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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2. 2023

에드워드 윌슨 <통섭> #8

10장 예술과 그 해석


윌슨은 이제 예술 영역까지 통섭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려 합니다. 이는 예술도 과학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죠. 예술은 인문학을 총칭하는 넓은 범위의 용어이지만, 이 책에서는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범위의 예술 (음악, 미술 등)로 한정 짓고자 하는 듯합니다.


예술은 때로 모든 인문학을 총칭하기도 한다. 즉 창조적 예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79~1980년의 인문학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역사, 철학, 언어, 비교문학, 법률학, 비교종교학 그리고 “인문학적 내용을 가지고 인문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사회과학의 여러 측면들”을 모두 포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이며 직관적으로 창조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즉 ars gratia artis는 가장 광범위하고 유용하게 사용되는 정의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윌슨은 예술에 대한 근원적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예술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에 이른다. 하나는 예술이 역사적·개인적 경험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하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참됨과 아름다움이라는 그 본질적 속성이 일상 언어를 통하여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문제들은 예술에 대한 해석과 학문적 분석 그리고 비평 활동 등의 핵심적 주제가 되고 있다.


즉, 예술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그것을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죠. 이번장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술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예술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과학이 예술을 밀어낼 것이라는 우려도 있겠죠. 하지만 윌슨은 '과학이 번성하면 예술이 쇠퇴할 것이라고 가정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과학과 예술의 유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과학이 예술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나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적 과정을 환원주의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미래의 예술이 가질 창조성과 우수성에 관해 그 어떤 본원적 한계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과 과학의 동맹 관계는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그것은 해석을 매개로 하여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예술 모두 서로의 힘을 합치지 않고는 완성될 수가 없다. 과학은 예술의 직관과 은유의 힘을 필요로 하며 예술은 과학으로부터 신선한 수혈을 필요로 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예시를 드는데요, 밀턴의 <실낙원>을 통해 그가 어떻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이 어떻게 그러한 작품들을 남길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도 했죠. 그에 대한 그의 답은 '후성 규칙'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또 등장했네요. ㅋ


정도는 다를지라도 모든 사람은 공통적으로 예술적 영감을 가지고 있다. 이 예술적 영감은 인간 본성의 분수에서 솟구쳐 올라온다. (...)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그것들을 이끌어 낸 후성 규칙들을 탐구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후성 규칙들은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즉, 인류가 진화하면서 형성된 후성 규칙이 인간에게 예술적 영감을 부여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부류들도 있는데 해체주의를 주창한 포스트 모더니즘 (앞에서도 나왔던)은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거부한 채 혼돈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학적 세계관에서 보면 '극값'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에드먼드 윌슨은 이와 같은 예술의 영원한 진동의 진폭이 줄어들기를 희망했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은 여러 예술 영역 중에서 평형 상태, 즉 안정된 상태를 찾아가고자 하는 성향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이는 고전이 갖고 있는 평형 상태 때문이라고 하죠.


예술이 그렇게 큰 진폭의 진동을 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성향인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의 대립', 즉 '차가운 이성과 열정적 방종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다른 말로 하면 '냉정과 열정사이'일까요? 게다가 인간 정신의 물질적 과정을 기저에 놓게 되면 과학과 예술 간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이는 기존에 연구된 것들을 바탕으로 할 수도 있겠죠.


만일 뇌과학, 심리학, 진화생물학의 통섭적 연구를 통해 뇌의 기능들이 도표로 정리되면 그 부산물로서 예술에 대한 영속적 이론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창조적 정신을 이해하려면 과학자와 인문학자 간의 공동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자연과학이 예술에 대한 해석을 강화시켜 줄 것이라고 하는군요. 여기서 이번장은 '예술 그 자체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보다는 '예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앞에서도 언급됐던 유전자.문화공진화 이론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용어 역시 이 책의 핵심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윌슨은 자신의 이 이론을 설파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고, 사회과학 및 여러 분야 (문화, 예술, 윤리, 종교까지)에 적용해서 검증하고자 했네요.


