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

<아무르> 미카엘 하네케, 2012

by 김현빈

우리는 문이라는 장치를 성벽처럼 여겨 그것이 반드시 보금자리를 지켜주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이 뚫린 후에도.



영화 <아무르>의 시작은 교양 있는 피아노 연주회에서의 사교를 마친 주인공 노부부를 보여준다. 연주자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여주인공 안느. 바쁘고 시끌벅적하던 사회에서 돌아와 정적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그들은 대문이 강제로 열어젖힌 흔적을 발견한다. 강도가 든 듯하지만 이렇다고 할 피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안느는 불안해하지만, 남편 조르주는 덤덤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대한다. 안느의 계속되는 걱정을 잠재우며 술을 한 잔 더 하겠냐고 묻는 조르주. 피곤하다는 그녀의 말에 본인은 한 잔 더 하겠다는 말을 붙이고 그녀에게 제자가 자랑스러우냐 묻는다. 대답을 듣기 전에 쇼트는 끝이 난다.

본문에서 집중하여 다루는 대문 쇼트


이 쇼트는 대문 옆 복도에 거의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집안에서 복도를 아이 레벨보다 조금 낮게 조망하는 카메라는 그 좁은 화각으로만 집 일부를 보여준다. 집의 넓이에 비해 그들의 공간은 좁게 느껴진다. 대문이 오른쪽 절반을 차지하며 가장 크게 배치되어 있고 화면의 깊이에 따라 옷장과 화장실로 그들의 동선을 비춘다. 그 너머에는 또 한 겹의 어두운 공간이 있다. 대문과 집안의 벽 장식들이 화면을 수직으로 강하게 가르고 있다. 특히 교묘하게 배치된 복도의 세로 턱이 화장실과 그 너머의 입구와 겹쳐 각 장소의 진입은 프레임 아웃의 효과를 만들게 된다.


그들이 돌아와 침입 된 문을 대하는 태도를 기점으로 그들의 동선은 빠르게 분리된다. 조르주는 외투를 걸고 신발을 정리하며 복도에 머무는 동안 안느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며 카메라를 이탈한다. 목소리로만 전해지는 그녀의 말은 자신의 친구도 이러한 침입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내용이다. 조르주는 자신들의 경우와 다르게 전문 털이범들의 소행이라 차치하며 이미 화면상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향해 '오늘 유난히 예쁘다고 내가 말해던가?'며 칭찬을 한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 세로로 분리된 벽을 향해 말하는 듯하다. 뭐, 잘못 먹었냐는 그녀의 부끄러운 반응에 그는 뒤돌아서며 보이지 않던 복도 너머의 불을 켜며 그 안으로 진입한다. 둘 모두가 카메라에서 벗어난 채로 그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대답을 듣기 전에 그들의 수면 시간으로 화면은 전환된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로 침대에 앉아서 불안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안느. 왜 그러냐는 조르주의 말에 아니라고 할 뿐이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식사 중 급격한 마비 증세에 빠진다. 그 뒤로 그녀는 조금씩 몸과 정신의 기능을 잃어간다. 이 뒤로 그들의 외출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생활이 정지된 것이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문 내부에서만 그들의 생활이 이어진다. 집 곳곳에는 여러 대자연을 나타내는 듯한 풍경화가 걸려있다. 마치 해방을 원하듯이.


때때로 병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근미래에는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저 '원인 불명의', ’불치병' 등으로 통틀어지며 그저 그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병이 있다. 인과 관계를 이을 수 없을 때 인간은 가장 고통을 받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정말 인과가 없는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고통을 줄여야 하나?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우리는 어찌 막아야 했는가. 나는 이 초반 쇼트가 영화의 기본 설정을 이러한 상징으로 은유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침입이란 언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의 의지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충격. 그것이 하필이면 그들에게, 더욱 상황을 걱정한 안느에게 닥쳐온 것뿐이다. 이 쇼트에서 화면 구조상 나뉘어버린 소통 순간의 단절과 동선의 분리는 발병 이후에 갈라지는 그들의 상황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러한 은유는 영화 후반에 몇 차례 더 반복되며 강화된다. 대문을 제외한 집 내-외부의 통로는 창문이다. 조르주는 창문을 통해 느닷없이 집안에 들어온 비둘기를 발견한다. 처음엔 비둘기를 내쫓는 데 꽤 애를 먹는다. 그러나 작중 후반 조르주의 결심 이후 다시 한번 들어온 비둘기를 그는 담요로 덮어 잡은 뒤 감싸안는다. 본인의 몸을 일으키는 데에도 한참이 걸리는 그의 불편한 거동에도 비둘기를 내쫓는 것이 아닌 안아주는 것으로 끝난다. 이 쇼트는 그와 안느를 나타내는 듯하다. 외부로부터 침입한, 어떤 악령의 소행이라고도 말하고 싶은 병세. 그로 인해 변해버린 아내. 영문을 모르는 비둘기. 이러한 내외부를 기준으로 한 사건은 다시 한번 초반부 쇼트의 대문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에서의 비둘기가 가지는 유해조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연결 짓고 싶지 않은 관계임에도 말이다. 특히 영화 초반 안느가 보여줬던 품위와 문화적인 모습은 이런 비유물과의 존엄성 차이를 크게 하며 불쾌한 안쓰러움을 생성한다.


해당 쇼트에서 프레임 아웃된 안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는 병세에 의해 사람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감독이 바라본 표현과도 일치한다. 영화에 묘사된 병과 정확히 일치하는 병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운동과 인지능력이 동시에 감소 한다는 측면에서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둘이 병행된 모습 같다.) 이런 부류의 병은 한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간다. 마치 원래의 사람이 어디론가 사라지듯 말이다.

운동성을 잃게 되면 그의 직업적 또는 취미 성 생활이 중단된다. 유능과 유희를 빼앗기는 것이다. 인지가 저하되면 존엄이 떨어진다. 언변과 식사, 청결 등에서의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온전했던 안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조르주 앞에 있는 안느는 분명 안느지만, 화면 밖으로 사라졌던 이후, 마치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감독은 이후 두 번, 건강한 그녀를 다시 영화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녀가 연주를 녹음해 둔 피아노를 들을 때나, 조르주 혼자가 되었을 때 상상 속에서 그녀는 바르게 정돈된 머리와 총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한평생을 보았던 모습임에도 무척 그리운 모습이다. 이러한 침습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조르주가 어떤 일이든 못하였겠는가. 단지 우리는 방법과 의미를 제때 모를 뿐이다.


이따금 이 대문 쇼트를 생각하면 그들이 누구를 탓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든다. 침입자는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도 아닌 그저 악운이라는 것이라면 탓할 곳 없는 우리는 어찌 슬픔을 견뎌내야 할까. 나는 다만, 미리 더 강한 고리를 걸어두지 않은 조르주나 이런 일이 가능케 두는 신을 탓할 마음이 없다. 그저 일어나는 일들에도 사랑을 표할 방법을 알아두고 싶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이 혹여나 조르주의 비정함과 안느의 유약함을 탓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보다 조르주가 안느에게 해준 옛이야기와 그녀를 오필리아로 만들어준 장례식, 혼자 남은 그와 함께 외출하는 안느의 다정함을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의 대문 또한 언제고 열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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