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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14. 2023

정한아 <달의 바다>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 걸요.
저는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지구가 알사탕만하게 보이는 곳으로, 그러니까 제 잘못이나 슬픔도 알사탕의 티끌로 보이는 곳으로요. 엄마, 저는 그 모든 순간을 즐겼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이걸 위해서 희생했던 것들, 제가 저지른 실수와 오류들 말이에요. 사는 게 선택의 문제라면 저는 제 손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싶거든요.


작년에 독파로 정한아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을 읽고 나서 그 반전에 약간 멍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것에 집중하다 보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반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작품은 전체적으로 흡인력이 있었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도 야기했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도 전자책으로 구매했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던 터에 이번에도 독파로 <달의 바다>를 읽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개정판이 나오면서 내가 구매한 책은 구판이 되어버렸다. 개정판은 문학동네 플레이시리즈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인데 내용은 동일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정한아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자 2007년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니 벌써 16년 전에 나온 작품이다.  <친밀한 이방인>이 2017년에 나온 작품이니 그 사이에 약 10년간의 기간이 있었고, 장편과 단편 작품들이 출간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달의 바다>와  <친밀한 이방인>은 여러모로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반전이 있지만 그 반전이라는 것이 그 순간에도 반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 하는 약간의 놀람 정도였다.  반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이 작품에서도 두 이야기가 번갈아 나온다. 하나는 편지, 하나는 주인공 은미의 이야기. 솔직히 말하자면, 너는 그 편지가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실 거의 끝까지 몰랐다. 처음엔 주인공이 고모를 만나 고모의 권유로 우주비행사가 돼서 엄마에게 쓰는 편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우주비행사 시험에 계속 도전하는 얘기인가 싶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고모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편지의 주인공에 대한 궁금증, 주인공이 어떻게 여행을 해나 갈지에 대한 궁금증은 중반부에서 고모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긴장감이 탁 풀어졌지만 진짜 이야기는 거기부터였던 듯하다.


작품 말미에서야 전체적으로 구조가 정리되었다.  그러한 것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나의 부족한 능력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작품의 의미는 반전이라든가, 궁금증을 자아내는 서술구조가 아니라 고모의 삶, 그리고 주인공이 그 여행과 고모와의 재회를 통해 얻은 삶에 대한 용기일 것이다. 그리고 고모의 친구들, 주변인물들을 통해 그러한 것을 더욱 강조한다. 그것이 지나치면 과유불급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처음엔 도무지 그런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죠. 생각해 보면 저는 언제나 주변으로부터 잡아당겨지는 힘으로 살아왔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저를 끌어당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둥둥 떠오른 저는 몸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고 있었어요.
"그녀를 만난 것은 이번 생에 내가 받은 두 개의 축복 가운데 하나지."
"나머지 하나는 뭔데요?"
내가 묻자 레이첼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의 나를 만난 것."
동물이 다시 가길 원치 않았던 우주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되돌아가요. 우주에 다녀온 뒤 다음 비행을 포기했던 비행사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죠. 그건 인간만이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선택한 대로 사는 인생이죠. 그것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이 무엇 하나 동물보다 나은 것이 있겠어요? 


작가는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인생은 안 좋은 일들도 많이 생기고, 우리가 좇던 것을 실패하고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생기지만 그럼에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삶에 정답은 없다는 것을. 어쩌면 그것은 글을 쓰면서 본인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소설의 형태로 독자들에게도 전해졌다. 


고모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꿈과 현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고모의 현실은 명확했지만 고모는 현실과 꿈 그 어딘가에 있었다. 그러한 꿈 속에서 고모는 우주비행사였지만 지구를 벗어날 수 없는 우주비행사였을 따름이다. 


또한  은미는 본인이 처한 환경에서 결국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또 다른 등장인물인 민이 역시 본인의 선택을 따라간다. 둘 모두 그러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고, 둘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삶의 결정권자가 자신이며 그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마도 미국 여행을 하고 고모를 만나고 온 것이 그러한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시작점일 따름이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깨달았으니 그 이전과는 많은 점에서 달라졌을 것이다. 은미가 미국에서 도시락통을 묻고 온 시점에서 이미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살면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억지스럽거나 식상하지 않게 들린다.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아서 더 와닿는다. 그건 성공해 본 사람이 아니라 실패해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니까. 비록 결과가 어찌 될지언정 그 모두가 하나의 과정이니까.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전해져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겠다는)를 버리지 않는다면 최선일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작은 위로는 될 수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작품이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 주셨잖아요?


p.s. 저 구판의 표지그림도 책을 읽고 다시 보니 이해가 된다. 개정판이 나오면서 표지도 좀 더 심플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게 바뀌었다. 구판의 그림이 좀 더 직설적으로 이 작품의 느낌을 드러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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