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운둥빠 Jan 17. 2021

한 동안 내 욕은 "쌍둥이 낳아라"였다

지옥을 경험하다

이직을 포기하고 원래 다니던 직장을 더 다녀보기로 결심했다. 시간이 지나도 매한가지였다. 회사는 역시나 힘들었다. 우리 부부는 내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결혼 후 1년이 지나도록 임신 소식은 없었다. 2년이 가까워지자 아내도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다. 병원도 가봤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한다. 내 회사 생활이 문제인 것 같았다.


결혼 후 만 2년 정도 되는 시점에 어렵게 아내가 임신했다. 그렇게 아이 가지는 것이 힘들었는데 한 번에 두 명이 생겼다. 쌍둥이라고 한다. 쌍둥이는 단태아보다 모든 위험성이 2배나 올라간다. 호르몬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임신 기간 동안 아내는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소양증(몸이 가려운 증상)에 걸려 잠을 못 잤다. 소양증 때문에 간이 된 음식도 못 먹었다.     


소양증이 조금 가라앉으니 임신 당뇨에 걸렸다. 또 음식 조절을 해야 했다. 매일 미역 줄기 같은 것만 먹었다. 초장, 된장도 없이 생미역 줄기와 다시마 등 해초류를 삶아 먹었다. 매 식사 후에는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당 체크를 했다. 그리고 30분 이상 걸어야 했다. 당 수치가 올라가면 쇼크가 와서 산모와 태아 모두 위험하다고 한다.

 

배가 부풀어 오르는 속도도 엄청 빨라고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밤에는 잠도 한숨도 못 잤다. 임산부는 다들 그런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쌍둥이 안 가져 본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다. 남자인 내가 글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내는 37주까지 정말 힘들게 뱃속의 아이들을 잘 키웠다. 마침내 무사히 쌍둥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술도 하지 않고 자연분만으로 쌍둥이를 낳았다. 아내에게 정말 감사했다. 쌍둥이가 태어난 지 일주일 되는 날, 회사 인사팀과 면담을 했다.


ㅇㅇ씨, A 국가에 가야겠어.

회사에서는 나를 정말 살기 힘든 이상한 나라로 발령을 내려고 했다. 아니 그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왜 하필 거기인가?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지만 쌍둥이가 일주일 전에 태어났습니다. 장모님께서 같이 가셔야 하는데 A국은 가족 비자가 안 나오니 거기만 빼고 보내주십시오.


장모님도 같이 가실 수 있습니다. 장모님도 비자 나옵니다.


인사팀 담당자는 장모님 비자도 나온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국가는 장모님한테는 비자를 안 준다고 들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쌍둥이가 이제 막 태어났는데 진짜 그런 나라를 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 발령이 났다. A 국으로 가라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난리가 났다. 청와대에 민원을 넣으시겠다고 했다. 부모님을 뜯어말리느라 너무 힘들다. 쌍둥이가 이제 막 태어났는데 A국을 가라니... 인사팀에서 장모님 비자가 나온다고 했으니 장모님 비자도 함께 신청했다. 돌아온 답변은 장모님은 비자가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런.......... ㅆ~~~삐~~~~


진짜 쌍욕 할 뻔했다. (참고로 나는 15살 이후로 욕설, 비속어를 쓰지 않는다.) 욕이 나올 정도로 열이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양가 부모님께 쌍둥이를 맡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본가는 지방에 있는데 우리 부모님께서는 거동도 불편하신 90세가 넘은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직도 직장 생활을 하고 계셨다. 처가는 하필 그 타이밍에 장인어른께서 일본으로 발령받아서 해외 이사 중이었다. 한국에 맡겨 놓고 갈 곳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쌍둥이를 데리고 다 같이 A 국으로 가기로 한다.


