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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2. 2023

천명관 <고래>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해안엔 희미한 달빛 아래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그녀는 모래밭에 쭈그리고 앉아 해수면 위에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하얗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집채만 한 물고기가 솟아오른 것이었다. 부두에 처음 도착한 날 목격했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丈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 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이었다.


올해 상반기에 관심을 끌었던 책을 얘기할 때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소식에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의아하면서도 그 내용을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했을 것이고, 안 읽어본 사람들은 그저 우리나라의 작가 중 수상자가 또 한 명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특히나 이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을 듯하다. 그래서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은 작가와 번역가에게 공동으로 시상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김지영 번역가가 번역했다. 이미 국내 소설을 영어로 여러 편 번역한 바 있는 그는 이 작품의 문체와 유머를 살리기 위해 더 애를 썼다고 한다. 언어의 차이로 인해 번역과정에서 상실될 수 있는 요소가 많지만, 그러한 것을 최소화하면서도 작품 본연의 맛을 잘 살렸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국내외에서 그만큼 관심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홍보는 충분했을 듯하다. 특히 영국에서 인지도가 꽤 올라갔다고도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스토리의 힘인 듯하다. (관련해서 문학동네 측에서 시상식 전후의 이야기나 영국인 배우가 낭독하는 영상들을 올리기도 했다)



나는 2016년경 이 작품을 알게 되었고 전자책으로 구매하여 순식간에 읽었다. 기괴한 스토리인 데다 전개방식과 내레이션도 독특했지만 흡입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천명관이라는 작가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에 추가하게 되었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 중에서는 <고래>를 능가하는 것은 없는 듯하다. 그만큼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그로부터 7년쯤 지나 이번에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보고 싶었지만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는데 독파로도 올라와서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독파에서도 그러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7년의 시간 동안에도 책표지는 여러 번 바뀐 듯하다. 내 경우에는 전자책으로 구매한 지라 여전히 같은 책이지만 책을 보는 기기가 달라져서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는 한다. 하지만 책 자체보다는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스토리가 어떻게 이어질까가 궁금했었고, 작가의 필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궁금했었다. 물론 천명관작가의 필력은 다시 읽어도 여전히 인정한다. 말 그대로 '찰지다'는 표현이 딱이다. 외설스러운 장면들까지도 마치 판소리나 탈춤의 해학으로 넘기듯 가볍게 넘어간다. 그런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이 작품의 독특한 특성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그런 것들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도덕, 가치관, 통념까지도 쉽사리 뒤엎어버린다. 형식도 자유자재다. 그래서 더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질주는 흐트러짐이 없다. 그러한 서사의 힘은 끝까지 이어진다. 반복되는 '~의 법칙이었다'는 마치 '그냥 그런 거지 뭐'라는 느낌으로 그 심각함을 넘겨버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장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단순히 재미로만 쓴 작품이 아닌 듯하다. 하이라이트를 쳐가며 읽었는데 완독 후 세어보니 거진 150개 정도의 문장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인생에 대한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어쩌면 천명관 작가는 이미 인생에 대한 통찰이 있었던 걸까?


걱정하지 마, 꼬마 아가씨.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자신이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춘희가 점보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자 점보가 말했다.
정말 그럴까?
춘희가 헤어지기 싫다는 듯 점보의 굵은 다리를 껴안자, 이를 위로하듯 점보는 긴 코로 춘희를 쓰다듬었다.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이 이야기는 금복에서 춘희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노파와 애꾸눈 딸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금복과의 접점을 이룬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인물들이 이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다.


비록 노파, 애꾸눈 딸, 금복, 춘희,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에서 과연 행복한 사람이 있었을까 싶지만 그들 개개인에게도 행복했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고래가 바다에서 힘차게 헤엄치듯이 나아가던 시기처럼.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고 결국엔 잡혀서 피범벅이 되어 해체되듯 그들의 삶은 또 다른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물건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탄성을 질러댔지만 금복은 왠지 자신의 살을 베어내는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생명체가 그렇게 덧없이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내장을 다 드러낸 채 해체되어 가는 고래의 처지가 마치 걱정과 자신의 처지처럼 여겨져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삼키느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구경꾼들 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주저앉아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 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금복이 가장 핵심에 있겠지만 춘희 역시 주인공이라 할 만하고, 다른 인물들 역시 주인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엉켜 거대한 덩어리로 이우러 진 것이 '고래'처럼 느껴지니까. 그래서 고래는 어느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모여 만들어진 집단의 이야기이다. 


진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 모든 호들갑은 우리의 주인공 춘희의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졌다. 그녀는 영웅도 아니었고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장인도 아니었으며 숭고한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우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어떤 삶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우리와 달랐으며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 고독 속에서 살았다. 춘희를 둘러싼 하많은 얘기들은 제 스스로 생명을 얻은 아메바처럼 무한히 확장해가고 있지만 정작 진실은 그 옛날 지상에서 사라진 무림비급처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p.s. Aisling Bea라는 배우가 낭독한 것은 아래 영상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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