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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1. 2023

구병모 <있을 법한 모든 것>


수없이 흥행에 실패한 SF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들, 그 어느 장르보다 고난도의 특수 분장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무수히 복제 가능한 대체재가 넘쳐나는 영화들 사이사이에 니니코라치우푼타의 파편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유년에 실제로 만난 외부의 방문객 혹은 젊은 날 쌓아 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채에 금이 가서 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 있는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 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 일자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 p.60 <니니코라치우푼타> 중에서


구병모 작가의 신작이자 단편집인 <있을 법한 모든 것>을 문학동네 이달책으로 구매했다. 또한 독파 챌린지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구병모 작가의 신작 북토크가 진행된다는 안내문자를 보고 신청해서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북토크 전에 책을 먼저 읽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부지런히 완독 했다. 북토크 후기는 아래에서 볼 수 있다.



이미 책을 읽었던 터라 북토크에서 나온 얘기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구병모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전작들을 읽어보고자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었는데 이 단편집을 통해 그의 작품들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이전부터 구병모 작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들 (<파과>나 <아가미>가 많이 추천되었지만)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역시나 '백문 불여일견'이다. 얘기를 아무리 들어도 한 번 읽어보는 것만 못하다.



단편과 장편 모두 잘 쓰는 작가들은 많지만 장편은 장편대로 집필의 어려움이 있고, 단편은 단편대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편보다는 단편이 더 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장편은 일단 전체의 구성과 흐름을 잘 짜놓으면 전체의 밀도는 낮아지기 때문에 작은 부분은 좀 더 너그럽게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단편은 반대로 문장 하나하나의 밀도가 높아서 작은 부분들까지 더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단편을 잘 쓰는 작가는 장편도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장편을 잘 쓰는 작가라고 해서 모두 단편을 잘 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구병모 작가는 어떨까? 일단 아직 장편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단편은 기본 이상은 된다고 생각한다. 내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나의 주관적인 선호도의 차이일 뿐, 작품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실 작품들은 무난했다.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또한 그가 주안점을 두고 있는 주제들도 담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들의 집필 의도나 설정에 대해서는 어텐션 북을 참고해 달라고 했다. 이달책 구매 시 어텐션 북이 같이 와서 보았는데, 어텐션 북은 여러 서점사에서 EPUB 버전으로 무료로 볼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문학동네에서 제공하는 어텐션 북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작가에 대한 친밀감을 높일 수 있어서 좋다.


이 단편집에서는 상대적으로 이해가 용이했던 작품들이 있었는가 하면 다소 난해한 작품도 있었다. 그의 상상의 세계가 현실을 넘어서 점차 비현실, 추상의 세계로 이르게 되면서 더욱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어떻게 날 것인지에 대해서.


웬만큼, 적중, 정성, 갈수록, 만나, 성의, 두고 봐, 내놔. 당연하지, 끝내자, 씹네, 기다려, 갚아, 별로, 글쎄, 아무것도, 자니, 잔다. 깨워, 안건, 계약, 파기, 고소, 콩밥, 구매, 의향, 가격, 네고, 가능, 생각, 도망, 불가능 사이에서 1은 부유한다. 수신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거나 그의 통점을 건드려야만 했던, 나아가 그의 결단이 나 행동을 유발해야만 했던, 그러기를 실패한 말의 미세입자. 어쩌면 미시입자, 그보다 미시입자들이 부유하는 세계에서 1은 순행한다. 아니 역행한다. 역류한다. 표류한다. 전도된다. 회전한다. 출렁인다. 점멸한다. 주체 뒤에 그 어떤 자동사를 이어도 무방한 공간. p.169 <Q의 진혼> 중에서
00 01 10 11은 예정된 계산이 아닌 즉흥과 충동으로 이루어져 광기를 품고 널뛴다. 우리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고 살면서 죽어가는 우주의 한 조각에 불과하여, 상상에서만 결합과 증식이 가능한 합성어와 파생어를 무한히 낳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이든 되도록 하자. 이 세상에 기입되는 단 하나의 문장, 그 종지부에 찍히는 부호라도 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서로 같으면서 다른 모습으로 동시에 조우해야 한다. 이 조우의 중첩이야말로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설령 이유가 거세되더라도 존재 그 자체이자 전부이고, 무의미야말로 이 세상의 유일한 의미임을 증명하는 파동이다. 산산조각 난 신의 찻잔이 우주에 흩어져 별이 된다. 1/들은 당신이 기다리는, 동시에 누구도 원치 않을 0의 총합이다. p.193 <Q의 진혼> 중에서


그리고 각 작품의 시점은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몇십 년 이전, 그리고 몇십 년 후의 근미래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담길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다. 실제로 이 작품들에는 작가의 경험과 현재, 미래의 삶이 담겨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단순한 허구의 것들이 아니라 살면서 겪는 많은 것들이 기반이 되고 있고, 여러 형태로 소설 곳곳에 들러붙어 있다. 


이 단편집의 제목은 <있을 법한 모든 것>이고, 작가 역시 이 제목이 단편집들의 내용을 아우를 수 있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표제작은 사실 그러한 제목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다. 왜 그러한 제목이 붙었을까. 반복해서 읽어봐도 쉽게 와닿지는 못했다. 다만 현실과 비현실의 공존, 여러 가지 가능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불안과 동경마저 포함한다.


그러한 불안은 불신으로 커져간다. 이는 <노커>에서 타인에 대한 불신과, 언어와 소통을 기반으로 한 사회의 붕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상의 상황이 닥치지 않았더라도 이미 우리 사회는 소통이 무너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폭력 역시 일상화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진짜 노커와 가짜 노커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어차피 모두가 노커가 되어버리거나 될 잠재력을 갖고 있는 거라면, 인내심과 포용력 따위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그와 함께 서로를 지칭할 수 있고 서로를 잇는 명사, 대명사, 돈독한 관계나 적절한 거리와 위치를 규정할 수 있는 조사, 행동을 그나마 규정하고 제어할 수 있던 형용사와 동사들의 체계가 무너진다. p.90 <노커> 중에서
처음에는 피해자들 각각의 몸이 바벨탑이었을지 모르나 어느새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바벨탑이 된다. 말이라는 군도에 붙어 기식하던 땅덩이들이 갈라지더니 흙덩이와 돌덩이로 세분되고 세절되어 풍랑에 흩어진다. 명쾌한 의미 전달을 빌미 삼아 말로 선을 넘던 자들은 이제 선이 없는 존재들이 된다. 세상은 말을 잃은 자들과 아직 말을 잃지 않은 자들 두 부류로 나뉘는데 아직 말을 잃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제대로 된 말을 구사하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만큼 말의 체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p.92 <노커> 중에서


그럼에도 작가는 희생적인 사랑도 보여준다. <니니코라치우푼타>의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자식으로서의 사랑, <노커>에서도 드러나는 어머니의 사랑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다른 형태의 사랑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작품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막을 한 커플 벗겨 난 그 광경은 우리가 등을 돌리고 있지만 결국은 마주해야 할 현실일 수도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보아야 할, 느껴야 할 많은 것들. 그리고 있을 법한 모든 것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 이런 세상이니까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느냐고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인간의 힘으로 저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 없겠지요. p.233 <이동과 정동> 중에서
- 일상으로 돌아가, 당신도 움직이기를.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근본이니까요.
그래서 얻은 이때만은 확고한 어조로 다짐했던 것이다.
-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p.235  <이동과 정동> 중에서


#북클럽문학동네 #이달책 #독파 #있을법한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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