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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빈 Nov 15. 2024

젠장 다들 이게 괜찮은거야?

코뿔소 (1959, 외젠 이오네스코)

집단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과정을 코뿔소로 변하는 것에 비유한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적 작품.


책은 140여쪽으로 굉장히 짧다. 또 연극 각본의 형식으로 각 인물 별 대사 집에 가깝기 때문에 실질적 내용은 더 짧다고 할 수 있다. 완독에 한시간 이하 예상. 문체나 단어도 쉬워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시대적 배경은 현대적이나 다소 시간이 지난 약 80년대의 한국을 보는 듯 하다. 회사의 직급 체계와 마을 사람들간의 관계가 그러한 느낌이다.

인물들의 대사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보통의 대화라기엔 선보이는 듯 과장된 말투와 문장을 읊듯 경직된 어투가 그러하다. 실제로 연극을 염두에 둔 각본집이라 매 장 마다 무대의 외관과 장치를 설명해주는 부분을 읽고 눈 후라면 자연스레 이 모든 이야기를 연극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소개글에 거의 드러난다.

평범한 마을에 난데없이 코뿔소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만 누구도 실리적인 논점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개중에 가장 그럴싸 해보이는 주장에게 힘이 실릴 뿐 코뿔소가 나타났다는 사건에는 아무 영향도 대응책도 마련되지 않는다.

그러다 사람들이 하나 둘 코뿔소로 변해하고 이것이 전염성이 있는 것인지, 선택에 의해 변형되는 것인지, 애초에 이런 현상이 가능이나 한것인지 따질 틈도 없이 인구의 대부분이 코뿔소로 변해버린다.

사회 구조는 무너지고 사회 부적응자로 비춰지던 주인공과 짝사랑의 대상이던 여자만 인간으로 남는다.

끝내 여자 또한 코뿔소가 되는 길을 택하고 주인공만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겠다는 다짐으로 극은 끝을 맺는다.


저자의 아버지는 나치 이데올로기에 협력하였다고 한다. 저자의 배경에서 쉽게 알 수 있듯 코뿔소가 되는 일은 전체주의의 광기가 세계를 휩쓴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시사한다.

전체주의가 확산할 하였던 데에는 집단에 속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당장 나의 행동의 선악을 구분하는 것 보다 주변의 시류에 몸을 맡겨 저항을 받지 않는것이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우리 시민들의 선택에 대입하여도 동일한 고민이 생긴다.

나에게 물리적, 생존적 위협이 체감될 때, 과연 우리는 선악을 따질 여력이 있는가? 선악을 판별하는 나의 주장에 스스로 신뢰할 수 있는가? 그 선택으로 나의 삶이 파괴될 때에도 나의 정신이 강경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선택은 비이성적이고 무모하다. 그러나 그런 정신이 완전히 소멸해왔다면 현대의 인류가 공통적으로 옳다고 믿는 가치는 보존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역사 속 그 인물들의 으스러짐을 신성하게 생각한다. 따갑게 마비되어가는 집단적 편승에 계속해서 씨앗을 심어두는 것이 소설 코뿔소의 ‘최후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런 이들이 모두 성자인가?

세계가 으스러지고 누구나 눈을 감고 다니는 시기에 홀로 손을 들어 여길 바라보라 외치고, 주변 사람들의 머리를 후려갈기며 붙잡는 그들. 머리에 총구가 들이대지고 잠에 들면 칼 끝이 파고드는 세상에서 온 정신을 유지하고 움직이는 그들의 강경함은 정신 이상 수준이다. 그들 중 일부는 평화로운 시기에 살았다면 성자로서 기억되기 보다 오히려 괴짜, 고집불통, 사회부적응자로 비춰지지 않을까? 저항해야할 만큼 거대악이 없다면 그저 빗나가는 사람으로 비춰지니까. 코뿔소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인물로 채택되었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계몽의 빛을 뿜어내는 성인이 아니라 친구와 사회에게 늘 핀잔을 듣는 부적응의 인물로서 말이다. 여기서 작가가 바라보는 인류애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데올로기에 온전히 파멸되지 않아야 할 인간성을 외침과 동시에 그 인간성이 특별하고 뛰어난 자만이 가진 것이 아님을 이러한 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인류애라는 것은, 모두가 쉽게 느낄 수 없고 소수의 성자만이 감지하여 모두에게 설파되는 특수하고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당장 사회의 흐름도 좇지 못하고 어렴풋이 살고 있는 아무개에게도 있는 것이며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만을 의식해 집단주의 속에 쉽게 잊혀질 수 있으나 그것보다 더욱 우선시 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작가의 선택으로 나는 위태로움을 느낀다. 누구보다 강하고 코뿔소 떼 마저 홀로 막아낼 수 있는 영웅적 인물이 아니라, 그의 짝사랑 조차 멋지게 비춰지지 않는 주인공의 외침으로 최후의 인류애가 남았을 때. 심지어 그 결심의 직전까지도 코뿔소가 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고민하던 때에 나는 인간성이라는 희망의 씨앗이 코뿔소들에게 심어질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너무도 약해서 짓밟혀 깨지는 소리마저 나지 않는다면 인류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코뿔소들의 세상이 될 것인데 다시 그들이 인간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 어느 한 코뿔소라도 남루하는 주인공을 보며 인간으로 삶에의 가치와 미덕을 떠올리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까.


그러나 결국 세상을 휩쓴 이데올로기는 더 큰 결집으로 진압되었다. 세상엔 최후의 인간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인간이 남아있었고 그들은 코뿔소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작은 마을에 그들을 불러온 것이 주인공이 최후의 인간으로서 한 일일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정말 모두가 코뿔소가 된 것이라면 나는 이것을 광기에 사로잡힌 인류가 아니라 문명의 발전을 이룩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전의 세대와는 마치 다른 종이 된 것 만큼 거대한 변화를 불러온 순간들이 우리 삶에도 있다. 스마트폰과 AI의 발전이 그러하다. 그렇게 바라본다면 코뿔소는 살갗이 두껍고 부드럽지도 않으며 창백한 회색빛에 뿔이 달렸지만, 인간보다 월등히 강한 근력과 생물적 강인함을 가지고 그들끼리의 코뿔소어로 소통하는 신인류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 흐름에 따라가지 않은 주인공은 외로운 옛 사람으로 남겠다.




+

내 삶의 시대 속에서는 아직 코뿔소 병 만큼 시대를 휩쓰는 증상이 없다고 느낀다. 아니 어쩌면 느끼지 못하는 것이 코뿔소 병의 증상과도 같고 나는 이미 코뿔소일지도 모른다. 주변 모두가 이미 부르르 입술을 떠는 거친 코뿔소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타인을 증오하는 시대다. 얼굴을 트고 실존한다고 느낀 상대가 아니라면 그 가상의 인물의 인격과 삶은 얼마든지 으깨지더라도 당장의 씹을 거리로 바꿀 수 있는 시대다. 친구들이 서슴치않고 누군가에게 칼을 찔러넣고 돌아서 다시 칼을 벼르고 있는 모습을 모았을 때 나는 섬뜩함을 느낀다. 그러고 집에 와보면 내 손에도 피가 있고 이미 나도 몇명은 죽였다. 이제라도 나는 최후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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