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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1. 2023

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속은 걸까? 아니다. 내가 그저 이슬아 작가의 능청스러움에 넘어갔을 따름이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내가 속았다고 한 것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원래 사실과 허구가 적절히 뒤섞이면 사실처럼 느껴지니까.


그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그의 작품을 읽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작가의 이름이나 소개는 많이 보았고, 이 작품도 입소문을 통해 알고는 있었으나 아직 읽어보진 못한 터였다. 그러다가 겸사겸사 읽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독특한 작품임에는 틀림없었다.


일단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가녀장'의 시대라니. 듣도 보도 못한 말이지만 그 단어는 뇌리에 팍 꽂힌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했던 '가부장'을 비꼰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의 의도적으로 이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음에 꽂아놓은 이 깃대로부터 금이 갈라져 나가듯 작품은 거침없이 전개된다.


슬아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열한 식구를 다스렸다. 한 명의 부인, 세 명의 아들, 세 명의 며느리, 네 명의 손주가 그의 휘하에서 지냈다.
...
엄마는 이름 없이 호명되며 살림하는 자였다. 여자 어른들은 집안일을 했고 남자 어른들은 바깥일을 했으며 어린이들은 말을 배웠다. 말이란 세계의 질서였다.


작품은 주인공이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서 호칭을 배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가족으로 이루어졌던 슬아의 집에서 조부가 장남의 딸이자 장손녀였던 슬아에 대한 기대감을 비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가족은 이내 분열되었고, 새로운 핵이 된 슬아는 '모부'를 이끌고 독립을 하게 된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를 연 것이다.


그들의 집에는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모부'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서부터 작가의 시각을 느끼게 한다. 작품 곳곳에서 나타나지만 작가는 페미니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TV 생방송 프로그램 출연 시 브래지어 착용을 두고 PD와 갈등을 빚는 것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냥 밑바탕에 깔고 있을 뿐, 노골적으로 나타내지는 않는다. 비록 불편한 마음을 갖는 독자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런 불편한 마음은 단지 페미니즘 혹은 여성우위에 대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단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전복되고) 새롭게 생긴 질서 체계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이 더 클 것이다. 


딸이 사장이고 모부가 피고용인이다. 가계는 딸의 작가로서 버는 돈과 출판사업을 통해 운영된다. 그러다 보니 모부는 딸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속마음을 달랐을 것이다.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이 대사는 그들 사이의 유행어다. 부지런함을 뽐내며 거들먹거리는 이슬아를 비아냥거릴 때 주로 쓰는 대사다. 이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들먹거린다. 


주인공은 혼자 독립하는 대신 모부와 함께 살기로 했고, 업무와 생활의 공동체를 이어간다. 그것은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슬아가 모부를 더 필요로 한 것이 아닐까. 작품 내에서 그는 그것을 인정한다.


고용인-피고용인의 관계와 부모-자녀 관계는 순차적으로 나타난다. 즉 업무시간에는 전자이지만, 그 외에는 후자가 된다. 그런데 그 업무라는 것도 엄마는 식사준비와 정리, 아빠는 청소, 운전기사 등이다. 단순하게 표현해서 그렇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준다. 후자일 경우에는 여느 부모-자식의 관계처럼 보이는 것 같다가도 다시 전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아무래도 일상과 일의 경계가 모호해진 따름이다.


가부장제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웅이는 다시 청소하러 간다. 청소기와 대걸레가 새겨진 양팔을 흔들며 걷는다. 치울거리는 날마다 생겨나기 마련이다. 웅이는 하루치 체력이 아침해와 함께 차오르는 것을 안다. 복권에 당첨되기 전까지 그의 노동도 계속될 것이다.
"평소에 팔운동 좀 하셨나 봐요."
복희가 코웃음을 친다.
"운동은 무슨 노동밖에 안 했어."
복희는 다시 태평하게 부엌일을 하러 간다. 호르몬보다 더한 무엇이 복희의 전신에 흐르는 듯하다. 그런 힘을 지니고도 그는 어쩐지 가모장 같은 것을 꿈꾸지 않는다. 가부장이든 가녀장이든 아무나 했으면 좋겠다. 월급만 잘 챙겨준다면 가장이 집안에서 어떤 잘난 척을 하든 상관없다. 남이 훼손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복희는 안다.


