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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Sep 11. 2023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런 시간에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이 없다.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여름 해질녘, 강가 풀밭 위의 선명한 기억- 오직 그것이 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 하나둘 별이 반짝일 테지만 별에도 이름은 없다. 이름을 지니지 않은 세계의 강가 풀밭 위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다.
“도시는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침묵의 밑바닥을 뒤져 말을 찾아온다. 맨몸으로 심해에 내려가 진주를 캐는 사람처럼.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야. 하지만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작지도 않아."
네가 그 도시를 입에 올린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그렇게 도시에는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벽이 생겼다. p.12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 안이야." 너는 말한다.
"그럼,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진짜 네가 아니구나." 당연히 나는 그렇게 묻는다.
“그래,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대역에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p.13


오랜만의 하루키 장편소설 신작이다. 6년 만이라던가. <기사단장 죽이기>도 벌써 그만큼 되었네. 


내가 20대 초반에 하루키의 작품을 접하게 된 후로 거진 30년 가까이 되어간다. 가장 처음 읽었던 작품은 <노르웨이의 숲 (당시 번역본 제목은 '상실의 시대'>였고 그다음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당시 번역본 제목은 '일각수의 꿈'>이었다. 이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성격의 내용이지만 이후에 하루키의 작품들을 읽을 때 레퍼런스처럼 작용했다. 하루키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은 이미 초기에서부터 나타났으니.


그동안 그의 여러 장편과 단편, 수필 등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특이하면서도 성실한(?) 작가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가 벌써 74세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도, 나도 같이 나이가 들어왔구나 싶다.


이 작품은 그가 1980년에 발표했던 거의 비슷한 제목의 중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기반으로 해서 다시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초기작이었던 이 작품은 작품 자체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으로 인해 책으로 발간하지 못했고, 언젠가는 다시 써야겠다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파생된 작품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기에 두 작품은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작품 역시 하루키가 애초에 생각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결국 40여 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다시 이 작품의 집필을 시작했고, 42년 만에 완성이 된 셈이었다.


작가로서의 미래가 불투명했던 시기에 썼던 작품을 이제는 상업작가로서 성공한 뒤 노년에 완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될만했다. 실제로 일본에서 발매 당시부터 관심이 집중됐고, 국내에서도 번역본 판권을 두고 경쟁이 치열했다. 


하루키의 국내 판권은 여러 회사가 나눠갖고 있다. 초기부터 번역했던 문학사상사를 비롯해서 민음사, 문학동네 등 국내 대형 출판사들도 하루키 책들을 펴낸 바 있다. 특히 201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출판사들 간의 판권 경쟁이 유래 없을 정도로 치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번 신작 역시 그러한 경쟁을 통해 문학동네에서 발행되었다. 



문학동네에서 이달책으로 구매한 후 주말 동안에 다 읽었다. 768페이지 정도로 꽤 두꺼운 책이었지만 술술 읽혔고 몰입감이 있었다. 그의 작품답게 익숙한 요소들이 많았다. 그리고 내용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됐지만 예상과 다소 다르게 흘러가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결말은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러한 결말이 정말로 하루키가 생각하던 것이었을까? 그가 추구하던 것이었을까? 약간 허탈하기도 했고, 조금 억지스럽기도 했다. 정녕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그 점이 혼란스러웠다.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이 책을 읽어봄으로써 알 수 있다. 하지만 '도시'와 '벽'이 실질적으로 은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의 주인공에게는 그가 만든 '도시'가 있었고, 그 도시를 '벽'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그 도시와 그 벽은 그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작가인 하루키 본인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문득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AT 필드'를 연상하게도 한다.