유전자·문화의 공진화는 뇌의 진화와 예술의 기원의 기저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공진화는 뇌과학, 심리학 그리고 진화생물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과정이다. 물론 예술과 관련된 직접적 증거는 여전히 빈약하다. (...) 그러나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즉 총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강력한 힘을 가진 인간 본성에 대한 점증하는 증거들 - 주로 마음의 발달에 집중되고 있는 증거들 - 은 예술에 대한 보다 전통적인 견해에 호의적이다.


생물학적 이해가 예술에 대한 학문적 해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 어떤 과학도 결코 창조적 예술을 가둘 수는 없다고 하는군요. 이는 심미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을 절묘하게 강화함으로써 인간 경험의 복잡한 세부 사실들을 전달하는 행위가 바로 예술의 독점적인 역할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윌슨도 예술의 가치 혹은 역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전히 과학이 예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뇌가 어떻게 예술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뇌의 유전적 진화는 몇몇 특별한 능력을 예술에 부여했는데 특히 은유를 통해 그 맥락들 사이에서 유동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능력이 중요했다고 하죠. 여기에 수학적 알고리듬 역시 예술에서의 창조적 과정에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과학 또는 수학과 예술 간의 유사성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죠.


어쨌거나 예술도 결국엔 실재 세계에서 출발하지만 그 결과물은 가능한 모든 세계, 아니 우주 만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진 '심미적 보편자'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데요, 아무리 창조적이라고 보이는 작품들 혹은 언어(중국의 한자)도 결국엔 인간의 뇌의 작동에 의한 것이자 진화의 산물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창조적 능력에 대해 우리는 진정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의 물리적 기초에 대한 설명은 과학과 인문학의 접점에서 발견될 것이다. 과학의 편에서 제시할 수 있는 한 가지 전제는 우선, 호모 사피엔스가 생명과 관련 있는 풍부한 환경 속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탄생한 하나의 생물학적 종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전제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인간 뇌에 영향을 주는 후성 규칙들이 인류 진화사에서 구석기인의 필요에 따라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예술적 재능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있었지만 (동굴의 벽화 등의 예시를 들며) 수 천년 간의 역사를 통해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고 강화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는 구석기시대의 원시인들과는 크게 다를 바는 없다는 것이죠. (토템의 예시를 들며) 문화, 그리고 예술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이 점이 예술에 우리의 눈을 다시 돌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인간 본성의 후성 규칙들이 혁신과 학습 그리고 선택을 편향시킨다. 이 규칙들은 마음의 발달을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중력 중심이다. 바로 이 중심에 도달한 예술가, 작곡가, 그리고 작가들은 수세기 동안 원형, 즉 독창적인 예술 작품 속에 가장 예측 가능하게 표현되는 테마들을 창조해 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이 인간의 진화에 어떤 이득이 있었기에 인간은 이렇게 예술적인 재능을 갖게 된 것일까요? 이는 앞에서도 인간의 정신적인 세계가 니치를 넘어선, 사실상 과잉된 것이라는 것과도 유사할 것 같은데요, 명확하진 않아도 이러한 문화와 예술이 인간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만약 예술이 정신적 발달의 선천성 규칙들의 조종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통적 역사뿐 아니라 유전적 진화의 최종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즉 유전적 지침(genetic guide)이 단순히 부산물(부수 현상)이었을까, 아니면 생존과 번식을 직접적으로 향상시켰던 적응(adaptation)이었을까? 그런데 만일 그것이 적응이었다면 정확히 어떤 측면에서 어떤 이득이 되었단 말인가?


다음은 예술의 기원에 관해 최근에 등장한 견해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는 가장 특징적인 속성들로는 고도의 지성, 언어, 문화 그리고 장기적인 사회 계약에 대한 의존성 등이 있다. 이런 속성 집합들로 인해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는 경쟁하던 다른 모든 동물 종들보다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속성을 얻게 되면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예를 들어 자아 인식의 충격, 개인적 존재의 유한성 그리고 환경의 혼돈 등이 그것이다.


