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윤리와 종교
사회과학적인 주제들을 생물학을 통한 통섭으로 각개격파해 오던 윌슨은 이제 거의 끝판왕 격인 윤리와 종교까지 왔네요. 일단 11장의 앞머리에서 윤리와 종교에 대해서도 통섭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필합니다.
윤리의 기원에 대한 수세기 동안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쟁점들로 귀착된다. 정의나 인간의 권리와 같은 윤리적 격률들이 인간의 경험과 무관하게 독립적인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 낸 창안물인가? (...) 어느 가정이 옳은가 하는 것은 순수 논리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올바른 해답에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의 축적을 통해서일 것이다. 나는 도덕 논증이 모든 수준에서 자연과학과 본질적으로 통섭적임을 믿는다.
이번장에서도 철학에 대한 내용이 조금 나왔고, 종교에 대한 내용도 좀 나왔죠. 하지만 앞에서 나왔던 내용보다는 오히려 더 수월했을 수도 있는데요, 이는 전반적으로 대립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초월론과 경험론, 유신론과 무신론, 창조론과 진화론 등의 대립관계로 볼 수 있겠죠.
윌슨은 그러한 대립관계를 크게 초월론과 경험론으로 구분해서 보았고, 초월론에 종교와 윤리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초월론이 신에 신에 호소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이는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개념들은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적 확신과 비종교적 확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윤리적 초월론자의 확신과 경험론자의 확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유 속에서 서로 가로질러 교차되는 결정이다. 즉 윤리가 독립적인 것임을 믿는 윤리적 초월론자는 무신론자일 수도 있고 신의 존재를 가정할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하게 윤리가 인간의 창안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윤리적 경험론자 또한 무신론자이거나 창조자로서의 신을 믿을 수 있다.
특히나 초월론이 종교, 즉 신성과 함께 호소될 때의 결과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가 만들어낸 것들을 많이 보아왔으니까요.
이 책에서 윌슨의 확신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이 경험론자임을 밝히고 있고, 내용도 전반적으로 그러한 쪽의 주장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한 경험론을 통해 윤리에 대해서도 좀 더 간결하고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이신론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론을 더 진지하게 취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경험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윤리는 사회 전체를 통해 한 가지 코드의 원리들로 표현되기에 충분할 만큼 일관적으로 선호되는 행위를 일컫는다.(...)
경험론적 관점의 중요성은 그것이 객관적 지식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윤리적 코드의 성공 여부는 그것이 도덕 감정을 얼마나 현명하게 해석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 코드의 틀을 만드는 사람들은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또 정신이 어떻게 발달하는지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즉, 넓게 보아서 종교를 포함하는 윤리에 대해서도 경험론적으로, 보다 궁극적으로는 생물학을 기반으로 해서 이해를 해보자는 것이 이번장의 핵심이 되겠지요.
그러면서 초월론자의 입장과 경험론자의 입장을 기존의 문헌들을 기초로 해서 재구성했는데요, 이는 앞서 말했던 유신론과 무신론, 창조론과 진화론의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각각의 주장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경험론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이후에는 일관되게 경험론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수천 세대 이상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것들은 그 부족의 신앙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생존과 번식 성공 가능성을 높여 왔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감정들을 낳았던 후성 규칙들 - 정신 발달의 유전적 편향들 - 이 진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교의(doctrine)를 만드는 능력’이 하나의 본능이 된 것이다. 윤리적 코드들은 정신 발달의 선천적 규칙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루어진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격률들이다. 종교는 한 민족의 근원과 그들의 운명 그리고 왜 그들이 특정한 제식들과 도덕적 코드들에 동의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의 앙상블이다.
그는 윤리적인 규범들이나 종교의 교의들도 인류의 진화 (특히, 유전자.문화 공진화의 관점에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것들은 일부 우리의 본능 속에 잠재되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후성규칙에 의해 발전되어 왔고, 신화나 종교적 경험 등을 통해 강화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윤리와 종교가 강해지다 보니 거부할 수 없게 되어 버리기도 했고요.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칸트의 예를 들기는 했지만 그러한 윤리적 규범들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뇌의 작동 기제와는 연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인간의 본성, 마음, 문화, 예술 등을 보아 오면서 그 가운데 뇌의 역학을 함께 보고자 했었는데요, 윌슨은 그것을 같이 고찰하는 것이 중요한 통섭의 과정임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죠. 윤리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고요.
