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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Oct 28. 2023

김초엽 <책과 우연들>


내가 관심 갖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김초엽 작가. SF로 데뷔했고 주로 SF 작품들을 쓴다. 데뷔작부터 최신작까지 여러 작품들을 읽어보았지만 전반적으로는 내 취향에 잘 맞았다. 내가 SF 마니아는 아닌지라 SF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이런 작품들이 좋다. SF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했고, 이런 소재, 주제도 SF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모든 소설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일까? 그러면 SF소설도 마찬가지로 결국은 '인간 이야기'로 수렴되는 것일까? 그 말에는 '꼭 그렇지는 않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원래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쓰려했는데, 그래도 대부분의 SF소설이 인간 독자를 고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확언은 어려울 것 같다. 내 견해는 동의와 반박 그사이 어디엔가 놓인다
....
다시 말해 SF는 인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무척 좋아한다. 개별 작품마다 인간에 치우치거나 비인간에 치우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SF에서 비인간존재들-자연, 우주, 행성, 테크놀로지, 동물, 식물, 외계 생물은 인간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는 이 행성의 꽤 많은 사람이 비인간존재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는 사실을, 또 그들 중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부가 SF를 읽고 쓴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그는 포항공대 화학과에서 석사까지 마쳤지만, 실험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SF 공모전에 응모한 것이 당선되어 그 뒤로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다작 작가라고 할 만큼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 작가가 되기까지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그리고 현재까지 어떻게 작품 활동을 해 왔는지는 잘 몰랐다. 


김초엽 작가의 <책과 우연들>은 그의 그러한 이야기들을 담은 에세이다. 이 책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변모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SF에 대한 그의 생각들과 작품 집필을 하면서 느끼는 많은 생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야기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근원에 있는 마음을 묻게 될 때 나는 가로등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 돌아오던 열여덟 살의 밤을 생각한다. 눈은 잔뜩 부었고 내일의 피로는 예정되어 있지만 마음은 행복감으로 차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영화의 내용을 많이 잊어버렸다. 정확히 어떤 장면과 대사에 울고 웃었는지 세부사항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기분만큼은 기억한다. 무언가가 너무 좋아서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갈망이 뭉게뭉게 생겨나던 순간을 어떤 이야기와 사랑에 빠질 때의 그 기분, 그것을 재현하고 싶다는 바람이 나의 '쓰고 싶다'는 마음 중심에 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 역시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작품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도 SF를 읽고, 습작을 써보는 동호회 활동도 했었다고 하는데 그 멤버들 중에 끝까지 열성적으로 한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꿈을 품을 수는 있지만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시도해 보는 것은 쉽진 않다. 나도 그랬으니까.


게다가 그가 학업 성취도도 뛰어났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여러 면에서 소질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노력의 결과임은 분명하다. 그는 노력형 타입이다.


이 책은 크게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세계를 확장하기', 2장은 '읽기로부터 이어지는 쓰기의 여정', 3장은 '책이 있는 일상'이다. 이 책의 제목은 3장의 소제목에서 따왔다.


책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했고, 읽기에서 쓰기로 나아갔으며, 전업작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독서를 좋아하고 책을 사랑했다. 각각은 다소 다른 내용들이지만 모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이라이트를 정말 많이 쳤다. 아무래도 그에게 나의 감정이 이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대리만족일 수도 있을 듯하고.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작법서도 아니다. 물론 자신의 집필 스타일 얘기와 도움이 될만한 얘기도 많이 해주지만 실용서는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동기부여와 인사이트를 준다.


특히 2장에서 '읽기'의 여정을 '쓰기'의 여정으로 이어지게 하는 과정은 그 과정에서 만난 다양한 책들이 어떻게 그를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준다. 그걸 보면 SF는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으려고 한 것들을 알 수 있다. 그중에는 좋아했던 책도 있고 다소 억지로 읽었던 것들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의 고민에 함께 한다.


분명 읽기는 쓰기와 같지 않다. 하지만 읽기는 쓰기로 이어진다. 읽기는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나의 쓰고 싶은 마음을 끌어낸다. 그런데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나는 쓰기 전과 다르게 읽어야 했다. 쏠 준비를 하고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서 쓰는 사람으로서 읽어야 했던 것이다.
...
책은 나의 읽기 여정을 되짚어가며 그 안에서 쓰고 싶은 나를 발견하는 탐험의 기록이다. 여기서 나는 읽기가 어떻게 쓰기로 이어지는지, 내가 만난 책들이 쓰는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관해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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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독자에게도 이 책이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다면 기쁘겠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했지만 그 앞에서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두려움을 겪어본 이들에게,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며 예기치 못하게 만나는 책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전보다 더 흥미롭고 복잡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
결코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길도 주지 않았던 잭을 우연히 펼쳐드는 순간이 있다. 투덜거리며 의심을 가득 품고,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때로는 나를 가장 기이하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그 우연의 순간들을 여기에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또한, 그는 이 책의 전반에서 자신의 일상 속에서 책과의 만남, 특히 우연히 만나게 된 책들이 그에게 가져다준 변화와 영감을 이야기한다. 중간중간 자신의 작품들 얘기도 나오는데, 그 작품을 집필할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도 얘기하기에 그 작품을 떠올리며 읽으면 더 흥미롭다.


