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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12. 2018

<콜럼버스> 이방인들의 도시

<콜럼버스>는 교감과 치유를 위한 영화다.

서울의 출판사에서 번역 일을 하던 진(존 조)은 아버지가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라는 소식을 듣고 미국 인디애나주의 소도시 콜럼버스의 병원으로 날아온다. 진의 아버지는 유명한 건축학 교수라지만 1년간 왕래가 없었던 부자지간은 남만도 못한 관계다. 어쨌든 그는 깨어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콜럼버스를 떠날 수 없게 된다. 태어난 뒤로 줄곧 콜럼버스에서 살아온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는 동네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유명한 건축가의 제안으로 타지에 있는 대학교 건축학과에 진학할 기회를 얻었으나 약물중독 전력이 있는 어머니를 홀로 남겨둘 수 없어서 꿈을 포기하고 묵묵히 일상을 밀어간다. 그녀는 콜럼버스 곳곳에 자리한 모더니즘 건축물에 대한 지식도 상당하다.


진과 케이시가 만난 건 담배 한 대를 빌리고, 빌려주는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건축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통해 대화를 이어나가며, 서로를 알아간다. 콜럼버스 일대의 현대건축물을 함께 돌아보는 과정에서 낯선 도시의 풍경이 익숙해지듯, 낯선 관계 또한 가까워진다. 그러면서 일상의 저편으로 밀어 넣었던 속 깊은 사연과, 마음 한 구석에 감춰뒀던 상심이 서로에게 조금씩 드러난다. 콜럼버스라는 도시에서 만난 두 남녀의 우연이 필연적인 교감으로 거듭날 때 하나의 풍경에 불과하던 도시가 감정과 정서가 깃든 얼굴처럼 다가오기 시작한다.



진과 케이시는 스마트폰과 폴더폰처럼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꿈을 미뤄둔 케이시와 달리 진은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 케이시는 건축에 대한 관심으로 콜럼버스를 떠날 기회를 얻지만 진은 건축학 교수인 아버지로 인해 콜럼버스에 발이 묶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를 걱정하며 그 곁에 머무는 케이시는 그 중력에서 해방될 기회를 얻고, 아버지를 경멸하며 그 곁에서 멀어지려는 진은 그 중력에 예속된다.


“평생을 보낸 이곳이 달라 보였어요. 딴 세상에 온 것처럼요.” 케이시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무심코 지나쳤던 콜럼버스의 건축물들이 남다른 가치를 품고 서 있던 것임을 깨닫게 된 덕분이었다. 그 깨달음은 케이시의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진은 케이시 스스로 꺼졌다 믿었던 가능성에 숨을 불어넣는다. 반대로 진은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를 다시 체감하는 감옥이나 다름없었을 낯선 도시에서 케이시를 만나 오랫동안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린다는 것을 느낀다. 한쪽은 꿈으로 나아갈 기회를, 또 한쪽은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인생과 관계의 이방인이었던 삶을 정리하고 회복해나간다. 우연히 맞닿은 두 사람의 일상이 각자의 인생을 흔드는 순간으로 거듭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바라보게 만든다. 콜럼버스는 그렇게 그들의 교감과 치유를 바라보는 기회의 땅이 된다.


<콜럼버스>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 코고나다의 첫 연출작이다. 그는 당일치기 여행으로 우연히 들른 콜럼버스에서 목도한 현대건축물들을 보고 이 영화를 구상했다. 엘리엘 사리넨과 에로 사리넨, 제임스 폴, 데보라 버크 등의 건축가들이 세운 미국의 현대건축물들은 <콜럼버스>를 수식하는 탁월한 미장센이자 그 누구보다 명확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대칭과 수평의 구도로 단정하고 정갈하게 담아낸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차분해진다. 애틋한 여운을 남기는 존 조와 헤일리 루 리처드슨은 깊은 인상으로 기억될 만하다.



('에스콰이어' 2018년 5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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