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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Aug 22. 2023

에드워드 윌슨 <통섭> #10

12장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마도 다들, 과연 이 책이 어떻게 마무리될까, 12장에서는 결말을 어떻게 낼까 궁금하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본문의 내용에 조금 당황하셨을 것 같긴 합니다. 12장의 내용은 예상을 많이 빗나갔으니까요.


일단 초반은 통섭에 대한 정리를 하는 듯합니다. 윌슨은 책 전반을 통해서 통섭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것이 각 분야에 어떻게 적용되어 통섭을 이룰 수 있는지, 혹은 통섭을 이용할 수 있는지를 보였지만 저는 아직도 그 통섭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자연과학, 특히 (진화)생물학을 기반으로 해서 학문, 분야 간 해석, 가교를 놓는 것의 가능성을 비쳤지만요. 그것도 환원주의라 비판을 받을 지라도요.


나는 본래 단 한 가지 부류의 설명만이 있다고 논증했다. 그 설명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수준의 시공간과 복잡성을 넘나들어 결국에 통섭이라는 방법으로 여러 분과들의 흩어진 사실들을 통일한다. 통섭은 봉합선이 없는 인과 관계의 망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통섭은 자연과학의 모유였다. 현재는 뇌과학과 진화생물학이 이런 방법론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사실 이 두 분과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잇는 교량 역할을 가장 잘하고 있다. 통섭적 설명이 학문의 모든 갈래들에 똑같이 적용된다는 명제를 지지하는 증거들은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그 명제를 거부해야만 할 증거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통섭 세계관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현상들 — 예컨대, 별의 탄생에서 사회 조직의 작동에 이르기까지 — 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이 공통 유래를 통해 모든 다른 생명들과 친척 관계에 있다는 생물학적 결론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윌슨은 통섭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갑니다. 약간 격분한 듯한 느낌도 듭니다. 책을 쓰는 동안 마음에 맺힌 것들이 많이 생각나셨나 봅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영역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이미 밝혀진 성과들을 기반으로 해서 해결해 보자는 제안도 합니다. 그게 통섭이라는 거죠.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이 책의 부제는 과대광고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읽은 것을 바탕으로 약간의 의미라도 찾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동일한 전략을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통합하는 데 써서는 안 되는가?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다. 두 영역 간의 차이는 단지 문제의 크기 차이일 뿐 문제의 해답을 찾는 데 필요한 원리들의 차이는 아니다. 인간의 조건은 자연과학의 가장 중요한 미답지이다. 역으로 자연과학에 의해 드러난 물질세계는 인문·사회과학의 가장 중요한 미답지이다. 그렇다면 통섭 논증은 다음과 같이 압축될 수 있다. 두 미답지는 동일하다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연과학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책에서 내내 보아왔던 것이라 이젠 그러려니 하게 됩니다.


그러다 뜬금없이 '우리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번장의 부제가 그렇게 나왔나 봅니다.

교양을 위한 이러한 시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특이한 열정적 활동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왜 인간을 정의하는 것들은 고생, 열망, 정직, 칭찬, 사랑, 미움, 사기, 똑똑함, 오만, 겸손, 부끄러움 그리고 멍청함 등과 같이 서로 이질적인 것들일까?


이에 대한 답은 신학도 줄 수 없고, 철학도 줄 수 없으며 과학과 인문학의 연합을 통해 가능할 것이고 그것이 교양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통섭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에게 <파우스트>의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마치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거래를 하는 것처럼 통섭이 작용할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러한 거래를 제대로 하기 위해 통섭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죠.


인류에게 파우스트적인 선택은 두 번 있을 수 있는데 한 번은 오래전에 있었던 '진보의 래치트'이며, 또 한 가지는 앞으로 다가올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진보의 래치트를 통해 인류는 지식의 획득, 인구의 증가, 환경의 변화를 이끌어왔으며, 미래에는 유전적 진화를 넘어서 인간종의 생물학적 본성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요. 인간은 스스로 진화하고, 그 방향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유전체공학을 이용해서 신의 반열까지 오르려고 하겠죠.


하지만 이런 거래는 끝이 좋지 않습니다. 파우스트처럼 구원받기도 어렵겠지요.


정말 자유로운 최초의 종인 호모 사피엔스는 우리를 만들어 낸 자연선택을 해제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의지 바깥에는 유전적 숙명도, 우리의 갈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별도 없다. 인간 본성과 인간 역량의 유전적 진보를 포함하는 진화는 이제부터 도덕적·정치적 결정으로 조절되는 과학 기술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 우리는 곧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어떻게 되고 싶은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은 끝났다. 이제 메피스토펠레스의 진짜 음성을 듣게 되리라.


윌슨은 인간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달려가는 동안 후성 규칙에 충실할 뿐 인류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아가는 목표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그리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요.


이후부터는 환경문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격차 문제, 기후 온난화 문제, 인구문제, 생물 다양성 문제 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이 책에서 나오는 것이 다소 동떨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는 인류의 미래를 고찰할 때 그러한 문제들을 별개로 놓고 얘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평생의 신념이기도 했으니까요. 또한 그만큼 다급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예측했던 25년 뒤는 이미 왔고, 조금 유예되고 있을 뿐 가속도는 줄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면서 수련의 예를 들죠.