예술은 지성이 야기한 혼돈에 질서를 부과할 필요성 때문에 탄생했다. (...) 진화가 진행되는 동안 생존과 번식의 동물적 본능은 인간 본성의 후성적 알고리듬(epigenetic algorithm)으로 전환되어 갔다. 그리고 언어와 성적 행동을 비롯한 정신적 발달 과정들이 빠르게 획득되기 위해서는 이 선천성 프로그램들이 제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 (...) 자연선택의 느린 속도 때문에 - 새로운 유전자들이 낡을 것들을 대체하는 데에는 수만 세대가 걸린다. - 인간의 유전은 고도의 지성이 열어 보인 새롭고 우연한 수많은 가능성들에 대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 이런 간극을 메운 것이 예술이다. 초창기 인간들은 마술을 통해 환경의 풍요로움과 연대의 힘 그리고 생존과 번식에 가장 중요했던 여타 힘들을 표현하고 통제하고자 예술을 창안했다.


즉, 예술은 지성이 야기한 혼돈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 속도 차이에 의한 간극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기도 합니다. 결국 예술을 창조해 내고 이해하는 능력을 통해 개개인의 인간은 원래 갖고 있던 5만 년 전의 인간의 속성으로부터 현대인으로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여전히 원시인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겠다고 들리는군요? 


예술의 생물학적 기원 가설은 후성 규칙들이 실재하는지, 그리고 그 규칙들이 만들어 내는 원형들이 어떤 것인지에 의존한 하나의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이다. 이것은 자연과학의 정신 속에서 구성되어 왔다. 즉 이 가설은 입증이나 반증이 가능하며 생물학의 다른 부분들과 통섭적이다. 그렇다면 이 가설은 어떤 식으로 검증되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예술 속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과 그 밑바탕에 놓인 후성 규칙들을 진화론적 입장에서 예측하는 것이다. (...) 예술에 영향을 미치는 후성 규칙들을 발견해 내는 또 다른 방법은 신경과학과 인지심리학적 기법을 통해 그 규칙들을 직접 검사해 보는 방법이다.


저자는 예술의 이해를 위해 후성 규칙 얘기를 다시 꺼냅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 얼굴의 아름다움 분석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이러한 얘기는 많이들 들어보셨을 텐데요, 인간이 그러한 심미적 기준을 갖게 된 것이 '안정화 자연선택'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이것이 진화가 일어나는 동안의 기준이 된다고 하는데요, 반면 '초정상 자극'에 대한 이야기도 합니다. 동물들은 평균적인 것을 선호하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신호를 보내는 대상이 있다면 그쪽으로 끌린다는 것이죠. 이것들 역시 후성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라는데요, 마치 '이왕이면 다홍치마'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오지의 원주민들의 사례를 통해 자연에 대한 경외와 신비로움이 어떻게 세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데 이는 문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자 덕분에 과학이 발달할 수도 있었고요. 이는 위에서 얘기했던 두 가지 질문 중에서 '예술이 일상 언어로 어떻게 기술되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것 같네요.


큰 척도에서 보면 신화와 열정이 가득했던 고대 세계도 오늘날처럼 전 범위의 원인과 결과들로 인식될 수 있다. 모든 지형과 그 속에 사는 모든 동식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인간의 지성도 결국 물리적 실체들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조상들의 본능적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독특한 니치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처음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미감과 신비감을 간직한 채 수많은 예술품들을 즐길 수 있다. 과학의 물질세계와 수렵인과 시인의 감수성 사이에는 그 어떤 장벽도 없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가진 예술적 재능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진화를 통해 습득한 것이며,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는 아직은 불분명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 후성 규칙이 작동했고, 유전자.문화 공진화 과정에서 혼돈의 간극을 메워주었던 것이죠. 또한 과학을 통해 예술을 좀 더 잘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예술도 과학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에 예술분야에서도 자연과학과의 통섭이 필요하겠다는 내용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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