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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27. 2018

<레디 플레이어 원>스필버그가 남긴 이스터에그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소년의 영화다.

변화무쌍한 고가도로 위를 곡예하듯 달리는 <백 투 더 퓨처>의 드로리안과 <아키라>의 카네다 바이크를 <쥬라기 공원>에서 본 듯한 티라노사우루스와 <킹콩>의 킹콩이 위협한다. 기동전사 건담이나 퍼스트 건담이라 알려진 RX-78-2 건담이 아이언 자이언트와 함께 메카고지라와 맞서 격전을 벌인다. 심지어 슈퍼맨과 배트맨이, 조커와 할리 퀸이, 처키가, '스트리트 파이터'와 '헤일로'와 '스타크래프트'와 '오버워치' 같은 게임이, <샤이닝>과 <조찬클럽> <매드맥스> <터미네이터> <에이리언>이 등장하거나, 언급되거나, 연상된다. 어니스트 클라인이 쓴 동명 소설을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레디 플레이어 원>은 8비트 비디오 게임 문화와 다양한 상업 영화 시장이 팽창하고 폭발하던 198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중문화를 수놓은 아이콘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스크린 안에 던져놓고 활개치도록 만들고자 마련된 축제처럼 보인다. 


미리 말하건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콘들을 일일이 호명해 나열하거나 그 출처를 파헤쳐 열거할 생각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디 플레이어 원>이 끌어안은 방대한 세계관을 완전히 탐독해낼 자신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영화를 수식하는 수많은 별과도 같은 캐릭터와 세계관이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의 요건이었음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레디 플레이어 원>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사들을 수집하고 이해하는 것이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충분조건이되 필요조건일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영화의 배경이 된 2045년 인류는 식량 파동과 인터넷 대역폭 사태로 어두운 현실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그리는 현실은 생각보다 낙천적으로 보이는데 그건 아마 그 세계 속의 인물들에게 모종의 도피처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익명의 아바타로 접속해 가상 세계를 경험하는 플랫폼인 오아시스는 일종의 증강현실 게임으로 발표됐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암울한 현실이 가속화되자 사람들은 점점 희망이 없는 현실을 벗어나 다양한 쾌감을 개척할 수 있는 가상현실에 탐닉해갔다. 그런 이유로 오아시스는 현실을 대체하는 대안적인 세계로 기능하게 됐다. 현실과 가상의 주객이 전도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영화의 표현에 따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사, 잠, 용변을 제외한 모든 행위를 오아시스에서 해결한다. 심지어 원작 소설에서는 학교에 등교하고 교육을 받는 것 또한 오아시스 안에서 가능하고 실제로 이뤄진다고 설정한다.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트레일러 빈민촌에 정착한 소년 웨이드(타이 셰리던) 역시 파시발이라는 익명으로 오아시스에 접속해 본격적인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이모 집에 얹혀사는 웨이드는 오아시스 안에서 친구를 만나고 일상을 보낸다. 그들이 오아시스에 접속하는 데엔 공통적인 이유도 있다. 할리데이(마크 라일런스)의 미션을 통과해 열쇠를 얻고 오아시스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다. 할리데이는 오아시스라는 증강현실을 디자인한 개발자인데, 그는 오아시스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 개의 미션을 통과한 이에게 50만 달러로 추정되는 회사의 지분과 오아시스를 경영할 권리를 양도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 뒤로 할리데이의 이스터에그를 찾는 데 혈안이 된, 이른바 ‘건터’들의 각축전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레디 플레이어 원>은 영화의 주인공인 웨이드가 할리데이의 이스터에그를 찾아내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어드벤처 영화이자 SF 영화이자 성장 드라마인 셈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대한 가장 큰 흥미는 이것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라는 사실이다. 일단 1980년대 이 후의 대중문화 아이콘들이 총망라된 세계관은 스필버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구니스>나 <백 투 더 퓨처> <슈퍼 에이트> 같은 작품의 원안자, 기획자, 제작자로 참여했던 그 의 전력을 보면 1980년대 아날로그 향수가 강력하게 배어 있는 8비트 비디오게임과 대중문화 아이콘들로 점철된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가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가 단지 그런 문화적 취향만으로 이 영화에 관심을 보였을 리는 없다. 게다가 스필버그는 “<레디 플레이어 원>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로 가장 만들기 어려운 영화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스필버그에게도 온갖 서브컬처까지 죄다 끌어안고 있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관을 스크린에 구현하는 건 대단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의 인장이 곳곳에 박힌 결과물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스필버그가 꾸준히 들여다보고 완성해온 세계관의 총아처럼 느껴질 정도다. 첨단 기술이 지배하는 어두운 디스토피아를 바탕에 둔 세계관은 <A.I.>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소년들의 모험담은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을 비롯해 원안자이자 기획자로 참여한 <구니스>나 제작자로 참여한 <슈퍼 에이트>를, 선의에 대한 본질적인 믿음은 <E.T.>나 <워 호스> <마이 리틀 자이언트>를 비롯한 그의 전반적인 세계관을 관통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스터에그를 찾아가는 여정은 숨겨진 보물을 찾는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는 우리가 상상하기도 전에 미래를 보았다. 여기에는 가장 놀라운 플래시포워드와 플래시백이 함께 진행되고 있고, 우리가 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내가 상상해온 10년여까지의 미래가 포함된 세계관이 반영된 세계처럼 보인다.” 스필버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의 원작자 어니스트 클라인에게 찬사를 보낸 건 스필버그가 클라인이 그린 미래상으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스필버그는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목격한 멋진 가상 세계가 끌어안은 준수한 오락성과 진중한 메시지를 충실히 반영한 양방향의 영화로 완성하고자 했다. “이 영화는 현실 세계에서 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도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대단히 멋진 모험과 경고의 메시지를 함께 담아낸 이야기인 셈이다.” 스필버그는 그렇게 2017년의 관객들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엔터테인먼트로 내달린 동시에 2017년의 관객이 언젠가는 대면해야 될 미래적 고민을 새겨 넣는 방식으로 <레디 플레이어 원>에 접속했다. 