"만약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벽이야. 누구도 이 벽을 넘을 수 없어. 누구도 이 벽을 부술 수 없고." 문지기는 그렇게 단언했다. p.45
"물론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하나만 말씀드리죠. 당신은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그녀의 그림자고, 이 도시에 있는 것이 본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글쎄올시다. 실은 반대일지도 모르거든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모순과 가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머무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확신합니까, 이 도시에 있는 그녀가 진짜라고?" p.152
"당신은 나와 다시 한번 하나가 되어 벽 바깥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요. 내가 그저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고요. 들어보세요,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생하며 나이 들고 쇠약해져 죽어가요. 물론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 과정을 이어가는 게 순리입니다. 나 또한 미흡하게나마 그에 따르고 있고요. 시간은 멈출 수 없고, 죽은 것은 영원히 죽은 겁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겁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p.153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p.684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만든 벽, 그리고 그 안의 도시에 자신을 가둔 사람들. 그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도시에서는 존재도, 시간도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그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아의 분열이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본체와 그림자의 분리라고 했지만, 그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나와 그 도시 밖에서 살아가는 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도시 안의 도서관에서 그는 꿈을 읽는 일을 한다. 그것은 유일하게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여기서는 아직 어릴 때 본체와 그림자를 떼어내죠. 그리고 본체는 불필요한 것, 해로운 것으로 치부당해 벽 바깥으로 추방돼요. 그림자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설령 본체를 쫓아내도 그 영향이 말끔히 지워지진 않아요. 미처 제거하지 못한 마음의 작은 씨앗 같은 게 뒤에 남고, 그것이 그림자의 내부에서 은밀히 성장해 가죠. 도시는 그것을 재빨리 찾아내서 긁어낸 뒤 전용 용기에 가둬버리는 겁니다."
"마음의 씨앗?"
"그래요.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 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 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역병의 씨앗" 나는 그림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 그러니 남김없이 긁어내 밀폐용기에 담아서 도서관 깊숙이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일반 주민의 접근을 금지하죠."
"그럼 내 역할은?"
“아마 그 영혼을-혹은 마음의 잔향을-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일이겠죠. 그림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p.178


미스터리한 이야기지만 의외로 평이하고 또 순탄하게 흘러간다. 그의 작품답지 않게 성적인 요소도 거의 없으며, 자극적인 내용도 거의 없다. 상당히 힘을 빼고 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문장은 아름답다. 그 속에 담긴 것들이 독자를 계속 잡아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그래, 이게 하루키였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쨌든 오랜만에 그의 신작을 읽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뭐랄까, 마치 이 작품의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도 들고. 실제로 그 역시 이 작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암시의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안녕"이라는 말이-여느 때와 다른 작별인사가- 그녀의 외관에 그런 변화를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바뀌어가는 건, 미묘한 변화를 겪고 있는 건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오히려 내 쪽인지도 모른다. 나라는 인간의 마음이 변용을 거듭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안녕"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했다.
"안녕." 그녀도 말했다. 마치 처음 보는 음식물을 입에 넣는 사람처럼 주의 깊게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지만, 그 미소도 지금까지와 똑같진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pp.757-758


그래서일까, 작품 말미의 '안녕 (아마도 '사요나라'였을)'이라는 말이 다소 서글프게 들렸다. 이 역시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마지막 편에 나오는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같은 정도의 느낌이었으니.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그의 마지막 장편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아직은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그래, 달리거라, 벽이 말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든지 멀리 달려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거기 있을 테니.
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똑바로 달려 그 앞에 있을 벽으로 돌진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림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의심을 버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 p.206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내뱉는 숨이 딱딱한 물음표가 되어 허공에 하얗게 떠오른다.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 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그리고 또한 그 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 대체 어디가 출발점이었는지, 그리고 도달점이라 할 만한 것이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니, 어쩔 줄 몰랐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눈 녹은 물이 졸졸 흘러드는 수면을 쨍하니 맑고 싸늘한 달빛이 비추었다.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물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자명하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p.681





<I will judge you by your bookshelf>라는 책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빙고'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번 하루키 신작을 읽으면서도 이 빙고가 떠올랐다.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나는 이 중에서 15개가 해당되는 듯했다. 어떤 것인지는 직접 읽고 확인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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