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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Nov 14. 2023

수능 1세대의 대입기

수능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수험생들이 자신의 일생을 좌우하게 될지도 모를 그 시험 준비에 매진하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수험생들이 자신의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첫 수능 시험 이후 신문에 났던 기사 (동아일보 발췌)


나는 94학번이다. 유명한 수능 1세대.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대혼돈의 시기를 겪은 학번이기도 하다. 알려진 대로 나는 1993년, 그러니까 내가 고3 때 8월과 11월에 수능을 두 번 치렀다. 각각 200점 만점이었다. 문항수도 거진 200문항 정도 됐던 것 같고, 문항마다 점수가 0.8~1.2점이었나 그랬었다.


지금 생각해도 8월에 수능은 정말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엔 에어컨이 있는 학교가 거의 없었고 (당연히 내가 시험 본 학교에도 없었고), 시험지가 바람에 날리고 시끄러우니 선풍기도 틀 수 없었을뿐더러 창문도 열 수 없었다. 찜통 속에 더워 미칠 것 같은데 시험에 집중해야 했던... 지금 생각해도 당시에 어떻게 시험을 봤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시험이 2차 시험보다 쉬웠는데, 나도 2차 시험이 1차보다 거진 20점이나 하락했다. 그래서 1차 시험 점수로 대학 지원을 했다.




94학년도 대입이 대혼돈이었던 건 단지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전환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거진 3년에 한 번 꼴로 대입제도가 바뀌긴 했지만 94학년도만큼의 변화는 없었을 것 같다.


내가 고1 때만 해도 학력고사 준비를 했었다. 모의고사도 다 학력고사 시스템이었어다. 고2가 돼서는 우리부터 수능시험을 본다고, 5~7차에 걸쳐서 실험평가를 치렀다. 실험평가는 1~7차까지 있었는데 1~4차까지는 일부학교에서만 치렀고, 5~7차까지는 대부분의 고2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었다.


문제 유형은 천차만별, 심지어 '이거 IQ 테스트인가?' 싶은 것도 있을 정도였다. 수능이 어떻게 나올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고3 때는 수능 유형의 모의고사를 봤다. 모의고사를 보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긴 했지만 여전히 뜬구름 잡기였다.


게다가 본고사 준비도 해야 했다. 수능과 본고사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그야말로 대혼돈. 대학마다 본고사 과목도 다르고, 문제도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과거의 국내대학 본고사 기출문제 및 일본 대학 기출문제까지도 찾아서 풀었다. 당시엔 그런 문제집도 유행이었다. 


학교 수업도 파행적이고 학생들이나 교사들이나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내가 다닌 학교 시험문제는 꽤 어려운 편이었다. 그래서 웬만해선 내신을 잘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중에 1차 수능을 보고 분위기가 더 어수선해졌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2차 수능을 치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혼돈은 그 이후부터였다. 94학년도에는 수능+본고사 체제로 전환된 것뿐만 아니라 선시험 후지원제가 되었고, 복수지원이 가능해졌다. 그 이전까지는 대학 및 학과 지원을 먼저 하고 학력고사를 쳐서 뽑는 방식인 선지원 후시험제였다. 게다가 이전 데이터가 없으니 수능점수에 따른 배치표도 무용지물이었다. 


수험생들 간에 눈치싸움이 치열해졌고, 학교들마다 입시전형이 번복되기도 했다. 본고사 과목이 바뀌는 학교도 있었고, 본고사를 본다고 했다가 안 보는 학교도 많아졌다. 그 결과 상위권 대학 중에 미달이 생기는 과들이 생겼고, 운 좋게 좋은 학교 들어가는 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1차 수능시험 성적으로 대학에 지원하고자 했고, 몇몇 대학을 목표로 본고사 준비도 했다. 그런데 당시엔 내신+수능점수로 뽑는 특차전형(정원의 20% 정도)과 내신+수능점수+본고사 (또는 면접)로 뽑는 일반전형이 있었다.