사실 스필버그는 현존하는 감독 가운데서 가장 저평가된 거장일 것이다. 어쩌면 그건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발표한 <죠스> <인디아나 존스> <E.T.> 같은 영화들의 성공으로 일찌감치 할리우드의 흥행 감독 반열에 오른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오락 영화로 한데 묶여 폄하되는 그의 흥행작들은 스릴러, 어드벤처, SF 등 당대의 할리우드에서는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다양한 장르적 시도이자 참신한 결과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전통적인 대가들의 영화를 섭렵하는 영화광이면서도 새로운 기술적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대가이기도 했다. <죠스>에서 처음 죠스가 등장하는 신에서 줌과 트래킹 기법을 동시에 구사한 ‘줌 인 트랙’을 활용했는데 이는 히치콕의 <현기증>을 참고한 것이기도 하다. 또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실험적으로 활용하던 퍼포먼스 캡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스필버그는 할리우드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장 먼저 최적화해 영화에 도입하는 영화 기술의 장인이었다.  


생각해보면 스필버그는 1985년부터 이미 공정한 시각과 탁월한 화술이 담긴 드라마 <컬러 퍼플>을 완성해낸 감독이었다. <쉰들러 리스트>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그가 21세기 이후로 만들어낸 <캐치 미 이프 유 캔> <터미널> <뮌헨> <워 호스> <링컨> <스파이 브릿지> <더 포스트> 등의 작품을 충실히 따라온 관객이라면 스필버그의 세계가 대단히 깊고 유려한 시야를 확보하면서도 보기 드물게 공정한 시각으로 세계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스필버그는 1970년대부터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오며 대중과 호흡해왔다. 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을 연출할 수 있었던 건 1980년대부터 할리우드의 중심을 지켜온 오래된 감독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증명해온 역사가 과거형으로 퇴색되지 않은 채 여전히 그의 이력을 앞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현재진행형의 동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동시대에 구현할 수 있는 최신의 오락적 감각이자 오래된 유산을 총망라해 전시할 수 있는 고전적인 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장르적 쾌감이 혼재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참신한 SF 영화이기도 하고, 은근한 스릴러 이기도 하고, 굉장한 액션 영화이기도 하고,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오아시스 안에 숨겨진 이스터에그를 찾아가는 웨이드, 즉 파시발의 여정은 할리데이가 숨겨둔 마지막 미션이 담긴, 1979년에 발매된 비디오게임 ‘어드벤처’를 통해 종결된다. '어드벤처'는 게임 역사상 최초로 이스터에그를 숨겨둔 게임이었는데 이를 찾아내면 화면상에서 게임의 개발자인 워렌 로비넷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게임 개발자 이름이 명시되지 않는 시대이기도 했다. 사실상 게임의 승패와 무관하게 게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이에게만 허락된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미션을 클리어하고 오아시스를 소유할 권리를 얻은 웨이드에게 할리데이는 말한다. “내가 만든 게임을 해줘서 고맙네.” 이 장면은 어쩌면 스필버그가 자신을 사랑해준 어떤 관객에게 남긴 인사일지도 모른다. 스필버그에 대한 오랜 애정이 있는 팬들은 그 장면이야말로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스필버그가 남기고자 했던 진정한 이스터에그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필버그가 여전히 순수하고 정직하게 세계를 관조하고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최신의 오락이자 영화이자 진심이다. 스필버그는 여전히 소년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나는 그런 스필버그의 영화를 가능하면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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