신생아 쌍둥이를 돌보는 것도 힘든데 해외이사 준비까지 하느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2달을 보냈다. 이 와중에 회사 업무도 떠나기 전날까지 했다. 지옥 같은 A국으로의 이주 준비를 마치고 우리 네 가족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쌍둥이가 태어난 지 8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쌍둥이를 데리고 1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탈 자신이 없었다. 내 돈을 내고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했다. 회사에서는 이코노미 클래스만 제공해 준다. 신생아 두 명을 데려가야 하니 수화물 개수도 모자랐다. 우리 이삿짐은 배로 2달 뒤에나 A국에 도착한다. 300만 원도 넘게 개인 돈을 들여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했는데... 10시간 내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갔다. 비즈니스 클래스 기내식도 못 먹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탔는데 밥도 못 먹고 쌍둥이를 안고 서서 갔다. 우리 둥이들이 너무 울었다.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남들은 즐긴다는 비즈니스 클래스의 비행을 우리 부부는 죽기 살기로 버티면서 갔다. 도착하니 새벽 3시 정도였다. 나와 아내는 둥이들을 한 명씩 가슴에 붙이고 가방을 메고 캐리어를 밀며 입국장으로 나갔다. A국은 입국 수속을 하는 것부터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한국과 달리 서비스 마인드가 전혀 없었다. 수속 심사를 하는 직원 옆에 다른 동료가 오면 서로 볼 뽀뽀를 해대고 둘이 떠들어 댔다. 사람들이 기다리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자기들끼리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연히 수속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2시간 정도 걸렸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회사 상사께서 마중을 나와 계셨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임시로 머물게 될 게스트 하우스로 갔다. 게스트 하우스는 정말 열악했다. 한국의 게스트 하우스를 생각하면 안 된다. 방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작은 복도도 하나 지나가야 했다. 응가를 자주 하는 신생아 쌍둥이들을 씻기는 것도 힘들었다. 70년대 건물 같은 느낌이었다. 

    

하루 휴식을 취하고 바로 출근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해외 생활을 처음 하는데 그것도 쉬운 나라도 아니고 A국이라는 어려운 나라였고 업무도 파악해야 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다행히 모셨던 직장 상사가 좋은 분이었다. 저녁 6시만 되면 빨리 퇴근하라고 하셨다. 가서 쌍둥이들 돌보라고 등을 떠밀어 주셨다. 본사에서는 매일 야근했는데 6시에 퇴근하려니 어색했다. 그래도 아내가 쌍둥이들을 혼자 돌보고 있어서 얼른 가야 했다. 후다닥 정리하고 퇴근해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면 아내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바로 눈물을 터뜨렸다.


나 못 하겠어.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한다. 아내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게스트 하우스 방 안에서 하루 종일 쌍둥이들과 전쟁을 해야 했다. 가슴에 한 명, 등 뒤에 한 명을 붙이고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봤다고 한다. 내가 언제 퇴근하고 올지 하루 종일 나만 기다렸다. 그러다 내가 퇴근하고 들어오면 바로 울음이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워.


아내는 해가 밝아오는 것이 무섭다고 했다. 내가 출근하고 없는 낮 시간이... 나도 퇴근하고 오자마자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한 명을 들쳐 안았다. 그때부터 밤새 쌍둥이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회사에서의 퇴근은 쌍둥이 전투 육아의 시작이었다. 우유 먹이고 트림시키고 똥 닦아 주고... 동시에 일어나면 동시에 일어나는 대로 한 명씩 번갈아 일어나면 번갈아 일어나는 대로 너무 힘들었다. 특히, 둘째는 등 센서가 달려서 등만 대면 울었다. 둘째가 울면 첫째도 같이 울었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출처 : Pixabay

하루에 2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2시간도 통잠이 아니다. 10분, 20분 정도의 쪽잠이었다. 밤새 쌍둥이들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내와 내가 쌍둥이들을 한 명씩 안고 방과 복도를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으며 재우기를 시도했다. 나도 출근해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쌍둥이들을 돌보니 죽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나는 차라리 회사가 편했다. 내 품에 3kg짜리 생명체는 없으니까. 최소한 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1년 넘게 하루에 2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그때부터 평생 안 마시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버틸 수가 없었다. 진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동안 많은 실패를 겪으며 힘든 일에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쌍둥이 육아는 차원이 달랐다. 교통사고, 고시 생활, 마라톤 이런 건 쌍둥이 육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의 총합보다 더 컸던 것 같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냥 힘든 정도가 아니라 죽을 것 같았다.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다. 진짜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허리도 이 시기부터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다. TV에서 보여주는 쌍둥이 육아는 다 허상이다. 절대 그런 영상이 나올 수가 없다. 그 시절 나는 누가 밉거나 욕을 하고 싶으면 속으로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쌍둥이 낳아라.



작가의 이전글 철밥통 공공기관의 실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