자연과학들에 대한 통섭적 관점에서 보면 윤리적 격률은 사회 계약의 원리들이 규칙들과 명령들로 굳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회의 성원들이 다른 이들도 이에 따르기를 바라면서 기꺼이 공동선을 위해 받아들이는 행동 코드들인 것이다. 격률은 공적 감정에 대한 가벼운 찬성에서부터 법률을 거쳐 신성하고 불변의 것이라 간주되는 정전에 이르는 동의의 단계들 중 제일 극단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윤리적 격률은 행동코드들이 규칙과 명령들로 굳어진 것인데 그 강도는 가벼운 것에서부터 절대적인 것까지 다양합니다. 우리의 의식 또는 사회적으로 그러한 것이 생기는 과정을 '간음'의 예를 들어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초월론적 사유에서는 인과의 사슬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즉 종교나 자연법칙에서 주어진 당위로부터 법률 체계를 거쳐 교육으로 내려가고 최종적으로는 개인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초월론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일반적 형태를 취한다. 신적 또는 자연적 질서에 내재하는 하나의 최고 원리가 존재하며, 우리는 그 원리를 알아내어 거기에 합치하는 수단을 발견할 만큼 현명하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경험론자의 관점은 객관적으로 고찰될 수 있는 윤리적 논증의 기원을 탐색하며 인과 사슬의 방향을 전도시킨다. 개인은 일정한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생물학적 성향을 지닌 존재로 간주된다. 문화적 진화를 통해 어떤 선택들은 격률들로 정착되고, 그다음에는 법률들로 굳어지며, 만일 그 성향 또는 강제력이 충분히 강력해지면 신의 명령이나 우주의 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으로 고착된다. (...) 경험론적 관점은 도덕적 코드들이 인간의 본성 중 어떤 성향들에는 잘 순응하고 다른 성향들은 억누르도록 고안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당위는 인간 본성의 번역이 아니라 공공 의지의 번역이다. 그리고 이 공공 의지는 인간 본성의 요구와 유혹을 이해함으로써 점점 더 현명해지고 안정적으로 될 수 있다.
이러한 초월론과 경험론의 합치는 가능할까요? 사실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인간에게 '믿음'만큼 맹목적이고 또 부질없는 게 있나 싶으니까요. 그건 죽음도 불사하게 만드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그 믿음을 저버리라고 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도 더 치욕스러울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그런 윤리나 종교도 윌슨이 주장하는 관점에서 보는 연구들도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몇몇 연구자들이 이제야 바로 그와 같은 근본적인 탐구를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윤리적 코드들이 생물학과 문화의 상호 작용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 도덕 감정은 현대 행동과학에서 정의되는 바의 도덕적 본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본능의 귀결에 따른 판단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런 감정은 후성 규칙들, 즉 정신 발달의 유전적 성향들로부터 유래되는 것으로, 보통 감정에 의해 조건 지워지며 개념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결정들에 영향을 미친다. 도덕적 본능의 기본적 기원은 협동과 배신 간의 역동적 관계이다.
결국 그러한 것들도 모두 후성 규칙들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죠. 거기에 덧붙여 윤리, 도덕이 협동관계에서 비롯되며, '죄수의 딜레마'에서 보듯이 인간들은 결국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남는데 더 유리했기 때문이죠. 이것이 우리의 유전자에도 남아 있는 것이고요.
도덕적 소질이 유전된다는 증거 외에 협동 성향을 지닌 개인들이 일반적으로 더 오래 살아남고 더 많은 후손을 남긴다는 풍부한 역사적 증거도 있다. 여기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진화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협동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유전자들이 전체 인류에서 우세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이 수천 세대를 내려오면서 반복되면 도덕 감정은 불가피하게 생기기 마련이다. 아주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이런 본능들은 양심, 자존심, 자책감, 공감, 수치심, 겸손, 도덕적 분노 등의 다양한 형태로 모든 개인들이 생생하게 경험한다. 이런 본능들은 명예심, 애국심, 이타성, 정의, 동정심, 자비, 구원 등의 보편적인 도덕적 코드들을 표현하는 관습들이 형성되는 방향으로 문화적 진화를 몰고 간다.
이러한 이유로 윤리와 도덕, 종교가 생기긴 했지만 사실 그것들이 애초의 목적과 방향성대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점에선 의문이 듭니다.
사실 저는 윤리나 종교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고 생각해요. 어느 시대나 안정을 추구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있었는데 그것은 정치가 될 수도 있고 종교가 될 수도 있었겠죠. 물론 그 안정이나 질서가 누구의 관점에서인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졌죠. 사실문제를 야기한 것은 정치와 종교였고, 인류의 역사에서 윤리와 종교는 지배계층의 지배논리로 이용되어 온 경우도 많았고요.
