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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Dec 27. 2022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알쓸인잡'의 마스터(?) 중에 천문학자로 나오는 심채경 박사가 있다.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기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방송이나 개인미디어, 강연 등에 나온 적이 있어서 아는 사람들도 많은 듯했다. 나도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지 자세한 사항들은 잘 몰랐다. 


그가 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그의 삶과 일상, 그리고 천문학에 대한 애정을 담은 에세이다. 성격이 약간은 애매한 에세이이긴 한데 이는 개인적인 이야기와 천문학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1부와 2부는 주로 자신의 삶과 개인적인 경험들을, 3부와 4부는 천문학의 내용들이 나오지만 여기에도 자신이 생각과 경험을 함께 담았다.


'문과'와 '이과'의 기로에서 내가 이과를 택하자 친구들이 비웃으며 장난하지 말라고 한 걸 보면, 확실히 '과학자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각종 수학·과학 경시대회에서 일등을 휩쓰는 모범적인 사건도, 가전제품을 분해조립하다 불을 내는 깜찍 발랄한 사건도 없었다. 적당히 성실하게 굴면 어른들은 쉽게 안심했고, 그러면 신임과 방임 사이의 어드메에서 나는 동네 뒷산을 쏘다니고 PC통신 속 세계도 실컷 돌아다녔다. 수도권 가장자리의 공업도시였다. 은하수가 수 놓인 밤하늘도, 근사한 망원경이 잔뜩 세워진 가게를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다.


다시 새로움을 향해 떠나야 할 때,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 낄 때, 나는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과거의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토닥여주고, 쓰다듬어주고, 따뜻한 밥 한술 먹인 뒤 과감히 등 떠밀어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준다. 여러 길로 갈라진 평행우주 속 용감히 떠난 나와 용감히 남은 나, 모두를 찬양한다. 그렇게 또 한발 내딛는 연습을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솔직하게 얘기한다. 자신이 천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 행성을 연구하게 된 것,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으로 학위 논문을 쓰고, 달 연구를 하게 된 것도 다 어떤 목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하지만 그가 정말 우주를 사랑했고, 행성과 위성들을 사랑했다는 것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나라 과학계에서 연구자로 살아가는 현실, 특히 비주류 분야에서, 여성으로서, 엄마로서의 어려움도 토로하고 있다.


대표적 전문직인 검사도 그냥 '여자'로 취급하는 사회. 내가 최종 합격자 명단에 오른다면, 나는 박사학위를 가진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 잠재적으로 업무를 팀원에게 떠넘길 소지가 있는 '여직원' 중 하나가 될 운명이었다. 간절한 구직자의 슬픈 순발력으로, 다른 여성 지원자들보다 우위에 서보겠다고, 이미 아이들이 다 커서 육아휴직이 필요한 시기는 지났다고 답변했다. 면접관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로부터 스무날 가까이 지독한 불면과 자기혐오에 시달려야 했다. 면접 결과는 낙방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물론 우주가 아닌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더라도 그 분야를 계속 공부했을 거라고 하니 그 선택이 꼭 우주가 아니었더라도 아마 어디선가는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나도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지나왔고 지금도 연구를 하고 있기에 공감되고 이해가 되는 내용이 많았다. 이공계 대학원 과정은 비슷비슷하지만 특히나 마이너 한 분야는 그 나름의 독특함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사학위는 일종의 운전면허 같은 것이다. 박사학위 보유자를 대상으로 하는 채용 기회에 지원할 수 있고, 연구사업 제안서를 낼 기회가 많아진다. 천문학에서는 박사가 되면 천문대에 관측 제안서를 제출할 수 있고, 채택될 경우 단독 관측도 할 수 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애써서 받은 그 '연구 면허'가 별무소용인 종잇장이 되지 않도록 연구자로서 할 일을 다 하는 것뿐이다. 평가하고 평가받는, 누구나와 같은 그 삶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뿐이다.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특히나 박사학위를 '운전면허'에 비유한 것에 공감. 나도 박사학위를 그냥 '자격증' 정도로 생각한다는 얘기를 자주 했기 때문이다. 박사라는 타이틀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독자적으로 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척척박사'라는 말은 있어도 '척척석사'라는 말은 농담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라서. 물론 박사라고 해도 자기가 전공한 분야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만을 남보더 조금 더 알고 있을 따름이지만.


생각난 김에 그의 석사학위 논문과 박사학위 논문을 훑어보았다. 둘 다 타이탄의 대기를 분광학으로 분석한 내용인데 세세한 내용까지는 이해할 필요가 없기에 대략 어떤 식으로 전개했는지를 보았다. 


