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일련의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 협력, 또는 타인에 대한 긍정적인 행동으로 대략 정의할 수 있는데, 다정함이 자연에 그렇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속성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 다정함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는 단순한 행동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협력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등의 복합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를 읽다가 연관된 도서로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 브라이언 헤어는 듀크대 교수이며, 진화인류학, 심리학, 신경과학분야를 연구했네요. 동물, 특히 개에 대한 연구가 많았습니다. 버네사 우즈는 연구원이자 저널리스트이며 브라이언 헤어와 함께 공동 연구 및 집필을 해오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경력 및 분야로 미루어볼 때 이 책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어느 정도는 결론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죠.
이 책은 나올 당시부터 '다윈의 진화론은 틀렸다'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기에 기억에 남았던 책인데요, 읽어보고 싶었지만 미뤄지다가 이번 계기로 읽게 되었네요.
원제는 <Survival of the Friendliest>이며, 이는 다윈이 얘기했던 (실제로는 스펜서가 말했던) "Survival of the Fittest"에 대항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찰스 다윈의 "survival of the fittest"라는 개념이 잘못 해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항상 가장 강한 것이나 가장 공격적인 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협력하고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개체들이 생존한다는 것이 글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저는 'fittest'와 'friendliest'가 서로 대립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 둘 다 일 수는 없는 걸까요? 저자들도 그것이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적응하는 것' (통상 '적자'라고 하는) 대신 '다정한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 정도로 생각됩니다.
여담으로, 'friendliest'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가 고민스러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는 '다정한 것'이라고 했지만 박한선 교수의 감수의 글에서처럼 '우자'가 됐을 수도 있겠네요.
만약 이 책의 내용을 처음 읽었다면 참신하게 생각됐을 수도 있을 듯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휴먼카인드>를 먼저 읽다 보니 내용의 상당 부분이 그 책과 겹칩니다. 어느 책이 먼저 나왔을까 싶지만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기에 책 자체보다는 이 책의 저자들이 이전에 쓴 논문이나 연구결과가 <휴먼카인드>의 집필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그렇게 책을 써도 문제가 없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중반부까지 하려는 얘기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늑대보다는 개가, 사나운 침팬지보다는 좀 더 온순한 보노보가, 다른 인류가 아닌 호모 사피엔스가 더 잘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더 다정했기 때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자기 사육(자기 가축화)'이 있었습니다. 즉, 스스로 길들여진 것이죠. 개도 친화력 높은 늑대들이 스스로 길들여진 것이었고요. 보노보도 마찬가지였어요.
인간 역시 동물의 가축화와 유사성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가축화된 종, 인간을 포함하여, 다른 종보다 사회적이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다른 이들과 더 잘 협력할 수 있도록 진화적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늑대에서 지금과 같은 개로 올 수 있었는지를 벨라예프와 류드밀라의 여우사육 실험을 통해 보여줍니다. 사람에게 좀 더 온순하게 반응하는 개체들만 번식시켜도 몇 세대만 지나면 개와 비슷할 정도의 친밀도를 지니는 개체가 나온다고요.
뿐만 아니라 외형까지 변하였고, 번식 주기도 짧아지고 더 길어졌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번식기가 따로 없으니 극단적인 사례라고도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번식과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므로 제목에서처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외형의 경우에는 좀 더 귀엽고, 친근감을 야기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도 머리가 좀 더 둥그스름하게 바뀌고, 여성형의 얼굴이 되어갔죠.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가축화를 하게 되면 오히려 지능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네요. 이것은 단지 개와 같은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원시 다른 인류에 비해 뇌용적도 더 적어지긴 했지만 집단의 힘으로 더 발전된 집단지능을 갖게 되었네요.
수 세대에 걸친 가축화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지능을 쇠퇴시키지 않으면서 친화력을 향상시킨다. 어떤 동물이 가축화될 때는 서로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많은 요소가 변화를 겪는다. 가축화징후*라고 불리는 현상의 변화 패턴은 얼굴형, 치아 크기, 신체 부위별로 각기 다른 피부색에서 나타난다. 호르몬과 번식주기, 신경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연구에서 발견한 것은 조건이 일정하다면 자기 가축화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그런데 협력적 의사소통은 친화력에 의해 우발적으로 발생한 능력이며, 가축화가 진행될수록 더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사람뿐만 아니라 개나 다른 친화적 동물들에서도 나타나는 능력이었습니다.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은 증진되었지만, 반면 인지기능에 관해 예상했던 가설은 우연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인지기능 같은 사회적 지능은 두려움이 친화력으로 대체될 때 우발적으로 발생한 또 다른 능력이었다.
그런데 '다정한 것이 살아남았다'는 예시로 보여준 것은 여기까지였어요. 예시치고는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더 많은 종들에 대해서도 연구했지만 아마 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통제력이 중요한 요소일 것이라고 가정하고서는 그것의 영향력도 제대로 밝혀내지는 못했네요.
그래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한,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살아남은 것들 중에 다정한 것도 있지만 다정하지 않은 것들도 있으며, 다정하지 않은 것도 살아남는다는 얘기죠.
결국 저자가 주장하려는 것 역시 인간중심적인 사고이며 이후부터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여기서부터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저자들의 추측과 주관적인 생각에 더 가까운 듯 보입니다. 결국에는 인간도 본래 친화력을 가진 존재이며, '성선설'에 더 가깝다는 뉘앙스를 느끼게 합니다.
