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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2. 2023

에드워드 윌슨 <통섭> #7

8장 인간 본성의 적응도, 9장 사회과학


7장에서는 '유전자에서 문화까지'를 얘기했었어요. 유전자로부터 문화로 어떻게 진행되며, 문화를 대물림하기 위한 준비된 학습 능력, 즉 후성규칙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전자.문화 공진화를 설명했었죠. 뭔가 알듯 말듯하게 얘기가 진행되다가 끊긴 느낌이었는데, 그것을 8장에서 이어받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제가 '인간본성의 적응도'라니... 이게 원문이 뭔지 모르겠네요. '적응도'라는 게 제가 생각하는 그 단어가 맞는 걸까요? 제목부터 난관입니다. 


8장의 앞부분은 7장의 내용을 부연설명하는 듯합니다.


생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은 유전자·문화 공진화에서 인과적 사건들이 유전자, 세포, 조직, 뇌, 행동의 순서를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 사건들은 물리적 환경과 기존 문화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후의 문화 진화를 편향시킨다. 그러나 그런 연쇄(유전자가 후성 규칙을 통해 문화에 행하는 작용)는 전체 상호 작용의 절반일 뿐이다. 또 다른 절반은 문화가 유전자에게 하는 작용이다. 도대체 문화가 어떤 식으로 인간 본성의 기저에 존재하는 유전자의 자연선택을 돕는가?


인간의 뇌는 환경 자극의 범람 속에서 작동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자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한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집합적 선택이 인간의 모든 것 (유전자, 후성 규칙, 마음, 문화)과 진화적 운명을 결정한다고 했죠. 또한 인간이 이렇게 진화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문화적인 요소라고 했네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했지만 인간은 거기에 더해 문화를 만들었고, 그 문화가 다시 인간의 행위를 만들어온 것이죠.


사실 유전자들은 인간의 문화, 종교에 대한 정교한 규약까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문화의 다양성을 늘리고, 넓은 범위의 반응양태를 보여왔죠. 그렇다고 해서 그 문화의 다양성이 무한한 것은 아니고 편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편향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편향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일까 싶기도 합니다. 유전적으로 그러한 존재인 건지...)


이는 인간의 조상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후성 규칙으로 인한 것인데요,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속도 차이로 인해 괴리가 생겼습니다. 집단유전학 이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변화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유전적 진화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 본성의 근본 규칙들을 계속 규정해 왔고, 문화를 따라잡지는 못해도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능이나 본성은 5만 년 전 원시인이나 현대인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하죠.


윌슨은 인간의 행동 유전자를 고려하기 위해, 즉 인간 본성의 생물학적 이해를 위해 사회생물학을 내세우고 있으며, 특히 인간사회생물학을 얘기하고 있네요. 그러면서 기본적인 진화원리가 혈연선택, 양육투자, 짝짓기 전략, 지위, 세력권 행동, 계약적 합의 등의 범주로 환원될 수 있다고 하는군요. 이 부분에서 약간 불쾌함을 느끼는 분도 계실 듯한데 일단은 그의 논리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기본 원리들이 잘 작동하게 되면 그 집단은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이는 유전적으로 얼마나 잘 적응해서 문화 속에 가장 널리 퍼지게 하고, 그 문화가 다시 유전자에게 진화적 이득을 안겨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됩니다. 윌슨이 이번장에서 얘기하려고 했던 '인간 본성의 적응도'는 '인간 본성의 유전적 적응도'라는 말인 것 같군요. 맞나요?


하지만 유전적 적응도 가설도 많은 약점이 있고, 인간행동유전학도 이렇다 할 진전이 없기에 이에 대해서는 뭐라 언급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시간이 좀 지난 지금은 얼마나 발전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요.


그러면서 유전적 적응도 가설의 예로 근친상간 회피를 드는데 이에 대한 내용이 좀 길게 이어집니다. 이 부분도 좀 불편하게 보신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이 이야기가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윌슨은 이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간의 경계문제로 끌고 가기 위해 언급한 것 같네요. 그러면서 윌슨의 입장과 유사한 것 같은 웨스터마크 가설과 프로이트의 가설을 대립시키고, 프로이트가 엉터리라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9장 사회과학으로 넘어갑니다.




9장은 사회과학을 의학과 비교하며 시작합니다. 초반부터 사회과학에 비판적이죠.


