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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둥빠 Jan 08. 2021

무스펙 늦깎이 대학원생의 취업 준비

12년이라는 시간의 무게

20대는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위해 10년 가까이 고시를 위해 투자했다. 결국 실패했다. 30대는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동생의 결혼 준비로 가정불화가 심각해지면서 미국 유학도 포기했다. 또 실패했다. 내 실력,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30대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다. 신세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석사 졸업 논문을 쓰며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석사 논문과 취업 준비를 동시에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시 준비, 미국 유학 준비로 취업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흔한 한국사, 컴퓨터 활용능력 같은 자격증 하나도 없었다. 흔히 말하는 스펙이 제로였다. 그 와중에 하필 논문 주심 교수님이 엄청 프라이드가 강하시고 깐깐하시기로 소문난 분으로 정해졌다. 취업 준비는커녕 논문 준비도 산으로 갔다. 논문 써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최종본을 완성하고도 몇 번을 뒤엎었는지 모르겠다.     


주심 교수님께서 내 논문에 도장을 안 찍어주시려고 했다. 지도 교수님은 괜찮다고 하셨는데 주심 교수님이 완강하셨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 해서 마음이 급한데 주심 교수님은 이런 허접한 논문에 본인 도장을 찍어서 내보낼 수 없다는 주의였다. 물론 내 생각에도 많이 부족한 논문이었다.     


같은 주제인데 이론 틀만 바꿔서 세 가지 버전의 논문이 나왔다. 8개월 동안 준비한 첫 번째 버전을 만드는 것도 힘들었는데 마지막 2~3주 동안에만 논문의 이론 모형을 두 번이나 갈아엎었다. 이제 제출해야 하는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그날까지 내 논문을 넘기지 않으면 나는 대학원을 졸업할 수 없었다. 한 학기를 강제로 더 다니면서 논문을 다시 준비해야 했다. 며칠을 날을 새서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주심 교수님을 찾아갔다. 불쌍한 척을 했다. 드디어 주심 교수님의 도장을 받았다. 보통 석사 논문을 이렇게까지 쓰는 경우는 없다. 박사 논문도 아니고 이렇게 갈아엎고 세 가지 버전으로 준비하고 막판까지 애태우는 경우는 많이 없다. 주변 동기들을 봐도 이 정도로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동기들로부터 위로는 많이 받았다. 위로를 가장한 동정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석사 졸업장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정말 고통스럽게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는 조금 힘들긴 했지만 돌이켜보니 이때 또 실력이 한 단계 올라갔던 것 같긴 하다.     


졸업은 했는데 백수가 되었다. 논문 준비하느라 취업 준비는 거의 못했다. 8월 말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보니 바로 하반기 취업 시즌이 시작되었다. 일단 공공기관 취업으로 방향을 정했다. 공공기관은 워라밸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고가 나오는 대부분의 공공기관에 지원했다. 서류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나이가 많아서 떨어지나?
전공이 행정학이라 그런가?
나는 경제학을 잘하는데...
서류에는 경제학 잘한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네...
그래도 나름 석사인데... 왜 떨어지는 거야?!!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서류 합격률은 50%가 조금 넘었던 같다. 주변에서는 그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또 위로를 해줬지만, 서류에서 몇 번만 떨어져도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다. 웬만한 취준생들은 다들 경험했을 거다.     

더군다나 나는 흔히 말하는 스펙이 없었다. 다들 한 번씩 하는 해외연수를 다녀온 적도 없고 이제 겨우 토익, 토익 스피킹, 컴퓨터 활용능력, 한국사, 한자 등 자격증을 하나씩 준비하는 단계였다. 스펙 제로의 31살 늦깎이 취준생이었다. 자존감이 다시 점점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이렇게 취업도 실패하나?


나는 취업은 아예 생각을 안 하던 사람이었다. 비록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은 했지만 고시 공부를 10년 동안 하면서 5급 사무관을 꿈꿨고, 고시를 접은 후에는 원래 내가 바랐던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이유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20살 이후 12년 동안 취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취업 시장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9월 어느 날 A 공공기관의 신입사원 모집공고가 떴다. 나한테는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놈) 회사였다. 알아보니 나름 메이저 공공기관이라고 한다.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지원했다. 지원하니 바로 1차 시험을 보러 오라고 했다. 1차 시험은 필기였다. 경제논술과 직무 논술을 봤다. 그 회사에는 별로 입사할 생각이 없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갔다.     


경제논술 시험 문제를 보니 고시 준비를 하면서 했던 경제논술에 비해 평이한 편이었다. 술술 써 내려갔다. 직무 논술도 고시의 PSAT를 통해 지문을 파악하고 대학원에서 작성했던 보고서 형태를 접목해서 쓰면 되는 문제였다. 별로 어렵지 않게 서술할 수 있었다.     


