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과학도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칼란드리아 Oct 19. 2022

김상욱 <떨림과 울림>


김상욱 교수님은 국내 물리학자 중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진 분인 것 같다. 대중강연도 많이 하셨고, TV나 미디어에도 많이 출연하셨다. 물리학 관련 토크에서 연자나 게스트로 초대되는 경우도 많아 친숙한 느낌도 든다. 본인이 그런 일을 하기도 하지만 물리학회 차원에서 물리학의 대중화를 위해 추진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도 한국물리학회 회원이긴 하지만 학회를 가지 않으니 실제로 안면이 있진 않지만 그런 친숙함 때문인지 잘 아는 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김상욱 교수님은 이렇듯 물리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계신다. 또한 물리학 관련 책도 여러 권 냈는데 <과학하고 앉아있네> 3, 4권을 예전에 읽었고, 얼마 전에 <떨림과 울림>도 읽어보게 되었다. 


방송 등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김상욱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문체나 어조 자체도 그런 느낌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제목에서의 '떨림'과 '울림'은 물리학 지식이 있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용어들이다. 더 익숙한 용어로 바꿔보면 '진동'과 '공명'이다. 


여담이지만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부터 일본식 과학용어를 순우리말로 바꿔보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순화되거나 순우리말로 된 용어들이 제시되었지만 학계에서도 잘 사용되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저자가 그런 목적으로 그 용어를 갖다 쓴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차갑고 기계적인 것보다는 좀 더 친근하고 인간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제목을 <떨림과 울림>으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에 대해 프롤로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떨림과 울림은 이 책에서 진동의 물리를 설명할 때 등장한다. 진동은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현상이다. 공학적으로도 많은 중요한 응용을 갖는다. 따지고 보면 전자공학의 절반 이상은 진동과 관련된다. 이공계 대학에서 배우는 수학의 대부분이 진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동은 떨림이다. 비슷한 말이지만 그 느낌은 다르다. 진동은 차갑지만, 떨림은 설렌다. 진동은 기계적이지만 떨림은 인간적이다.

나는 이 책에서 물리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내가 보는 물리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려고 한다. 사실 물리는 차갑다. 물리는 지구가 돈다는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경험에 어긋나는 사실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구는 돌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주의 본질을 보려면 인간의 모든 상식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물리는 처음부터 인간을 배제한다.

이 책은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인문학의 느낌으로 물리를 이야기해보려고 했다. 나는 물리학자다. 아무리 이런 노력을 했어도 한계는 뚜렷하다. 그래도 진심은 전해지리라 믿는다.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며 느꼈던 설렘이 다른 이들에게 떨림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울림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에서 '떨림'과 '울림'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가 얘기한 대로 우주의 모든 것은 떨림과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소리도 떨림이고, 빛과 전자기 현상도 떨림이며 그 밖에도 많은 물리현상들이 떨림과 울림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물리학의 교양서이지만 입문서는 아니다. 물리학의 기초를 공부하려면 물리학개론이나 기초물리학 책을 보는 것이 낫다. 하지만 물리학의 기초는 다들 이미 학교에서 어느 정도 배우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도 다루는 것도 그 정도 수준인데.


또한 이 책은 예전에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김상욱의 물리 공부'를 기초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신문에 연재될 때와는 또 다른 형식을 갖추어야 했을 테니 많은 변경 작업과 편집이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접근으로 물리학에 다가가려는 시도는 유지되었을 것 같다. 책을 편집하면서 더 강조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일까, 이 책은 언뜻 저자의 에세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리학의 원리와 기본적인 개념들을 설명하지만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감상적인 쪽에 가깝다. 다양한 소재를 끌어들인 것은 독자들이 더 친숙하게 여기는 것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특히나 책에 첨부된 사진과 캡션은 그러한 감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생명이 탄생하기까지를 다루고 있고, 2부에서는 현대 물리학에서의 중요한 개념인 시공간,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등을 다룬다. 3부에서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중력, 전자기력, 그리고 물리학에서 화학으로 연결되는 분야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4부는 다시 우주를 이야기한다. 1부에서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4부에서는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운동과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인다.


상당히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각각의 주제 하나가 전공책 여러 권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간략하게 다루면서도 그것들을 연결시키고 묶었다. 물리학의 각 주제들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다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리량이라는 게 고작 일곱 가지뿐인 것을.


무언가를 배우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편적인 지식들을 연결하고 묶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체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어렵진 않은 내용들이지만 생소하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편하게 읽으면 될 것 같다. 그냥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기분으로. 사실 이것들을 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 또 이해할 수도 없다. 물리학 공부를 꽤 한 사람들도 (내 경우에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학이란 학문이 그렇다. 이론적으로 정립된 것들을 보면 참 단순 명료하다. 깔끔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수학적으로 나타낼 수 있고 우주는 그러한 법칙을 잘 따르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노력한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이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될까?'에 대해서는 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은 수학적으로 나타낼 수는 있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리학 분야가 현대로 오면서 더욱 그런 경향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물리학에도 확률이나 통계가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 세계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해졌다.


부록에서 저자는 '불투명한 세계에서 이론물리학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덧붙였다. '지식에서 태도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필자가 과학자로 훈련을 받는 동안, 뼈에 사무치게 배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모를 때 아는 체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내가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 증거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과학은 물질적 증거에 입각하여 결론을 내리는 태도다. 증거가 없으면 결론을 보류하고 모른다고 해야 한다. 증거 없이 논리로만 이루어진 이론이나 주장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증거가 없는 것까지 모두 이론에서 설명하려고 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종교나 철학은 자신의 이론으로 때론 지나치게 많은 것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과학자가 보기에 그냥 모른다고 했으면 좋을 부분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과학은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학은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태도다. 충분한 물질적 증거가 없을 때, 불확실한 전망을 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과학의 진정한 힘은 결과의 정확한 예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수 있는 데에서 온다. 결국,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는 것이며, 권위적이기보다 민주적인 것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를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기초가 되길 기원한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니까.


그의 말에 공감한다. 물리학을 통해 얻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이 세계를 보는 관점을 확장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나를,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우주가 어떤 법칙들에 의해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각 개개인에게 수렴되고 집중되는 것이기에. 


그러한 우주는 작은 소립자 안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있다.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는가? 원래 과학은 철학과 맞닿아 있다. 고대부터 철학자는 과학자이자 수학자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떨림이 울림이 될 때 우리는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칼 세이건 <코스모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