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후기에서의 단편 제목은 제가 읽은 열린책들판을 기준으로 했으며, 인용된 부분도 열린책들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라는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예전에 '매그넘'이라는 포토저널리스트 그룹을 만들고 활동했었는데요, '결정적 순간'이라는 용어로 유명하고,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회도 했었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면 한 장의 사진으로 그 순간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느껴지는데요,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뭘 말하려는 것인지 감이 옵니다. 전후의 상황도 추측해볼 수 있고요. 물론 그러한 감이 작가의 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고, 또한 실제 사실과도 다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러한 괴리를 극복하고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 사진을 동영상 촬영처럼 시간을 좀 더 늘려서 기록해본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그 속에는 말과 행동, 배경, 주변의 어수선함 등도 모두 담길 것입니다. 여러 명이 등장한다면 그들 간의 대화도 포함되겠죠. 사진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이 전달이 되겠죠.
하지만 사진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가운데서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일까요? 아무래도 그러한 것은 영상의 막바지쯤 나오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앞의 시간들은 그 순간을 위한 준비과정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고요.
뜬금없이 시작되어 논리와 일관성, 연관성 없이 진행되는 장면들, 그리고 어느 순간에서 딱 끝나버리는 하나의 '동영상'을 보는 사람은 무엇을 느낄까 싶습니다. 무언가 보긴 봤는데 뭘 얘기하려는지 모르겠죠.
만약 그러한 동영상을 그대로 글로 옮겨 본다면 또 어떨까요? 그러한 것이 온전히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꼼꼼한 묘사와 서술, 대사로 어느 정도는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상과 글의 차이는 분명하기에, 빈 여백이 많아질 듯합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은 마치 그런 식으로 동영상을 그대로 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작가 본인이 촬영용 카메라를 들고 더블린의 이곳저곳,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사전에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촬영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 단편집에는 총 열다섯 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많습니다. 모두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뭔가 모자란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찌질함'도 느껴진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아, 다 그런 건 아니고 주인공급들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졌어요)
삶은 힘겹고, 불만은 많은데 그런 것이 약자에게로 향하거나 혹은 엉뚱한 곳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또는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이없거나 허영 또는 허탈한 상황이 보이기도 하죠. 그런 것들이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더 있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여자의 물건들에 좀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이려고 잠시 더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바자 중심부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들고 있던 1 페니짜리 동전 두 개를 주머니 속 6펜스 동전 위에 떨어뜨렸다. 전시장 끝에서 누군가 불이 나갔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홀의 윗부분은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나는 허영심에 속고 놀림당한 어리석은 내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내 눈은 괴로움과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애러비> 중에서
그는 아침이 오면 후회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휴식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덮어 줄 그 어두운 혼미함이 고맙기만 했다. 그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관자놀이의 두근거림을 세고 있었다. 선실 문이 열리면서 그는 헝가리인이 한 줄기 회색빛 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여러분, 날이 밝아 옵니다!"
<경주가 끝난 후> 중에서
소용이 없었다.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기의 울부짖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소용없었다. 다 소용없었다. 그는 평생토록 삶에 얽매인 죄수였다. 분노로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갑자기 그는 아기의 얼굴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해!"
아기는 한순간 멈추었다가 두려움에 발작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아기를 안고 방을 급히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기는 4~5초 정도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면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얇은 벽에 부딪혀 울려 퍼졌다. 그는 아기를 달래려 했지만 아기는 더욱더 발작하듯이 울어 댔다. 아기의 부들부들 떨리는 찡그린 얼굴을 보자 겁이 났다. 아기는 일곱 번이나 쉬지 않고 울어 댔고 그는 겁에 질려 아기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아기가 죽거나 한다면…!
<작은 구름> 중에서
그는 혼자서도 사무실 전체를 휩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육체는 무슨 짓인가를 저지르고 싶었다. 뛰쳐나가 폭력을 휘두르고 싶었다. 인생의 모든 모욕들이 그를 분노하게 했다. 경리 직원에게 개인적으로 가불을 부탁할 수 있을까? 아니, 경리 직원은 도움이 안 된다.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아마 안 해줄 것이다…. 그는 어디를 가야 레너드, 오핼로런, 노지 플린 같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감정 측정기는 폭동을 가리키고 있었다.
<짝패들> 중에서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20세기 초반의 아일랜드는 영국 지배하에 있을 때였고, 영국과의 갈등도 많았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 간에도 갈등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친영파'라고 하며 마치 우리가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장면도 나오죠. <위원회 사무실의 담쟁이 날>에서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였던 파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도 나오는데 이를 통해서 아일랜드의 현실을 부각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아일랜드는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심정이 좀 더 느껴진달까요?
하지만 영국의 지배가 너무 오래돼서일까, 그러한 것들에 대한 적극적 저항보다는 일상에서의 소극적인 저항 또는 순응하는 모습이 보이고, 그 결과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러한 모습과 부조리함을 작품 내에서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 것 같아요.
그분은 가끔 내게 '이제 살날도 얼마 안 남았구나'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밤에 그 집 창문을 올려다볼 때마다 마비라는 말을 조용히 중얼거리곤 했다. 그때마다 내 귀에는 그 말이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에 나오는 그노몬이나 교리 문답서의 시모니아 같은 말처럼 아주 이상하게 들렸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어떤 사악하고 죄 많은 존재의 이름처럼 들렸다. 나는 그 말이 두려웠지만, 그러면서도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말이 행한 무서운 짓을 살펴보고 싶었다.
