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Dec 22. 2015

<굿 다이노>를 보고

영리한 감성과 순수한 이성의 조화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굿 다이노>를 봤다. 상당히 낙천적인 작품이다. 농사를 짓는 초식공룡과 소를 키우는 육식공룡이 공존하는 세상이라니. 물론 양아치 같은 랩터와 익룡도 등장한다만. 너무 순수해서 마음을 무장해제시키지만 가끔은 너무 순진해 보여서 마음을 마냥 내놓기 어려운 지점도 있다. 하지만 그 끝에 다다라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는 클라이맥스를 만나게 된다. <업>에서 풍선에 매달려 날아가는 집과 이별하는 할아버지의 그 마음 같은 순간이 있다. 이 정도 펀치면 만만하겠다 생각하며 11라운드를 뛰었는데 12라운드 막판에 제대로 꽂힌 한 방에 무릎이 꺾이는 느낌. 정말 울컥했다.


이토록 낙천적인 세계관의 설계가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다. 영화는 ‘6500만년 전’ 지구를 지나쳐가는 유성과 이를 무심히 지켜보는 공룡들의 풍경으로 시작하고 ‘그 후로 몇 백만 년 후’라는 가상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6500만년 전은 지질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이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해 공룡을 비롯한 지구상의 생물 대부분이 멸망했다고 주장하는 중생대 백악기와 신생대 제3기 사이의 시간대다. 물론 가설이다. 어쨌든 영화는 유력하다고 주장되는 가설을 무심하게 빗겨가는 가상의 세계를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대단히 흥미로운 발상이다. 공룡이 멸망하지 않았고, 그렇게 멸망하지 않은 공룡은 나름의 방식으로 농경과 수렵, 목축의 삶을 영위하는 진화를 거쳤다는 가설. 그렇다면 이 세계는 그렇게 낙천적인 것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대단히 흥미로운 세계관 설계다. 그런 이해 안에서 농사를 짓는 초식공룡과 목축을 하는 육식공룡은 의인화된 캐릭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진화된 개체다. 그리고 마치 강아지처럼 으르렁거리고 헥헥거리는 인간 아이의 모습 또한 그 접점에서 설명이 된다. 대단히 순수한 발상이지만 그 발상을 눙치듯 제시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스케치를 마련한 뒤 상상력을 최대한 채색해낸다. 영리한 감성과 순수한 이성의 조화로움. 정말 마음에 든다.  

거의 실사처럼 보이는 풍경 묘사가 인상적이다. 영상에 세심히 공들인 티가 난다. 마치 이 세계관이 마냥 뻥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마냥 그렇다. 그 사실적인 풍경 위로 두려움을 견디고 성장하는 캐릭터들을 사랑스럽게 세워 넣는다. ‘두려움을 이겨냈을 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단다’라는 메시지를 담아낸 서사와 그 서사를 밀고 나가는 서로 다른 두 존재의 여정은 끝내 사랑스럽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온기와 서로 다른 존재가 공존하는 이 세계의 관대함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와 이별을 견뎌내는 성숙함. 이 모든 것이 원형 그대로 녹아있다는 것을 그 끝에서 깨닫게 된다. 때론 순진할 지라도 그 원형을 목격하고 동감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본편을 상영하기 전 단편이 하나 등장하는데 이번 단편은 무성영화의 형식성을 최대한 살린 그 동안의 단편들과 달리 유성영화의 형식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슈퍼히어로를 좋아하는 인도계 소년이 아버지가 모시는 힌두교의 신인 학살의 신 두루가, 유지의 신 비누슈, 봉사와 헌신의 신 하누만을 슈퍼히어로에 대입하는 꿈을 꾸는 이야기인데 시각과 청각이 입체적으로 어울리는 공감각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도입부에서 ‘이것은 대부분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다(Based on a mostly true story)’라는 자막이 뜨는데 단편이 끝나고 감독인 산제이 파텔과 아버지의 사진이 뜬다. ‘대부분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란 결국 자신의 유년시절을 모티프로 만든 이야기란 말일 텐데 나는 이것이 대단히 감동적인 위트라고 느꼈다. 생각했다가 아니라 느꼈다. 결국 이건 꿈에 관한 이야기이자 자기 꿈을 이룬 자의 뒤늦은 감회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름답다.


이토록, 픽사는 언제나 나를 매혹시킨다. 정말 픽사가 좋다. 이토록 훌륭한 방식을 고수할 수 있는 창작자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이 확실히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아직까진 살만한 세상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물론 내가 누구보다 잘 매혹되는 인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나는 최소한 그 누구보다 하루라도 더 감동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일 테니, 그럼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언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