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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Nov 15. 2022

그렉 이건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이라는 작가를 몰랐고, 그의 작품도 처음 접하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이번 독파가 SF 시리즈였기에 그중에서 한 편만 골라서 읽을 계획이었는데 '생을 뒤흔들 강렬한 SF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문구에 이끌렸죠.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이 작품집에는 총 11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번역자가 선별한 작품들일 듯한데 대체로는 1990년대 초중반에 쓰인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그렉 이건 작가님의 비교적 초기작들이죠.


첫 번째 작품인 <적절한 사랑>에서부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선 소재에서부터 충격적이었고, 그 묘사와 서술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설득적이었어요. 마치 가능할 것도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것이 하드 SF 장르가 갖는 재미이자 또 독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과학적 지식 못지 않게 철학적 화두들도 던져주었습니다.


하드 SF라는 장르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집을 보니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 것 같네요. 또 제가 최근 읽고 있는 테드 창의 작품과 비교되는 이유도 알겠습니다. (테드 창의 작품은 아직 제대로 읽은 것이 없어서 나중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비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반적으로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아 진도가 더뎠습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 열 한 편의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뒤로 갈수록 충격의 여파는 덜했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지식이 놀라웠습니다. '그는 제대로, 천재적으로 미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미래를 안다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형성하는 방정식들로부터 제외된다는 뜻이 아니다. 일부 철학자들은 아직도 '자유의지의 상실' 운운하면서 장광론을 펼치지만(아마 본인들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들에게 이 자유의지라는 마법과도 같은 존재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해 줄 유의미한 정의와 나는 여태껏 조우하지 못했다. 미래는 언제나 결정되어 있었다.

그렉 이건 <내가 행복한 이유> - '100광년 일기' 중에서
그러나 이 의뇌를 계속 쓸 경우 나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 보편적인 행복감, 보편적인 불안감... 전 인류가 내 감정을 반반씩 규정한단 말인가? 어둠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나마 내가 매달리고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내부에 일종의 씨앗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 살아 있는 인간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는 나의 작은 버전이 들어 있을 가능성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그런 희망이 없다는 사실은 지금 증명되지 않았나? 나는 자아의 재료에 해당하는 것들을 제공받았고, 이것들 모두를 시험해 보고, 이것들 모두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 했다. 지난 열흘 동안 내가 느낀 즐거움은 무의미했다. 나는 타인이라는 태양의 빛을 쬐며 바람에 날리는 거에 불과했다.

그렉 이건 <내가 행복한 이유> - '내가 행복한 이유' 중에서
그런 세계들을 만들어 내는 게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 통상적인 물리적 과정을 대체하는 가능성들이잖아. 하지만 얘긴 거기서 끝나지 않아. 세계들 사이를 이동하는 경우에도 똑같은 기제가 작용하니까 말이야. 초우주 역시 각기 다른 버전들로 분기하고, 각 버전은 존재 가능한 모든 세계 간 <흐름>을 내포하고 있어. 게다가 초우주의 그런 버전들 사이를 통과하는 더 높은 준위의 <흐름>들도 존재하니까, 그 구조 전체가 또 분기하는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거지.

그렉 이건 <내가 행복한 이유> - '무한한 암살자' 중에서
하지만 넌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 것 같진 않아. 자기가 한 선택인데도 전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서, 단지 네가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일념으로 너와는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 머리 위에 유황과 지옥불을 쏟아부어 줄 하나님을 필요로 했던 거야.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이번엔 자연재해를 뒤져보다가 지진, 홍수, 기근, 역병 따위에서 '죄인들'에 대한 천벌'처럼 보이는 예를 걸러냈어. 혹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네 편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믿었어? 하지만 네가 실제로 증명한 건 네 자신의 불안감이었을 뿐이야.

그렉 이건 <내가 행복한 이유> -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 중에서


열 한편 중에 7편은 생물학, 의학과 연관이 있는 작품이었고 (의뇌, 뇌기능 조작까지 포함해서), 두 편은 시공간과 멀티 우주, 한 편은 수학, 한 편은 그나마 SF적인 요소가 가장 적고 추리소설과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그중 '뇌'와 관련된 작품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표지도 뇌 그림이 그려져 있던 것 같네요.


그중 가장 놀랍고 재밌었던 작품은 수학을 다룬 <루미너스>였어요. 여기에 실린 작품들 중에 단연 최고이고, 어떻게 그런 발칙한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싶었거든요. 이것이야 말로 수학과 과학에 대한 신성모독 수준을 넘어선 것이 아닌가 싶었고요.


모든 것은 농담에서 시작되었다. 논쟁을 위한 논쟁. 앨리슨 특유의,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이단적인 논리. 그녀는 이렇게 선언했다.

"수학의 정리는 물리적인 계에 의해 테스트되었을 때만, 또 그 계의 행동이 해당 정리가 참인지 거짓인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참이 될 수 있어." 

그렉 이건 <내가 행복한 이유> - '루미너스' 중에서


수학을 공부한 이들이 갖는 믿음은 '수학은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수학 체계는 공리를 기반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견고한 성과 같은데 그 밑바닥에 있는 공리를 뒤흔들어 버리다니요.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의 공리가 적용되지 않는, 다른 공리가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가 (심지어 지구 내 같은 공간 내에서도)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수학 전공이고,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며 의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에 첨단기술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겠죠. 하지만 1990년대 초중반은 아직은 기술들이 설익었고, 또 에이즈와 같은 두려움의 대상도 있었습니다.


작품들 속에서는 미래를 가정으로 쓰였지만 그 미래마저 현재 기준에서 보면 과거가 된 시점이고, 작가의 시대의 기술을 그대로 외삽하다 보니 이후의 과학기술은 현재의 기술 수준에 비해 저평가된 모습마저 보이기도 합니다. 또는 다소 허황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어설프거나 잘못된 부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마저도 SF니까 용인되는 거죠.


사실 저는 SF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편은 아닙니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설정들에 질리기도 하고, 낯간지러운 표현들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공학, 과학(물리학, 생물학), 의학을 전공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차라리 만화처럼 순수하거나 아니면 정말 뻔뻔해 보일지언정 하드 SF를 구사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은 말랑말랑한 SF라면 조금 더 좋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초엽 작가님이나 천선란 작가님의 작품들도 좋아하는데 그런 면에서 저의 취향이 그런 명확한 구분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해요. ^^;;


어쨌든 그렉 이건 작가님의 작품들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하드 SF 장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 했네요.


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것이 거의 없어서 (그나마 나왔던 작품도 구하기 어려우니) 이 작품집이 거의 유일할 것 같은데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 집니다. 특히, 최근작들은 어떨지 궁금하고, 장편들은 또 어떨까 싶네요. 원서로 읽을 의욕까지는 없어서, 그의 작품들이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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