인간 역시 스스로 길들이고 가축화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되었고, 무리는 점점 더 커졌습니다. 생존에 더 유리하게 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옥시토신이 작용하여 친밀감을 더 높이게 됩니다. 또한 협력적 의사소통을 통해 많은 것들을 이루어왔습니다.
우리가 타인과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이 능력 덕택이다. 이 능력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통하는 관문, 수 세대를 걸쳐 쌓여온 지식을 잇는 문화적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로서 우리의 모든 것이 이 능력에서 시작된다. 많은 위력적인 현상이 그러하듯이 이 능력도 일상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시작이 아기가 부모 손짓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친화력은 타인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게 하며, 지식을 세대에 세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게 해 준다. 또 복합적인 언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문화와 학습의 기반이 되었으며, 친화력을 갖춘 사람들이 밀도 높게 결집했을 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해 왔다. 다른 똑똑한 인류가 번성하지 못할 때 호모 사피엔스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협력에 출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무리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부작용도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내재된 공격성 역시 자아(가 속한 공동체의 범주 내)와 피아에 대한 구분 때문이며, 그것이 호르몬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은 너무 단순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자기가축화를 통해서 친화력이 강화된 우리 종에게도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이 생겨났다. 사람의 뇌가 성장할 때 세로토닌 유용도가 증가하면 옥시토신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도 커진다.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합하여 협력하면서 유대가 강해지면 서로를 가족처럼 느낀다. 마음이론 신경망이 발달하는 초기 회로에 생긴 작은 변화만으로도 타인을 돌보는 행동이 일가친척 너머의 광범위한 사회적 협력관계로 확장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새로운 능력과 더불어 일가친척이 아닌 집단 구성원을, 심지어는 집단 내 타인까지 강하게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 우리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이들이 위협을 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진화가 우리의 협력 능력과 사회적 유대성을 향상하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지만 그 과정에서의 부작용 역시 안고 가야 할 숙명이 되었음을 인식시킵니다.
저자들의 그러한 의도는 중반부 이후에 현대사회의 문제를 인간의 본성에 기대어 해결하고자 하는 과욕으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앞부분은 그나마 학술적으로 느껴졌지만 뒷부분은 좀 더 억지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앞부분에서 충분히 설득이 되지 못했기에 그렇기도 하네요. 설사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주장은 섣부른 일반화였다는 생각도 들고요.
결국 인간은 협력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 같은데요, 협력은 친화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친화력은 다정함이 기본이 된다는 것이겠죠. '다정함->친화력->협력->생존'의 연결고리인데 그렇다고 해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것' 역시나 과한 일반화인 것 같아요.
게다가 전반부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결론이었다면, 후반부에서는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게 역으로 '생존해야 한다->협력해야 한다-> 다정해야 한다'로 이어지는 것이니 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 모두 그 필연성은 부족해 보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순방향을 얘기하다가 후반부에서는 역방향을 얘기하면서 그에 대한 의문과 거부감이 생기는 듯해요.
우리는 우리 종 최악의 본성이 다시 부상하여 어떤 장소나 어떤 문화 속에서 표출될 수도 있다는 경고에 가까운 메시지로 초고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미국 대선이 끝난 후 초고를 절반 넘게 잘라내야 했다. 경고가 아니라,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느꼈다. (...) 우리 종이 가진 비범한 친화력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의 근본 원인을 생각하고 해법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책을 쓰고 싶었다.
왜 학자들은 자신들이 현실 문제에 대한 해답이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는 걸까요? 책을 읽는 누군가가 그러한 답을 요구할 것 같아서일까요? 연구의 가치중립성이란 것이 없을까요?
사실 저는 이러한 류의 책에 대해서 그런 것까지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학술적인 책이라면 학술적인 부분에 좀 더 집중했으면 하는데 대체로는 이런 식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들이 많아서 오히려 책 전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거나 아니면 반감이 생기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얘기하는 해법이라는 것도 너무 막연하고, 너무 낙관적으로 보려는 것 같아서요. 저자들도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진화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하게 여겨졌고, 낙관과 희망을 주었을 수도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던 듯합니다.
과학기술을 선한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진 최고의 미덕과 최악의 본성을 함께 예측하고 개발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더 다정하고 친화적인 미래를 위한 해결책에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어두운 본성을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야기된 문제에는 사회적 해법이 필요할 것이다.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답성 인간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건축물이 관용을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결국 그들이 진화를 재해석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진화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친화력이라는 것도 유전적 요소가 있고, 그것이 유전되면서 더 강화된다는 점은 가설일 것 같기도 하고요.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친화력이 좋은 개체와 그렇지 못한 개체가 무작위로 섞일 경우 (개의 경우처럼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유전적 방향성 역시 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저자들도 인정하듯 선택압으로 작용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죠. 유전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해결하려면 우생학으로 빠질 수 있고, 저자들도 그에 대한 경고를 하고는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시행된 바는 있지만 도덕적인 면을 넘어서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죠.
결론적으로, 이 책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의 근거도 부족하고,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은 친화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경쟁보다 협력해야 한다는 것만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계속 '왜?'라는 의문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네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추천했지만 솔직히 저는 이 책 역시 마케팅의 승리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니면 정말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복음서' 같은 것일런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