그런데 내 내신은 1등급이 아니라서 (당시 15등급제) 특차 지원은 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능점수는 간당간당하게 최상위권을 제외하곤 웬만한 공대 커트라인 낮은 과는 넣어볼 수 있을 정도. 그래서 밑져야 본전으로 과감하게 1 지망으로 생각하던 학교, 학과에 특차원서를 넣었다. (특차전형에 합격하면 일반전형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특차원서를 들고 담임을 찾아갔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원서를 써주었다. 반에서 특차원서를 낸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당시 내 고3 담임은 참 무능했고, 바뀐 대입제도도 잘 몰랐을뿐더러 아이들 진로에 관심도 없었고, 특히 나와는 사이도 안 좋았었다. 그래서 특차원서를 내겠다는 나를 무시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당시엔 원서 접수도 꽤 복잡했다. 담임이 수기로 원서 작성을 해야 했고, 직인 받을 것과 제출할 서류도 많았다. 게다가 내 계열을 자연계가 아닌 인문계로 표시해 놓은 걸 원서 접수하고 나서야 알았다. (당시엔 인문계와 자연계 교차지원이 가능했었고, 수능 백분율도 인문/자연계 통합으로 계산되었다. 물론 계열별 백분율도 함께 나왔다)


원서접수 후 지원한 대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인문계인데 공대 지원한 게 맞느냐고. 교차지원이기 때문에 감점이 있을 거라고 했다. 정말 황당했다. 1점이 중요한 대입에서 교차지원으로 인한 감점이라니. 그것도 담임의 실수 때문에. 그러나 미처 확인 못한 내 책임도 있긴 하다.


면접날 담당 교수님께서 내 내신과 점수를 보시곤 별로 탐탁지 않아 하셨다. 내가 지원한 과의 경쟁률이 2.2:1이었기 때문에 떨어질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합격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날에 합격자 발표를 전화로 확인했고, 그 학교에 가서 운동장 게시판에 붙은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합격증을 받아왔다. 크리스마스선물과도 같았다.


이후엔 반 친구들 원서작성하는 거 도와주고, 친구들 원서접수하는 거 같이 가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입을 일찌감치 확정 짓고 여유로웠던 나와는 달리 친구들은 거진 2월까지도(전문대의 경우) 원서접수를 하러 다녔다.




그런데 내가 지원한 과도 일반전형에서는 미달이 됐다. 2 지망까지 채우고도 최종 미달이었다. 상위권 대학의 공대임에도 그런 결과가 나와서 학교에서도, 학과에서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러다 보니 신입생들 간의 학력차도 컸다. 학교에서도 신입생들을 위해 (학력 수준 떨어진다고) 예비대학을 개설했고, 6주 정도 입학 전에 수학과 영어 등 몇 과목을 매일 가서 선수강해야 했다. (정확한 과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두세 과목 정도 됐던 것 같다)


교수님들과 선배들은 우리 학번을 정상적으로 보진 않았다. 그럴만했을 거라 생각되지만 서운한 점도 있었다. 학생들 간에도 누가 특차인지 일반인지 알기는 했지만 별다른 구분은 없었다. 대체로 특차로 들어간 학생들이 학점을 더 잘 받긴 했다. 그리고 학과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자퇴를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같은 학번 중에 졸업까지 간 동기는 얼마나 됐을까. 




그 뒤로 수능과 대입제도는 해마다 많은 변화를 겪었다. 대입제도가 바뀌고 해마다 문제 난이도가 들쭉날쭉해도 어차피 상대평가라 그 안에서도 순서는 매겨지겠지. 물론 개별적으로 평소실력보다 점수가 더 나은 경우도, 더 안 좋은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지만 바뀐 시스템이 내게 득이 되었는지 독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원하는 결과를 이루기는 했으니까.


그러나 그때가 복잡했다고 해도 지금 복잡한 것보다는 못 미칠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아마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제도를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8년 뒤 내 아이가 대학 갈 때는 어떨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새로 바뀐 대입제도가 발표되었는데 아직은 유심히 보지 않았다.


이상 수능 1세대의 대입기였다. 그것도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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