사회과학이 현재 어떤 지위에 있는지는 의학과 비교하면 분명해질 것 같다. 의학과 사회과학은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 두 영역 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통섭이다. 즉 의학은 통섭을 행하고 있지만 사회과학은 그렇지 않다. (...) 사회과학자들은 대체로 자연과학을 통일시키고 이끌어 가는 지식의 위계성 개념을 일축한다. 그들은 독립된 칸막이에 자신만의 방을 만들어 놓고 각자의 방에서만 통하는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려고만 하지 그런 작업을 좀처럼 다른 방들로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족적 충성심에 쉽게 속박된다. 사회과학 이론의 가르침 중 많은 것들은 아직도 창시자들에 얽매여 있다. 만일 과학의 진보를 그 창시자들이 얼마나 빨리 잊혀지는가로 측정한다면 이런 상황은 좋지 않은 징조이다.
사회과학은 강력한 역사적 전례의 잔재에 발목이 잡혀 있다. 사회과학의 창시자들은 고의적으로 자연과학을 무시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 당시의 사회과학자들은 자연과학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문화와 사회 조직의 양상에 대해 왕성한 연구들을 시작했으며 사회 행동의 법칙들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이런 개척기가 끝난 후에 그 이론가들은 생물학과 심리학을 아예 팽개치는 실수를 범하기 시작했다. 인간 본성의 뿌리를 외면하는 것이 더 이상 미덕일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사실 윌슨이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저러한 것들이었겠지요. 자연과학의 원리들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갑론을박하고 있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정신 차리고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통섭을 이루라!'는 일침을 가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면서 생물인류학과 문화인류학이라는 두 분야 간 대립관계를 얘기하는데 통섭을 통하지 않는다면 그 단절은 해결할 수 없다고 하죠. 비단 이러한 예 말고도 현대의 사회학은 자연과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간의 사고의 핵심체계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인 중추신경계, 유전 등의 영향을 배제해 왔습니다. 왠지 저자의 분개가 느껴지는 듯하네요. 


사회학이 과학적인 방법론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만 보일뿐 자연과학에서의 '이론'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회과학 표준모형이라는 것도 생물학이나 심리학의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환경과 역사적 전례들의 산물일 따름이니까요. 이러한 사회과학 표준모형으로 인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었고, 자연과학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과학 표준모형과 유전자 결정론 사이에는 넓은 중간 지역이 있어서 이곳에서부터 통섭을 향한 첫걸음을 시작해 보자고 하네요. 그러면서 또 '사회 이론은 아직 진정한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라'라고 하는군요. 이건 마치, 싸우고 나서 화해하자고 해놓고선 또 '네 잘못이야!'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자꾸 윌슨의 진심이 나오는 듯해요.


자연과학이 자연사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사회과학은 해석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해석학이 자연사에 대응되는 개념일까요) 그러한 해석학은 사실 자연사에 비할 수 없이 취약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연사에 비견될만한 참된 사회 이론이 없으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서로 대등하게 연결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죠.


그러나 참된 사회 이론이 없으면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소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들 내에서조차 의견 교환을 이룰 수 없다. 만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통합되어야 한다면 이 두 진영이 개별적으로 포괄하는 시공간의 규모에 따라서 두 진영이 모두 정의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과거처럼 주제에 따라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되며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윌슨은 다음과 같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간 네 개의 교량의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이를 통해 사회과학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간격을 잇는 4개의 교량이 생겼다. 첫 번째는 인지심리학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인지뇌과학 또는 뇌과학으로서 이 분야의 종사자들은 정신 활동의 물리적 기초를 분석하고 의식적 사고의 신비를 해결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인간행동유전학인데 이 분야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는 하지만 인간 행동의 유전적 기초 - 예컨대, 유전자가 정신 발달에 어떤 편향적인 영향을 주는지? - 를 밝히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교량은 진화생물학이다. 사회생물학은 진화생물학의 잡종 자손으로서 사회 행동의 유전적 기원을 설명하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네 번째는 환경과학이다. 이 분야와 사회 이론과의 관계는 일견 희박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연환경은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해 온 극장이다. 또한 인간의 생리와 행동은 그 환경에 정교하게 적응되어 있다.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과학도 이러한 틀을 고려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7장과 8장에 이어 후성 규칙이 또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좀 더 간단하게 언급됩니다. 사실 후성 규칙은 윌슨의 유전자.문화 공진화 이론의 핵심이기도 해서 계속 언급하는 것 같아요. 사회과학자들도 이러한 원리를 이해해서 연구를 하라는 것이겠죠.