<자매> 중에서
그는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 그녀에게 뒤따라오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빨리 가라고 그에게 소리를 질러 댔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불렀다. 마치 미약한 한 마리 짐승처럼, 수동적으로, 그녀는 하얀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사랑도 이별도 그 어떤 인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블린> 중에서
그들은 웃음소리, 농담 소리 속에서 그녀를 테이블로 이끌었고 그녀는 시키는 대로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허공에 여기저기 손을 휘젓다가 한 접시 위로 내렸다. 그녀는 손가락에 어떤 부드럽고 축축한 물질이 닿는 것을 느꼈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하고 눈가리개를 풀어 주지도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다. 잠시 동안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그러다가 한바탕 허둥거리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정원이니 뭐니 하는 말을 했고, 결국은 도넬리 부인이 옆집 소녀 한 명에게 심한 말을 하면서 즉시 내다 버리라고, 그런 장난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마리아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기도서를 집었다.
<진흙> 중에서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기차 엔진 소리의 리듬이 그의 귀를 때리고 있었다. 그는 기억이 그에게 말해 준 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무 아래에 멈추어 서서 그는 리듬 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그녀를 느낄 수 없었고 그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몇 분 더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완전히 침묵에 싸인 밤이었다. 그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완전히 침묵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느꼈다.
<가슴 아픈 사건> 중에서
그러한 모습들이 마치 동영상처럼 보이고, 막바지에 '결정적 순간'이 드러납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이를 '에피파니'라는 용어로 지칭했는데요, 이는 뭐라고 딱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일상 속에서의 찰나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딱 그 결정적인 순간에 '아!' 하는 탄성이 나올 수 있는 그런 것들일 거예요.
매 작품마다 그러한 것이 느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뭔가 결정적인 장면들은 남기려고 했던 것 같고, 단편집 전체를 보게 되면 마지막 작품인 <죽은 사람들>에서 그러한 것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단편은 원래는 없었지만 나중에 추가되었다고 하죠. 아마 그가 에피파니를 좀 더 극적으로 구현하려고 넣은 장치일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그 에피파니라는 것이 독자가 느끼는 것일까요 아니면 작중의 주인공이 느끼는 것일까요? 제임스 조이스는 그 주인공이 느끼는 것을 통해 독자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란 것 같긴 한데요 사실 좀 약했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 강렬함은 <율리시스>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더블린 사람들>은 그의 데뷔작이자 초창기 작품이어서 그렇게 끌어올리기에는 아직 부족했을 수도 있겠고요.
게이브리얼은 더 이상 불쾌감도 없이 팔꿈치에 기댄 채 그녀의 깊은 숨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동안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와 반쯤 벌린 입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인생에 그런 로맨스가, 한 남자가 그녀를 위해 죽었던 그런 로맨스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의 남편인 자신이 그녀의 인생에서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를 생각해도 거의 괴롭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잠든 모습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들이 부부로 살았던 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
게이브리얼의 눈에 관용의 눈물이 고였다. 그 자신은 어떤 여자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런 감정이 사랑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눈물이 더 많이 고였고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다른 모습들도 가까이 있었다. 그의 영혼은 수많은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에 접근했었다. 그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깜빡이는 그들의 존재를 의식할 수는 있었지만 인식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의 정체성도 회색빛의 알 수 없는 세계로 사라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죽은 자들이 한때 지어 내고 살았던 확고한 세상 그 자체도 점점 줄어들어 사라지고 있었다.
창문에 몇 번인가 무언가 살짝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그는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졸린 눈으로 은색과 검은색의 눈송이들이 가로등 불빛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가 서쪽을 향해 여행을 시작할 시간이 된 것이다. 신문 기사가 옳았다. 아일랜드 전역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어두워진 중앙 평원 전역, 나무 없는 언덕들, 앨런 습지에 부드럽고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더 멀리 서쪽으로 소란스럽게 흘러가는 시커먼 섀넌 강의 물결 위에도 조용하고 부드럽게 내리고 있었다. 눈은 또 마이클 퓨리가 묻혀 있는 언덕 위의 외로운 교회 묘지 구석구석에도 내리고 있었다. 눈은 삐뚤어진 십자가들과 묘석들, 작은 문의 창살들, 앙상한 가시나무들 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눈이 부드럽게 살포시 전 우주에, 살포시 부드럽게, 마지막 종말을 향해 하강하듯이, 모든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위에 내려앉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영혼도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
<죽은 사람들> 중에서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반해 각 에피소드들이 짤막하게 나오다 보니 그것을 느끼기에는 모자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작품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에는 대사가 너무 많은 것도 있을 듯해요. 여러 사람들의 특별히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들이 나열되다 보니 그 가운데서 맥락을 찾기가 쉽지 않고, 그에 대해서 작가가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으니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한 것이죠. 사실 이 작품들에서는 대사 이외에 감정적인 부분의 묘사는 많지 않고 그나마도 단편적입니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해서 읽다 보니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들이 보입니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숨겨져 있는 것들. 그것을 찾는 과정이 제임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에도 있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