그의 작가로서의 성장 과정을 따라가며, 그가 겪은 다양한 고민과 생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은 깊은 통찰력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에 대해 가볍게 쓰는 작가라고 오해를 했거나 혹은 다작에만 열중하는 작가라고 그의 노력들을 과소평가했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순수문학에 비해 작가적 역량은 부족할 수 있지만 그러한 점들도 보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엿보였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보통 내 머릿속에는 아주 희미한 아이디어와 구체화되지 않은 배경, 설정, 인물들이 죽처럼 희멀건하게 뒤섞여있다. 나는 삶의 경험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적어서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도저히 이야기를 구체화할 수가 없다. 나를 끊임없이 뒤쫓아오던 밑천에 관한 고민은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났다. 하지만 소설은 나에게 아는 걸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알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백지 위에 세계를 단숨에 휘갈겨 그려낼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이 나에게 없다면 적어도 다양한 재료를 가져와 그것을 섞고 다져서 토대로 쌓아 올려보자고 생각했다.
새 글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도 나는 글 쓰는 법을 다 까먹었구나' 하는 가벼운 절망감에 빠진다. 가벼운 절망감인 이유는, 쓰다 보면 어떻게든 쓰게 된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도 절망감인 것은 변함이 없다. 지난번 소설을 끝낼 때까지만 해도 분명 자신감에 차있었는데 새로운 소설을 시작하면 언제 내가 소설을 써봤나 싶을 정도로 막막해진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창작의 방식이 어느 시점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더군다나 그는 여전히 마이너 한 분야인 SF 작가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고민도 많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SF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고충도 많이 느껴졌다. 그 분야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작가로서의 정체성도 고민했다. 또한 SF의 작가로서의 입지가 좁은 것도, 발표할 수 있는 매체도 적은 것에 대한 어려움도 토로했다.


내가 읽은 SF에 대한 수많은 정의를 아주 대충 요약해서 나열해 보면 이런 식이다.
 
1) SF는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문학이다.
2) SF는 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장르다. 과학적 소재가 아니어도 다루는 태도가 과학적이면 SF다.
3) SF는 경이감의 장르다.
4) SF는 인지적 소외의 문학이다.
5) SF는 세계의 변화를 다루는 장르다.
5) SF는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다.
7) 작가가 SF라고 썼으면 SF다.
8) 전부 틀렸다. 하드 SF만 진정한 SF다.
9) 무슨 소리 고전 SF가 진정한 SF다. 이후는 전부 모조품이다.
…………
정말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내 소설을 본격문학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당장 소설가로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던 나에게 문학성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물론 나는 좋은 소설을 쓰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 아닌지를 본격문학계에서 판가름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순적이게도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자원은 본격문학계에 쏠려 있었다. 지면도 독자를 만날 계기도 그랬다.


나아가 '과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듯했다. 그가 기본적으로 과학자의 길을 걸었고 과학을 소재로 한 글들을 쓰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과학철학으로, 궁극적으로는 철학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그의 작품들에 그러한 철학적인 문제들, 고민들이 많은 것은 그러한 것의 표현일 것이다. 그 고민을 같이 공유해 보자는 의미에서.


나는 과학에 관해 과학자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을 존경하지 말자. 개인에게 기대를 걸지도 말자. 한 사람은 언제나 틀릴 수 있고 무수한 오류와 실수를 저지른다. 어쩌다 충분히 신뢰할만한 누군가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가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자가검증을 멈추는 순간 다시 문제가 시작된다. 합리성은 뛰어난 개인에게 깃드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검증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열린 시스템에서 생겨난다. 과학이 우리가 지닌 많은 질문에 꽤 괜찮은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놓은 잠정적 결론이 다시 시험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과학의 결론은 언제나 잠정적이다. 그런 생각을 내 안에서 정립하게 됐다.
다만 이렇게 과학이 불완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이후에도 아직 나는 과학이 꽤 많은 영역에서 '우리가 가진 더 나은 도구일 수 있다'는 견해에 마음이 기울어 있다.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에서 과학기술학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는 불완전한 과학의 가치를 옹호하려고 시도한다. 저자들은 과학적 지식이나 그 결과물보다 그것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과학자 공동체가 지지하고 열망하는 가치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정직성, 성실성, 명확성, 개방성과 같은 과학적 가치들이 과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과학기술학계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왔지만 나는 과학적 가치를 정당화할 수는 없더라도 '선호'할 수는 있다 는 저자들의 주장에 마음이 간다.
이제 나는 과학이 우리가 가진 최선의 도구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의 알고자 하는 마음이 누군가를 죽이고 파괴하는 일보다 이 우주에서 우리가 위치한 곳을 우리가 어디에서 탄생해 어디로 흘러가 소멸하는지를 말해주는 데에 쓰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 너무 순진하고 낙관적인 믿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이곳에 존재하게 된 이상 누군가는 끊임없이 묻고 또 알고자 할 것이다. 자연의 일부이자 물리법칙에 지배받는 개별적 존재로 살아가고자 분투하는, 마지막에는 입자단위로 분해되어 우주로 산산이 흩어질 우리의 삶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싼 광막하고 거대한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누군가는 그 질문에 조심스럽고 잠정적인 답을 내어놓을 것이다.


그는 책과 독서를 좋아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전업 작가가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만 그동안의 노력, 그리고 지속적인 노력을 바탕으로 꾸준하게 작품을 펴낼 것으로 기대된다. 그의 열정과 노력과 미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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