후성설(epigenesis)은 개체가 유전과 환경의 공동 영향 아래에서 어떻게 발달하는지에 관한 개념으로서 원래 생물학에서 처음 나왔다. 그렇다면 후성 규칙들은 무엇인가? 내가 앞의 두 장에서 길게 한 설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감각 체계와 뇌의 선천적 작용들의 집합체인 후성 규칙은 개체가 환경에서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빠른 해결책을 찾도록 만드는 일종의 어림법(rules of thumb)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끔 선천적으로 규정하고 자동적으로 특정한 선택을 하게 한다.
후성 규칙들은 대개 감정을 통해서 작동되는데 모든 행동 범주에서 개인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빠르고 정확한 반응을 하도록 하여 결국 생존과 번식에 더 성공적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규칙들은 문화적 변이들과 조합들이 발생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사회과학적 탐구 중에서 그나마 자연과학과의 간격을 메울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것이 경제학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수학적 모형들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경제학으로부터 시작해서 한계주의, 미시경제학 시대를 지나 고전주의가 미시경제학과 결합된 신고전주의 이론까지 왔죠. 하지만 이러한 이론들은 단순하면서도 난해합니다. 이는 수학적 모형이 지녀야 할 검약성, 일반성, 통섭, 예측성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죠. 또한 경제학의 모델들은 외부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예측 정확성이 많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는 집단유전학과 환경과학과도 유사한 난점들입니다.


게다가 경제학은 통섭을 이룬 적도, 시도도 해본 적도 없다고 비판하고 있네요. 행동경제학으로 1992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리 베커의 말을 통해 경제학계의 자기비판을 부각하면서, 경제학은 이제 단순한 경제학의 원리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 합리적 선택 등도 포함시켜서 연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윌슨은 더 나아가 행동에 대한 사회과학 표준 모형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심리학적 토대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이죠. 인간의 행동은 결국 생물학적 원리를 따르게 되니까요.


이런 작업의 너머에는 미시에서 거시로 이행하는 문제, 개인의 결정이 사회적 패턴으로 번역되는 여러 과정들이 놓여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시공간적 규모가 큰 편인데, 또 그 너머에는 생물 진화가 문화에 영향을 주는 방법 그리고 문화가 생물 진화에 영향을 주는 방법, 다시 말해서 공진화의 문제가 놓여 있다. 이 세 영역 모두 — 즉 인간 본성, 미시에서 거시로의 이행 그리고 유전자·문화의 공진화 — 는 사회과학에서 심리학으로, 심리학에서 뇌과학으로, 그리고 뇌과학에서 유전학으로의 가로지르기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생물학이나 심리학에서 수행된 연구들이 경제학에서도 유용하게 적용 가능할 것이며, 이를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란 예시를 보여줍니다. 경제학에서의 효용성도 생물학과 심리학을 통해 온전히 이해될 것이라고 하고요. 이는 효용성을 인간 행동의 요소들로 환원하는 방식을 통해 상향식으로 종합할 때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런 환원주의가 효용을 다루는 경제학에서 제대로 작동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은근슬쩍 심리학도 자연과학의 범주에 넣었네요.


경제학자와 사회과학자가 좀 더 예측적인 모형을 만들기 위한 전제를 발견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생물학과 심리학이다. 이것은 생물학을 발전시킨 전제를 발견한 곳이 물리학과 화학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사회 이론 작업도 추론 과정 자체에 대한 심리생물학적 이해에 의존할 것이라고 하죠.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그 전제는 '충분한 정보와 시간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인간은 어림법에 따라 판단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불완전해지기도 합니다. 


또한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두뇌는 간단한 수와 비율을 다루도록 진화했지 추상적이고 정량적 추론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처리하도록 진화하지 않았기에 인간의 사고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 앞에서 사회과학은 어쩌면 자조적일 수도 있겠고, 여기 나온 철학자들의 말처럼 비관적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윌슨은 '답정너'네요. 자연과학의 성공이 부럽다면 자연과학의 손을 잡으라고요.


그렇게 9장도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소 많은 분량을 읽고 정리하느라 뭔가 두서없는 것 같은데요, 사실 9장의 내용도 좀 산만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긴, 앞에서부터 계속 그래왔으니 이제 적응될 만도 하건만, 아마 이 책 다 읽을 때까지도 적응이 안 될 것 같습니다. ㅋ


그래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 지, 그가 사회과학에 얼마나 비판적인지도 알겠습니다. 그가 곳곳에서 드러내는 사회과학에 대한 비난, 자연과학자로서의 자부심, 우월감 등등... 그래서 그가 사회과학자, 철학자들에게 더 공격을 받는 것이겠지요. 어디까지나 자연과학이 위에 있으면서 사회과학을 아래에 놓고 얘기하는 듯하니까요. 일단 그런 자세이니 사회과학 쪽에서 통섭을 하고 싶을까요? 설사 윌슨이 좋은 의도로 손을 내밀었다고 한들 그 손을 잡고 싶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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