성장 중인 농경 사회는 처음에는 평등 사회였다가 점차 계급 사회로 변해 갔다. 잉여 농산물을 바탕으로 부족 사회에서 점차 국가로 발전해 나가면서 세습 군주와 성직자 계급이 권력을 획득했다. 낡은 윤리적 코드들은 점차 강제적 규율로 탈바꿈했으며 어김없이 지배 계급의 이익에 기여했다. 이 즈음에 입법자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신의 명령은 윤리적 코드들에 대해 강력한 권위를 부여했으며 이 또한 지배자의 편에 섰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윤리와 종교를 좀 더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생물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한 증거를 바탕으로 해야 당위성이 확보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러한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된 단계이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서도 기존 철학계와 종교계의 반발은 엄청나게 거셀 것으로 보입니다.
윤리학이나 정치학 모두 자연과학에서 인증된 이론의 세례를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 본성에 대한 검증 가능한 지식을 그 바탕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과적 예측과 이것에 기반을 둔 건전한 판단을 산출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윤리적 행동의 심층적 근원들에 대해 더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확실히 현명한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은 기획에 있어 지식의 가장 큰 공백은 도덕 감정의 생물학이다. 머지않아 다음과 같은 주제들에 주목함으로써 도덕 감정의 생물학이 이해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도덕 감정의 정의
· 도덕 감정의 유전학
·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 작용의 산물인 도덕 감정의 발달
· 도덕 감정의 심층적 역사
만약 생물학에서 축적된 객관적 증거가 경험론을 지지한다면 통섭은 인간 행동에 관해 가장 문제가 되는 영역들에서 성공한 것이며 이렇게 되면 이것을 어디에나 적용하기 쉬워진다. 그러나 만일 객관적 증거가 경험론과 모순되는 부분이 생긴다면 보편적 통섭은 실패할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과학과 인문학 간의 구분은 영속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와 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온 바가 있다면, 그것은 열정과 욕망이 진리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마음은 신을 믿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것은 생물학을 믿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뇌가 진화하고 있던 선사 시대에 큰 이점을 제공했다. (...) 이 두 믿음 체계(종교와 생물학)가 실질적 차원에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불편하지만 진리이다. 그 결과 지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를 동시에 열망하는 사람들은 결코 이 양자 모두를 완전하게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초월론과 경험론, 그리고 여러 세계관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제안을 합니다. 역시나 그가 주장해 왔던 것들의 반복이긴 하지만 말만큼이나 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조차 형성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요.
끝으로 나는 세계관들 사이의 갈등이 어떻게 해소될 것인가에 대해 주제넘는 제안을 해 보려 한다. 윤리적·종교적 믿음의 유전적·진화적 기원이라는 개념은 복잡한 인간 행동에 대한 지속적인 생물학적 연구들을 통해 검증될 것이다. 경험론적 해석은 감각계와 신경계가 자연선택 혹은 그 밖의 순수한 물질적 과정에 따라 진화해 온 것으로 판명되는 범위 내에서 지지될 것이다. 또한 앞서 기술된 바 있는 본질적 연결 과정인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가 검증되면 더 큰 뒷받침을 받게 될 것이다.
(...)
이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윤리적·종교적 현상들이 생물학의 성과에 맞는 방식으로 진화해 온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특히 그런 복잡한 행동들이 감각계와 신경계 속의 물리적 사건들과 연결될 수 없다면, 그만큼 경험론적 입장은 입지를 잃을 것이며 오히려 초월론적 설명이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주제들까지 통섭적으로 보려는 그의 시도는 다소 허무맹랑하면서도 발칙해 보이기까지도 합니다. 아니면 순수한 학문적 열정일까요? 물론 그러한 것들도 무신론, 유물론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종교적 초월론과 과학적 경험론 중 어떤 세계관이 우세한 지는 인류가 미래를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면 모종의 화해에 이를 수도 있다. 즉 한편으로는 윤리와 종교가 여전히 너무 복잡하여 오늘날의 과학만으로는 깊이 있게 설명될 수 없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와 종교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율적인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인류의 현재 모습은 과거와 얼마나 달랐고, 또 미래는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의 유전자 속에, 본능 속에, 그리고 집단 속에 숨어 있는 윤리, 도덕의식들이 인간을 협동하게 만들고,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지만 많은 문제도 만들어 왔습니다. 자연과학을 통해 그러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여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증거를 모아 당위성을 확보해 보자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온 평행선의 궤도를 살짝 틀어서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