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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04. 2023

이지선 <꽤 괜찮은 해피엔딩>


살아남았다. 그래서 슬펐던 날도 있었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았던 날도 있었다. 인생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깜깜해지는 동굴같이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때도 있었다. '여기가 끝이다. 더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차라리 다 끝나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들려온 "여기가 끝이 아니야"라는 작은 소리, 그리고 나 자신을 부정하고 싶던 시간에도 내 곁을 지켜준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깜깜한 동굴에서 멈추어 서지 않고 매일 하루씩 만큼을 걸어 나와 이제 "인생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라고 말하며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향해 살아가고 있다.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지선아 사랑해>를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꽤 오래 전인 듯하다. TV에서도 여러 번 봤었고, 책도 읽었기에 저자인 이지선 씨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냥 막연히 '대단한 사람이네' 정도만 생각했었다. 당시엔 그냥 그 긍정적인 마인드만 부각되었지만, '과연 그 삶에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힘들었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절망적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았다. 살아왔다. 그리고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지금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되었다.


나는 그날 이후의 시간을 살았다.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견디었고, 조금 더 쓰기 편한 몸을 갖기 위해 수십 차례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또 그 시간을 같이 버텨준 사람들을 사랑했고 사랑받으며 살았다. 어제를 돌아보며 슬퍼하기를 멈추고 내게 주어진 오늘을 살았다. 시간이 흐른 뒤 되돌아보니 나는 더 이상 나쁜 일이 일어난 그 자리, 그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작년에 이 책이 나왔다. 이 책에는 약 20여 년 간의 그의 삶이 담겨 있다. 이야기는 사고 시점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지만, 예기치 않게 '만나게 된 사고와 이제는 잘 헤어지고 새 삶을 살기 위한 분투과정이 그려졌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거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사고를 당한 사람인가. 아니면 사고를 만났지만 헤어진 사람인가. 사고와 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은 더뎠으며 몸이 아픈 만큼이나 마음도 많이 아팠지만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듯 헤어졌다. 나는 음주운전 교통사고의 피해자로 살지 않았고, 그때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머무르지 않고 매일 오늘을 살았다. 한참 시간이 더 흐르니 그날 밤의 사고는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힌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상치 못해서 피할 수 없었고 반갑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내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의 뒤통수를 잠시 째려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툭툭 털고 가던 길을 다시 가는 것처럼, 사고와 나 역시 그렇게 부딪혀 만났지만 툭툭 털고 헤어져 나는 그다음의 내 시간을 살았다. 

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다.


단지 감동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 과정은 처절했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동정을 받기 위해 그러한 길을 간 것은 아니니까. 그는 자신에게,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작은 변화와 성취들에도 감사하며 살아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꼈고, 행복한 삶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단지 힘들었던 과정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들도 보였다. 그 속에서 역시나 긍정적인 모습이 보인다. 그것이 그를 버틸 수 있게 살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들에게도 힘을 준다. 나의 상황이 힘들다고 해도 그에 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해도 절대치가 같을 수는 없으니. 그러나 '누가 더 힘든가'가 아니라 '누가 더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거라면, 그에게서 그런 방법을 충분히 배울 수도 있을 듯하다. 특별하지 않아도, 어떠한 행운이나 불행이 닥쳐오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그러한 것들은 깃들어 있으니까.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이들과 비교하며 감사할 이유를 찾지 않았고, 남들과 비교하며 더 불행해지지도 않았다.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지금 누리는 오늘에서 감사할 일을 찾았다.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는 훨씬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잃은 것보다 내게 지금 남겨진 것에 감사하고, 남보다 못 가진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길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감사와 행복은 남과 비교해서 얻는 상대적인 것이어서는 안 됨을, 좀처럼 변하지 않고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곳에서 얻어야 함을 배웠다. 


이 책에서 강조되는 다른 주제는 이해와 연대의 중요성이다. 그는 동정받기보다는 함께 힘들게 뛰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것을 원했다. '빈곤 마케팅'에 대한 거부감, 보스턴 마라톤 대회 이야기, 다른 이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인간다움'과 '공동체'를 강조했다. 그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에. 특히 인생이 마라톤과 같다는 비유를 통해 이를 보여준다.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리며 서로 돕고 응원하며 이 힘든 세상도 살아나갈 수 있으니까.


나는 동정심에 호소해서 후원자를 모으는, 소위 '빈곤 마케팅'을 이용해 모금하는 방식을 아주 싫어한다. 자립하기 위해 금전적 도움이 불가피할 때 손을 내미는 이유는 내가 불쌍한 처지라서가 아니다.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지 않을 권리가 있고 이 사회가 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정이라도 받아서 생계를 이어가야 할 처지라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어떠한 상황에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아야 하는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정심으로 누군가를 돕기보다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감과 연대를 바탕으로 인간다운 삶을 지지하는 의미로 손을 내밀면 좋겠다.
완주할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는 더 단순하다.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들 때마다 중환자 실에 있을 때보다는 덜 힘들 거라는 김황태 오빠의 말을 떠올렸다. 사실 하프 지점을 통과할 때 이미 내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니었다. 절뚝거리다가 주저앉았다가, 걷기만 하는데도 숨이 차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 더 가면 정말 죽을 것 같던 고비는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왔는데도 죽지 않았다. 잘 살아 있었다. 더 가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 더 가더라도 진짜 죽는 것은 아니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지 결코 그 길이 나를 죽이지는 않았다. 내가 그만두지만 않으면 그 레이스는 계속됐다. 가야 할 길은 42 킬로미터인데 내딛는 한 걸음은 50센티미터 남짓. 한 걸음은 참 보잘것없고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한 발 내딛고 그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일. 이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제목은 <꽤 괜찮은 해피엔딩>인데 이건 결말이 난 것이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도 힘들었고 어두웠지만, 그럼에도 끝은 있는 것이고 그 끝에는 해피엔딩이 있을 거라고,

작은 변화에도 행복을 느끼는 그의 삶에 앞으로는 행복한 일들만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해피엔딩'이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회복을 향한 걸음을 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난 일은 나쁜 일이지만 이것이 벌은 아닙니다. 이미 상처로, 스트레스로 괴로운 자신을 사실이 아닌 생각으로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상처 입은 당신이 지금 겪는 스트레스를 잘 다루고 완화시키는 일에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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