 <척의 일생>은 멸망의 기미가 뚜렷한 세계에서 어떤 이들이 선택한 마지막 찰나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고, 일찍이 자기 생의 마지막 순간을 목도해 버린 이에게 찾아온 어떤 하루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척의 일생>은 종말이나 죽음에 관한 절망이나 비정으로 미끄러지거나 쓰러지는 묵시록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무턱대고 거창한 희망이나 인생의 환희를 기도하거나 노래하는 송가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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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의 일생>을 연출한 감독 마이크 플래너건이 원작 소설을 읽은 건 2020년 4월경이었다. 한밤중 쳐들어와 삽시간에 세상을 장악한 점령군처럼 찾아온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동일한 우울과 불안에 짓눌리던 그 시기에 마이크 플래너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 달째 이어지는 봉쇄령으로 외출과 이동이 통제되고 교류와 접촉이 불순한 일처럼 여겨지는 세계에서 절망감을 느끼던 와중에 스티븐 킹의 소설을 탐독할 자신이 없었지만 끝내 마지막장을 덮은 뒤 예상치 못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눈물이 흘렀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었다. 벅찬 감동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기쁨과 낙관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깊은 향수와 감사를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이 소설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은 스티븐 킹에게 편지를 썼다. ‘만약 당신이 이 작품을 저에게 맡겨준다면, 제가 읽으며 상상했던 바를 아주 조금이라도 영화로 만들 수 있다면, 아마 제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영화가 될 겁니다.’ 이렇게 영화화가 진행됐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스티븐 킹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스티븐 킹의 다른 작품의 영화화가 진행 중이었고, 그는 자신의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중복적으로 영화화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크 플래너건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거듭 스티븐 킹에게 자신의 진심을 호소했다. 스티븐 킹도 거듭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됐다.


<척의 일생>은 3막으로 구성되고 나열되는 스토리 라인을 가진 영화다. 서사순으로 보자면 3막에서 1막으로, 끝에서 처음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그 모든 과정에는 척 크랜츠(톰 히들스턴)가 있다. 하지만 도입부에 해당하는 3막에서 그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멸망의 기미가 역력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척의 타인들이 주축을 이룬다. 고등학교 교사 마티(치웨텔 에지오포)는 수업 중 스마트폰을 보던 학생으로부터 캘리포니아주가 땅으로 꺼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와 함께 인터넷이 차단된다. 교통이 마비되고 전력과 통신이 끊긴다. 시내에는 거대한 싱크홀이 생겼다. 사람들은 죄다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척에게 감사를 표하는 광고는 끊임없이 주변에 등장한다. 이렇듯 인류 문명이 서서히 꺼져가는 세상에서도 ‘고마워요! 척!(Thanks! Chuck!)’이라는 문구로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광고는 다양한 경로로 끊임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그리고 마티는 세상이 망하기 전 이혼한 전 부인 펠리시아(카렌 길건)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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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미스터리한 척의 정체는 2막과 1막의 역순으로 분명해진다. 2막에서는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드럼 연주자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련되고 단정한 슈트 차림을 한 척은 연주 중인 드럼 앞에 멈춰서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하고 격정적으로 춤을 춘다. 그가 바로 앞선 3막에서 세상이 감사를 표하던 남자 척이다. 그렇게 춤을 추는 척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리고 마지막 1막에서는 성인이 되기 이전, 유년 시절 척의 성장기를 살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살던 7세 소년이 어쩌다 부모를 잃게 됐는지, 그 이후로도 이어지는 상실을 견디며 자라나는 과정에서 좀처럼 예감할 수 없는 비밀과 비로소 맞닥뜨리게 된 경위가 밝혀진다.


파편처럼 이어지는 3막과 2막은 척이라는 남자와 그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미스터리를 가중시키는 반면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1막은 그 모든 비밀과 신비의 유래를 살피는 척의 성장담을 제시한다. 확실히 해소되지 않는 불분명한 설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과 한 세계의 운명이 불가분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의도만큼은 분명하다. 한 세계의 운명이 종말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아무도 모르는 한 남자의 39년 인생에 감사를 바치는 헌사가 중첩된다. 슬픔과 두려움으로 꺼져가는 세계에서 정체불명의 의문이 켜켜이 불을 밝힌다. 그리고 마치 그 세계의 운명을 관장하는 메시아를 향한 예찬처럼 곳곳에서 등장하는 인사말이 어찌됐건 멸망이 임박한 세상에서 마티는 한 시절을 함께했던 전부인과 나란히 앉아 꺼져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태어나는 이유는 모르지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끝에 죽음이 있고, 소멸이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 어떤 식으로든 삶은 종착하거나 중단되거나 정지된다. 그렇게 한 사람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가 지난 삶에서 겪고, 느끼고, 품고, 바라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건 비단 그만의 문제일까?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삶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척의 일생>은 이러한 의문을 토대로 한 사람의 인생과 한 우주의 운명을 밀착시켜 다시 제안해보는 흥미로운 물음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우주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의 삶이 끝났다는 건 결국 그 삶의 당사자를 둘러싼 세계의 지각이 흔들리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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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저마다 세상의 끝으로 다다르는 것이 인생이라면 끝내 그 끝까지 살아보는 것이 인생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끝을 미리 예감하거나 인지하게 된다면 그 삶을 과연 어떤 의미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삶이 얼마나 유한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때때로 삶은 무한하다. 하지만 만약 삶의 너비를 명확하게 알게 된다면, 누군가 그 삶이 어디서 멈출지 정확히 알려준다면 어떠할까? <척의 일생>은 결국 ‘나의 일생’ 혹은 ‘누군가의 일생’과 다르지 않다. 막연했던 삶의 유한함이 자신의 사정으로 밀물처럼 밀고 들어올 때 우리는 과연 그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지나온 인생을 다시 떠올리며 그 모든 기쁨과 슬픔을 삶의 묘미라고 곱씹을 수 있을까?


<척의 일생>은 이에 직접 입으로 답하는 대신 몸으로 보여준다. 길을 걷던 척이 드럼 비트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척의 일생>에서 가장 훌륭한 볼거리다. 하지만 이 볼거리는 그 이후로 제시되는 척의 성장 과정에서 각인된 인상적인 기억으로 각성된다. 그 춤이 갑자기 튀어나온 돌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래전 그에게 가능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부터 각성된 의식의 발로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불분명한 의문으로 가득한 삶에 경쾌하고 명료한 박수로 응답하고 싶어질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 어디서든 죽을 것이다. 그 당시에 찾아올 슬픔과 서러움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슬픔과 서러움도 끝내 그때까지 살아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렇듯 태어난다는 건,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죽는다는 것도, 하나 같이 신비로운 일이다. 슬픔 이전에 기쁨이 있었고, 헤어짐 이전에 만남이 있었고, 죽음 이전에 태어남이 있었다는 것. 그러니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충분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 누군가는 드럼을 치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그 곁에서 몸을 흔들고 박수로 응답한다. 그렇게 일단 살아가는 데에서 살아가는 것, 이유를 알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척의 일생>은 바로 그런 삶의 기쁨과 슬픔을 누릴 수 있는, 지금 가능한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장담할 수 없는 내일은 지금 가능한 오늘을 살아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오늘이라고, 그 오늘을 살아보라고 권한다. 불분명한 내일보다도 확실하고 가능한 오늘과 지금의 나를 위하여.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발간하는 'The-K 매거진' 2026년 2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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