얼마 뒤 1차 통과라는 연락을 받았다. 2차는 영어 회화 면접이라고 했다. 10월 중순 정도였다. 근데 메이저 금융권 공공기관 1차 시험 날짜인 A매치 데이와 겹쳤다. 나는 당시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 서류도 통과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1차 시험을 보러 갈 수도 있었다. 근데 나는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이 그냥 좀 특이한 은행인 줄 알았다. 둘 다 은행이니 입행하면 카드 같은 것을 팔아야 하는 줄 알았다. 정말 무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은 우리나라 최고의 정책금융기관이라고 한다. 연봉도 다른 공공기관들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라고 했다. 이래서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두 은행의 1차 시험과 A 공공기관의 2차 영어회화 시험 날짜가 겹쳤다. 은행은 카드 팔아야 되는 줄 알았던 나는 A 공공기관 2차 영어회화 시험을 보러 갔다. 카투사에서 영어를 좀 해둔 게 있어서 또 그냥 가서 대충 봤다. 3차는 직무적성, 인성검사였다. 적성검사는 행정고시 1차 과목인 PSAT의 쉬운 버전이었다. 인성검사는 일관성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둘 다 쉬운 문제였는데도 나는 또 다 못 풀었다. 나는 지문 읽는 속도가 굉장히 느리다. 그래서 고시 1차 시험도 다 떨어진 거다. 3차는 인정석은 문제를 다 못 풀어서 큰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최종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을 받았다. 정답률이 좋았나 보다. 아무튼 별로 관심이 없던 회사여서 홈페이지도 안 보고 면접을 보러 갔다. 슬슬 재수가 없어지려고 한다.     


면접은 세 단계로 나눠서 봤다. ① 발표 및 토론 ② 실무진 블라인드 면접 ③ 임원 면접이었다. 발표와 토론은 학부, 석사 과정 때 수도 없이 많이 했다. 행정학 전공은 원래 발표와 토론 수업이 많다. 즉석에서 30분 만에 발표 자료를 만들어 발표하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원래 하던 대로 도표 같은 거 좀 그리고 키워드만 넣어서 발표했다.     

실무진 블라인드 면접은 모르는 질문이 종종 나왔다. 그냥 모른다고 답한 것도 있었다. 씩씩하고 자신 있게 답변했다. 임원 면접은 말할 기회가 1~2번 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순발력을 발휘해서 좋은 대답을 했다. 이렇게 모든 전형을 1달 반 정도 만에 모두 진행됐다. 순식간에 지나갔다.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었다. 나도 엄청 열심히 준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근데 합격했다. 나는 원래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에 가고 싶었다. 여행 가는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공항에 온다. 공항 시설도 굉장히 쾌적하다. 막연하게 인국공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대학원에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다니시는 분이 석사과정을 하고 계셔서 물어볼 기회도 있었다. 현직자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인국공은 매력적이었다.      


인국공은 1차 시험이 시작도 안 됐는데 A 공공기관은 최종 합격자 발표까지 끝나고 신입사원 교육받으러 오라고 했다. 일단 합격은 했는데 내가 가려고 했던 회사가 아니라 살짝 고민은 됐다. 그래도 다른 회사들의 서류 광탈로 자존감이 떨어져 있어서 인국공을 포기하고 A 공공기관에 입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하나도 준비 안 하고 어처구니없게 A 공공기관에 들어간 이야기를 하면 욕하기도 한다. 자랑하냐고. 나름 이름이 알려진 회사였다. 나를 욕하는 사람들은 내 시간의 무게를 모르는 것이다. 과정보다는 결과만 본 것이다.                 


< 파블로 피카소의 시간 >

아름다운 한 여인이 파리의 카페에 앉아 있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가와 자신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했다. 피카소는 몇 분 만에 여인의 모습을 스케치해 주었다. 그리고 50만 프랑(약 8,000만 원)을 요구했다. 여자는 놀라서 항의했다. 

" 아니,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는 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그러자 피카소가 대답했다.

"천만에요. 나는 당신을 그리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출처 : 『성과를 지배하는 바인더의 힘』


피카소가 단 몇 분 만에 스케치하기 위해 40년간 찢어낸 화폭의 종이 무게와 처절했던 시간의 무게를 여인은 짐작조차 못한 것이다. 나는 A 공공기관에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간 것이 아니다. 10년간의 고시 생활과 2년 동안의 대학원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실력이 쌓여서 가능했던 것이다. 남들은 1~2년 하는 취업 준비를 나는 12년 동안이나 했다.      


대학 입시 실패 2회, 고시 실패 2회, 어깨 부상 3회 등 학창 시절의 수많은 실패를 이겨내고 12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거쳐 나는 결국 메이저 공공기관 취업에 성공했다. 12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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