이 이야기는 모두 허구다. 그런데 마치 진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내가 그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입담이, 그리고 그 능청스러움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본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1인 출판사를 만들기도 했었고, 부모님과 함께 가족 기업 형태로 운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록 각색된 부분이 많다고 하더라도 더 그럴싸하게 들렸던 듯싶다.


물론 자신의 모부를 그렇게 묘사하고 희화화한 것은 실제와 다르겠지만, 그것 역시 상당 부분은 실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결국 그는 그가 가장 자신 있었던 내용에 대해서 잘 써 내려간 것이 성공의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은 키득거리면서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다. 독자에게 무엇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나열되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가상의 가녀장 사회를 그려냈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가족 안에서의 권력 구조, 서열, 그리고 무엇을 바탕으로, 무엇을 위해 그러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틀이 뒤틀리자 우리의 시각과 생각도 같이 뒤틀리는 듯하다.


그러나 역할의 변화와는 별개로, 가족 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비록 그것이 작위적인 서열 설정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존중은 필요하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그러한 것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복희가 엄마의 자아를 꺼내면 슬아도 딸내미의 자아를 서슴없이 꺼낸다. 딸내미의 자아란 받고 또 받으면서도 투덜대는 자식의 자아다.
새삼스레 슬아는 미안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미안함보다 민망함이 앞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너무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물론 그러한 체계에서도 갈등은 존재한다.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무게중심이 불안정한 상태이기에 자칫하면 쉽게 넘어가버릴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한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부모와 자식이 다르다. 그러나 부모의 방식이 아닌, 자녀의 방식으로 풀어가 보려는 시도도 새롭게 느껴지며, 어쩌면 이 사회를 다르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을지도. 가족 내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은 여러 갈등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만들어진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슬아작가는 기존 체계에 대한 부정을 확장해 나간다. 여성의 전통적 역할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가하고, '등단문학'에 대해서도 꼬집는다. 본인이 작가가 된 과정이 그러한 제도권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품 내에서는 글을 쓰는 고뇌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네. 저는 등단한 작가의 작품 중 좋아하는 책이 아주 많아요. 제가 읽고 자란 한국소설과 시가 대부분 그 안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등단문학은 문학의 한 갈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 바깥에서도 온갖 종류의 문학적인 작품이 쓰이잖아요."
"그래서 문학을 이미 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너무 당연하게도 그렇습니다.”
기자수첩에 헤드라인체로 적는다. '문학 이미 하고 있어'
슬아는 자신에게도 신앙이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좋은 이야기에 대한 추앙과 문학에 관한 믿음으로 슬아는 움직여왔다. 신의 입을 빌려 기도하고 몸을 낮추듯, 슬아 역시 자기보다 먼저 살아간 작가들의 힘을 빌려 글을 쓴다. 작가들이 평생에 걸쳐 얻고자 하는 건 전지적인 시점일 것이다. 불가능한 목표지만 연습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건 어쩌면 신의 시선을 상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가 무엇을 느끼는지 헤아리는 일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나는 고작 미물일 뿐인데 말이다. 슬아는 처음으로 스님과 자신이 조금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말이 안 될 것 같은 것들도 어느새 말이 되게 바뀌고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가 이제는 어떤 방향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보인 가족의 모습이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장담도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때의 가족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질까? 이 작품을 통해 모의실험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웅이가 잠자코 들으며 못을 박는다. 그는 문득 호시절을 지나고 있음을 느낀다. 딸에겐 젊음과 능력이 따르고 자신에겐 체력과 연륜이 따르는 이 시절. 별다른 슬픔 없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이 시절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영원할리 없다. 딸과 함께 흘러온 삼십 년이 웅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슬아는 집으로 돌아가버린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 진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그러느라 복희는 창틀을 닦고, 웅이는 바닥을 밀고, 슬아는 썼던 글을 고치고 또 새 글을 쓴다고. 월요일은 또 돌아올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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