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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Nov 10. 2023

문진영 <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작가의 신작 단편집을 읽었다. 김승옥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적도 있어 이미 실력이 검증된 작가였지만 그동안은 그의 작품을 읽어볼 계기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새로운 작가를 한 명씩 알게 될 때마다 기쁘다. 


이 작품집에는 표제작이 없다. 이 제목은 <내 할머니의 모든 것>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말에서 가져온 듯하다. 


나는 뒤늦게야 그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최소한의 최선.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보지 않았더라도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이미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이 제목이 맘에 들어서 이달책으로 구입하게 됐다. (친필사인은 덤이다)



제목의 '최소한의 최선'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 작품집의 각 단편의 주인공들은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당한 만큼의 최선을 하며 살아간다. 천성이 그래서이기도 하고, 자라면서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최소한의 최선만을 다하며 스스로를 고갈시키지 않으면서도 삶을 잘 살아가기. 우리의 삶은 늘 힘겹고 어렵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 있다. 점점이 박혀 있는 그것들을 이어가고, 그것들을 이어가는 최소한의 노력을 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삼 년은 빠르게 지나갔고, 그는 계속했다. 이제와 달리 뭘 할 수 있겠어. 그는 말했다. 마치 삼 년 전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듯.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을 거라 고 생각한다. 나도 알았으니까. 삼 년 후에 우리는 지금보다 겁이 많아지고, 재밌는 것들이 적어지고, 조금 더 슬프고 무기력해질 거라고.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행복을 닮은, 행복에 가까운 것들을 전부 '합격'이란 단어 뒤로 미뤄 놓고선,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불행만을 몸에 걸친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가끔씩 그가 말도 안 되게 보고 싶었다. 그는 늘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잠은 잘 잤는지, 밥은 챙겨 먹었는지, 모든 게 괜찮은지 그는 내게 묻곤 했지만, 그래서 나는 나 역시 그에게 그 이상을 물어볼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말의 홍수보다는 말의 빈곤이, 그보다는 침묵이 언제나 나았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침묵했고 그 침묵에 만족했다. 그 리고 결국에는,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 
질문이 많아진 수온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 인지 물었고, 우린 그게 일종의 싸움이라고 했다. 잘못된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싸움.
우리가 착한 쪽이야?
수온의 질문에 우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했다. 그 애는 고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결국엔 착한 쪽이 이기는 거라고 알고 있었고, 우리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가르쳐주지 못했다. 우리가 수온에게 말하지 못한 진실은 그것이었다. 우리가 졌다는 것.


하지만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고 또 나 자신도 그러한 쪽에 가깝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에게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동정도 느껴지도 공감이 되기도 했다.


뒤에 나오는 해설에서는 그들을 빛과 어둠 쪽에서 어둠 쪽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대응하여 빛의 역할을 하는 인물들도 등장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빛과 어둠의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적당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온도의 차이랄까?


그 주인공들은 좀 더 낮은 온도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활발하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멈춰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에게는 느리게 느껴질 따름이다.


그때 알았다. 아, 이 애는 빈 종이에 자기 이름을 적을 때의 기분 같은 건 평생 모르겠구나. 아보카도 씨앗처럼 웅크리고 있던 뭔가가 그 순간 뿅, 하고 돋아났다.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테츠가 말하려던 건 이것이었을까. 그렇게 한번 자라난 것은 되돌릴 수 없었고, 나는 그것을 마음속 어두운 구석에 숨겨두고 문을 잠갔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지만, 무슨 말인지 다 알았다. 미노리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빛이 환할수록 더 짙어지는 그림자에 관해. 임계점에 닿기도 전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마음에 관해.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미노리가 입을 다물었고, 더는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남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고 (설사 공존한다고 해도 경계선이 명확하다) 빛에 의해 어둠이 생기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빛을 강조할 수도 없고, 어둠을 그런 피동의 존재로 만들 수도 없다. 


어쨌거나 이 작품집의 인물들은 완전하지도 못하고 어딘가 어설픈, 그러나 좀 더 따뜻한 쪽으로 이동해 가는 이야기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회가 될 수 있고.


근데 절망적인 건 이거지.
룸메씨가 말했다. 보물 상자 안의 대부분이 보물이 아니었다는 걸, 예쁜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 다는 것. 지난번에 고향집에 가서 룸메씨는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열었다. 오래전 읽었던, 어느 젊은이가 금기를 어기고 상자를 열자 순식간에 노인이 되어버렸다는 옛날이야기처럼, 그 순간 룸메씨는 폭삭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특히 젊은 계층에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계층이나 힘겨움은 있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거나 사회생활을 한 지 좀 됐어도 안정되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고 있는 이들을 토닥여준다. 그런데 마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듯하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처럼.  


'그냥 젊다는 것'에 관해 생각했다. 단지 젊기만 하다는 것은 젊음 외에 내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고, 나는 그 사실을 견디느라 젊음을 다 소모해 버린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무언가가 되라는 목소리에는 늘 저항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못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 정도로 하지 않았다. 근데 번아웃이든 보어아웃이든 아웃인 건 똑같잖아. 탈탈 털렸다는 뜻이다. 
서른 해 남짓 살았을 뿐인데 지금 산 것만큼을 또 살고, 어쩌면 또다시 그만큼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게 두려운 건 내가 젊기 때문일 텐데, 나는 내가 젊다는 걸 아는 동시에 키오스크 앞에 황망하게 서 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브레이크 대신 액셀 페달을 밟아버린 누군가의 살 떨리는 공포를 마치 내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문진영 작가는 그러한 인물들의 내면을 잘 포착하여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이지만 어쩐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그러한 심리묘사와 인물들 간의 갈등, 그리고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역시 그러한 면에서 탁월함이 돋보인다. 과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독자에게 이해를 강요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특히 그의 섬세하고 담담한 문체가 그러한 것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집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준다. 인생의 낙관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것들에 대해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로이자 감동이다.


우린 아마 평생 이러고 살겠지. 갈대처럼 흔들리면서.
근데 갈대 괜찮지 않나. 지나가는 바람에 한껏 몸을 누이면 되니까. 한참 엎어져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또 엎어지고, 누가 누구를 일으켜줄 수는 없지만, 같이 엎어져 있는 건 참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우림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냥 속으로 생각만 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란 빛 또는 어둠 중 하나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받아들이면서 그림자로서의 빛의 잔해를 다루는 것이다. 마치 엘로이즈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그렸듯. 문진영 소설의 인물들은 최소한 이 사실을 거듭 곱씹으면서 무한하게 부서지는 빛의 잔해를 끈질기게 이해하고 바라본다. 이것이 문진영의 소설이 말하는 '최소한의 최선'일 것이다.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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