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우리' 사랑의 끝이 아닌 완성이자 완결

'만약에 우리'가 권하는 사랑의 이해에 관하여.

by 민용준

사랑했다면 이별도 했을 것이다.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되지 못한 이상 그랬을 것이다. 아직도 사랑해 본 경험이 없다면 언젠가 사랑하고 이별할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될 것이다. 현재형으로 서술할 수 없는 감정은 결국 해묵은 기억이 될 것이다. 사랑에도 시제의 변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 대사가 시대가 흘러도 해묵지 않은 공감을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감정은 흐르는 시간에 드문드문 깎여나갈 뿐 떠내려가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미련이 남은 탓인지, 무엇에 연연하는지 몰라도 바위처럼 단단하게 늘 거기 머물러 있는 어떤 감정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이별’이 아니듯, 어쩌면 사랑의 끝도 이별이 아닐 것이다.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 있다는 유행가 가사 같은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건 실제로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경험하는 이들의 공감을 사는 덕분일 것이다. 감정이 충만해도 사정이 녹록지 않으면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때가 찾아오기도 한다. 헤어진 상황에서도 헤어지지 못한 마음이 남겨놓은 물음에 홀로 답해야 한다. “우리가 왜 헤어졌지?” <만약에 우리>는 이 질문에 관한 답변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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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호치민 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하던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했던 승객들은 현지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한다. 예상치 못한 기상 악화로 비행 스케줄이 취소된 탓이다. 호치민으로 출장을 온 뒤 귀국 예정이었던 은호(구교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과거 사랑했던 옛 연인 정원(문가영)과 기내에서 재회한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가 된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세월의 공백이 있다. 은호와 정원은 뜻밖의 재회와 지연된 귀국 일정으로 생겨난 하룻밤 동안 지난 시절을 되짚으며 대화를 나눈다. 2024년의 베트남 호치민에서 나눈 대화는 2008년 서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장 돌아갈 수 없는 내일의 서울 대신 먼 과거 속 기억에 자리한 서울과 지금의 호치민 사이를 오가기 시작한다.


<만약에 우리>는 소설 <춘절, 귀가>를 영화화한 중국영화 <먼 훗날 우리>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베이징을 주배경에 둔 중국 영화와 서울을 주배경에 둔 한국 영화의 스토리는 대체로 비슷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각자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가난한 젊은 남녀가 연인 사이로 발전한 뒤 열애를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에 치이고 치이다 끝내 헤어지게 되고 긴 시간이 흐른 뒤 재회해 서로 사랑했던 시절을 반추하는 과정을 그린다. 중국 원작영화나 한국 리메이크 영화나, 기본적인 스토리나 내러티브에는 큰 차별점이 없다. 그렇다면 <먼 훗날 우리>가 <만약에 우리>로 거듭난 이유는 무엇일까? 리메이크작이 설득하는 새로운 당위와 고유한 비전이란 무엇일까?