특이한 것은 박사학위 논문은 국문으로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공계 학위논문은 대체로 영어로 작성한다. 그게 더 쉽기 때문이다. 용어를 사용하는데도 불편함이 없고, 기존에 저널에 발표했던 논문들을 모아서 쓰는 경우가 많아 손이 덜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기존에 영문으로 작성했던 것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뒷부분에는 영문-국문 용어집까지 수록했다. 그 번역 과정에서 천문학이나 물리학 및 관련된 용어집들을 참고했고, 그러고도 없는 단어들은 만들어냈다. 이는 후배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국내 천문학계를 위한 시도라고도했다. 그러한 내용은 박사학위논문의 '알리는 글'과 이 책에서도 나온다. 


여기에서 그의 생각과 고집이 느껴졌다. 아마 대학원 측이나 지도교수와 마찰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대학원 시스템 내에서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분광학으로 분석하는 연구를 많이 했는데 그러다 보니 천체를 직접 관측하기보다는 관측된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라고 했을 것이다.


국내에서 유일한 타이탄 연구자였던 그는 그 연구를 지속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달 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달에 대한 백그라운드는 기존의 전공자들에 비해 부족했지만 그동안 해오던 방법론을 적용하여 소위 대박이 난 연구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저자가 그렇게 알려진 계기는 <네이처>에서 '미래의 달 과학을 이끌 과학자'로 선정하여 인터뷰 한 내용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도 우연이었고, 운이 좋았던 걸로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고 해도 그것도 노력의 결과라는 것도 안다. 아무튼 그렇게 언론에 알려지면서 미디어와 강연에 많이 나오게 됐고, 지금은 천문학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도 과학자의 소명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인지도 때문에 아마 이 책도 쓰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 책을 쓰는데 2년 반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인터뷰 요청을 받는 등대지기의 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천문학자의 경우 '사회의 부름에는 대체로 응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천문학을 비롯한 많은 과학 분야가 국민이 낸 소중한 세금에서 연구비를 받고 있으며, 과학계 종사자임을 밝히면 듣는 사람은 대개 "오~"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이 직업을 존중해 준다. 물심양면 지지를 받았으면 보답을 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큰 보답이겠고, 이렇게 기회가 주어질 때 대중과 소통하는 것 또한 부수적이면서도 중요한 임무다.


사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21년 초이긴 하지만 알쓸인잡으로 인해 더 인기를 얻게 되지 않았을까 싶고, 이 점을 문학동네 측에서도 알고 있기에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의 박사, 연구자가 만들어지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아직 진행 중인 그의 성장 스토리이기도 할 것이다. 


언론은, 어쩌면 사람들은, 대단한 과학자를 집중 조명하고 싶어 한다. 고난을 극복한 영웅담에 빨리 감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과학자를 여럿 키워서 그중 한 사람이라도 대단해지는 과정을 지지하거나 지켜보는 것은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세계적 과학자가 어디서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날 리 없는데.  


그러나 그의 우주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다. 그리고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요청하고 있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탐사에 힘을 보낼 수 있으니까.


당신이 꼭 필요하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 탐사에 힘을 보탤 수 있다. 우주를 사랑하는 데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책이 나온다면 그때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잠깐 반짝하고 사라진 초신성이 아닌, 계속 빛을 발하는 별자리들처럼. 그러한 별자리가 되어 천문학 꿈나무들을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이다.


p.s. 그런데 책의 제목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그렇게 제목을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천문학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가 부정한 것은 '별'일까 '보는 것'일까? 


그는 행성과 위성 전공이다. 그러므로 다른 천체 (우주 그 자체나 말 그대로 별)를 다루지 않는다. 또한 직접 관측하지 않고 (보는 것뿐만 아니라 측정하는 것) 주로 있는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을 하기에 아마 둘 다 부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는 모든 천문학자가 '별을 보지 않는다'라고 오해하게 만들 여지도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제목을 이렇게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천문학자는 천체를 관측하지 않기도 한다"라고...


그러면서도 그는 농담처럼 말한다.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라고. 이과적 농담이다.


책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열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계절이 멀어지고 또다시 돌아오는 시간 중 대부분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이 '뭐라도 되었을 무렵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소모되었다. 그렇게 무척 쓸모없었고 대단히 중요했던 열 계절을 기꺼이 맞이한 끝에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다. 이 한 권의 책에는 작은 구두점이지만, 어느 별 볼 일 없는 천문학자에게는 또 하나의 우주가 시작되는 거대한 도약점이다.




p.s. 독파 북토크에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다. 제목에 원래 '어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라고 했다는데, 담당편집자가 '어떤'을 빼서 지금의 제목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을 한글로 쓴 것에 대해서 대학원측은 별로 관심이 없었고, 지도교수님도 특별히 반대가 없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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