그들과 우리 대부분은 이제 수련 연못 산수 수수께끼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연못에 수련 잎이 하나 있다. 매일 수련은 두 배로 불어난다. 30일째 되는 날 연못은 완전히 수련으로 뒤덮여서 더 이상 자랄 수 없게 되었다. 연못이 반만 덮이고 반은 비어 있던 날은 몇 번째 날인가? 바로 29일째 되는 날이다.


특히 인구증가와 그에 비례하는 생물학적 고갈, 즉 생물 다양성 문제에 대해서 더 큰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세계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는데도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제가 어릴 때 세계인구가 50억 명이 안 되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급속한 증가이긴 하네요.


인구 성장은 육지의 괴물이라 불릴 만하다. 이것을 길들여야만 우리는 좁은 통로를 통과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 이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인류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좁은 통로는 단단한 벽으로 막히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통과해 나가면서 맡아야 할 또 하나의 책임이 있다. 그것은 다른 생명들을 최대한 많이 우리와 함께 데려감으로써 이 세계를 보전하는 것이다. 생물 다양성 — 생태계에서부터 생태계 내의 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거기서 종 내의 유전자에 이르기까지의 총체 — 이 위기에 처해 있다. (...) 현재 진행되는 생물 다양성의 손실은 6500만 년 전 중생대 말 이래로 최대 규모이다. (...) 현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발작적인 멸종 행위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완화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21세기에는 신생대의 종말을 볼 것이며, 새로운 생명 형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고갈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통섭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들은 그러한 해결과정을 위한 것이기도 할 것이고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탐구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대안은 통섭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통섭에 대한 탐색은 처음에는 창조성을 구속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반대가 맞다. 통합된 지식 체계는 아직 탐구되지 못한 실재 영역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이것은 이미 알려진 것에 관한 명확한 지도를 제공하며 미래 연구를 위한 가장 생산적인 질문을 창안한다.
(...)
나는 창조적 사고의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실존적 보수주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 질문은 반복될 가치가 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근원은 어디인가?
(...)
우리가 나머지 생명을 추방해 버리는 만큼 우리는 영원히 인류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잔머리를 굴려 우리의 유전적 본성을 포기하고 만다면 그리고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고 오래된 유산을 방기하며 진보라는 이름 아래 도덕, 예술, 가치를 내동댕이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인류에 대한 경고로 마무리가 됩니다. 앞서 얘기했던 대로 다소 예상 밖의 결말이긴 한데요, 통섭으로 무장하고 지식을 확장한들 인간이 현재와 같다면 파국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옛 현인들은 '공부에 앞서 먼저 인간이 돼라'라고 하셨겠죠. 그건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겠지만,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경계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식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도 그 부작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국내에 이 책의 번역본이 나올 때쯤에는 통섭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사용되기도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통섭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윌슨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고,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사용되는 것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의 당시 특수한 상황, 즉 모든 것을 자기 계발이나 산업과 결부시키고자 했던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스스로 통섭학자를 자처하고 나선 최재천 교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본인은 1년 가까이 고민했다고 하지만) '통섭'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원래의 의미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요. 또한 <통섭>을 바탕으로 하는 책들 (주로 최재천 교수 저서) 및 비판하는 논문이나 책들도 많이 나왔었네요.


그나마 2010년대 중반부터는 그러한 열기도 사그라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간간히만 얘기되고 있는 듯하기에, 지금 와서 이 책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다소 시기가 지난 듯하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이 책을 낸 다음에는 이에 대한 언급을 그다지 많이 하지는 않은 듯하고, 후속작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은 어쩌면 다 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통섭은 무엇이었을까요? 통섭은 어찌 보면 '바벨탑'을 쌓는 것과도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결국 지식의 대통합을 막으려는 누군가가 결국 학문들을 다시 원래대로 찢어놓을 것 같은 예감도 듭니다.


<통섭>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통섭'이 수단인가 목적인가, 과정인가 결과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은 '통섭'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는데 두 번 완독 한 후 깨달은 것은 수단이자 과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통섭을 이용한 학문 간 연계 (통합은 너무 거창하고 요원해 보이는 것이고요)를 해보자는 제안 정도인 것 같아요. 이는 학문의 과정으로 보면 'conceptual design' 혹은 'proof-of-concept study' 정도가 될까요? 


물론 가능성만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든 일은 그러한 적은 가능성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 다듬어지고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겠죠.


다만, 윌슨이 제시한 생물학 기반의 통섭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 제가 물리학, 공학 기반이라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듯한데요, 그래서 적용 가능한 범주를 위주로, 가능성 있는 방법을 기술한 것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 책의 번역은 최재천 교수와 장대익 교수가 맡았습니다. 어떻게 나눠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대했던 바에 비해 번역이 아쉬웠다는 평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우리말과 용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이었기에 그러한 점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하네요. 


과학, 학술분야의 경우에는 용어도 중요하고, 전문용어와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 간의 선택도 중요합니다. 뜻도 명확하게 전달하면서 쉬운 단어, 문장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잘 풀어내는 것이 번역자의 역할이니까요.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함께 읽은 분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고, 책의 내용 이상의 소득도 있었습니다. 댓글의 내용을 모두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요.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ebook 카페의 '알쓸통잡'을 검색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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