<만약에 우리>를 연출한 김도영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먼 훗날 우리>를 리메이크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세 번째 제안을 받았을 때 응하기로 했다. 준비 중이던 드라마 연출이 무산된 탓도 있었고, 새롭게 각색된 대본이 마음에 든 덕이기도 했지만 감독으로서 인연이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에 우리>는 김도영 감독에게도 시절인연처럼 찾아온 영화였던 것이다. 그렇게 연출할 결심을 했으니 어떻게, 무엇에 중점을 두고 연출할 것인지 기준을 세워야 했다. 김도영 감독은 원작과 차별화된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것보다는 중국 영화 원작의 좋은 면을 성실하게 반영해 리메이크한 한국 영화를 만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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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우리>는 오랜만에 재회한 옛 연인의 현재를 흑백으로, 우연한 만남으로 우정을 쌓다가 연인이 된 과거를 컬러로 구분하는 <먼 훗날 우리>의 시제 연출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형식이 자신이 만든 게임을 성공시키겠다는 주인공 남성 캐릭터의 야심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원작의 설정 또한 동일하다. 김도영 감독의 의도대로 원작의 좋은 면면은 리메이크작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우리>는 그 의도대로 원작과 다른 리메이크작의 배경이 된 지역에 어울리는 새로운 양식을 가진 영화로 완성됐다. 2007년 베이징에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난한 젊은 남녀를 둘러싼 환경과 문화가 2008년 서울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변주됐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소재가 국적의 차이를 떠나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감정이자 사건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새로운 영화적 제안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싸이월드 세대라면 <만약에 우리>에서 테마송처럼 거듭 등장하는 오래된 유행가를 통해 떠오르는 기억을 영화와 함께 환기할 것이다. 반대로 그 노래를 처음 듣고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관객이라면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단순히 어느 시절을 그리는 영화라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제목이 품고 있는 ‘만약’은 현실에서는 실로 무의미한 언어이지만 창작의 세계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주문이다. 그리고 로맨스 영화에서 플래시백이란 ‘만약’이라는 주문을 위한 타임캡슐이다. <만약에 우리>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과거 시제가 플래시백 될 때마다 ‘만약’이라는 주문도 거듭 힘을 발한다. 그 시절의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슬픔이 차례로 재생될 때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차례로 환기된다. 겪어봤다면 그래서, 겪어보지 못했다면 역시 그래서, 그립기도 하고 그래서 서글프게 다가오는 지난 시절의 어떤 감정과 대면해야 한다.


<만약에 우리>는, 그 이전에 <먼 훗날 우리>는 현재를 흑백으로, 과거를 컬러로 연출하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듯 교차편집하는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어떤 물음을 생성시키고 그에 관한 답변을 수렴하는 문답의 여정을 수행한다. 오랜만에 재회하고 서로 반가운 미소를 주고받는 과거의 연인은 필연적으로 어떤 물음을 만들어낸다. 과거 사랑했다는 그들은 왜 지금 연인이 아닐까.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응원하다 서로를 버거워하고 감당하고 밀어내기까지, 세월과 함께 희미해진 과거가 선명해지는 순간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그 시절의 애수와 향수가 일거에 밀려온다. 그래서 더 이상 부질없는 ‘만약’이라는 신기루 같은 시간이 되풀이된다. 하지만 현실은 허구가 아니다. 과거는 이미 멀어졌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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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고, 이별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온 시간일 것이다. 그래서 뻔한 감정과 사건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찾아오고 벌어지든 통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자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는 일종의 소환술 같은 영화다. 젊은 날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격려하던 젊은 연인이 현실에 부딪히며 서서히 꿈의 동력을 잃고 삶에 치이듯 살아가다 끝내 함께 바라보던 곳이 어디였는지 잊게 된다는 것. <만약에 우리>는 꿈과 사랑이 유의어였던 젊은 남녀가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시대를 한참 지나고 나서야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알게 된다는 아이러니를 그리는 향수와 애수의 로맨스 영화다. 각기 다른 형태의 감정과 경험을 품거나 겪은 입장에서도 정원이나 은호처럼 그 시절에 놓거나 놓쳤을 그 마음을 떠올리고 되짚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돌아볼 수 있다는 건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시절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했던 과거의 연인들이 현재에서 함께 웃고, 울며 그 시절을 반추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그런 일이다. 그 기억이 서로를 해치거나 망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오늘이다. <만약에 우리>는 어제를 돌아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가리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로맨스 영화다. 실패한 과거의 사랑에 사로잡혀 오늘을 망친 이들의 회한을 낳는 오늘이 아니라 비록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라 해도 사랑했던 그 시절에 응원했던 서로의 꿈이 끝내 발아하고 어엿하게 자라났다는 결실을 함께 확인하고 기뻐할 수 있는 오늘이 됐다는 것, 그렇게 다다른 사랑의 이해로 비로소 이별도 완성된다. <만약에 우리>는 그 이별이 사랑의 끝이 아닌 사랑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로맨스물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시절의 기쁨과 슬픔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랑의 이해를 권하는, 성숙한 마침표다.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발간하는 'The-K 매거진' 2026년 3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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