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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Dec 05. 2023

정세랑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주의: 스포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


자은은 돌아가길 택했다. 다른 나라 출신 중에 아예 돌아가지 않고 당의 관리가 되는 길을 택하는 이들도 슬슬 늘었지만, 자은은 그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은지 몇 년 되었다. 금성을 떠날 때는 허물을 벗어던지고 온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 두고 온 쪽이 진짜이고 물을 건넌 자신이 허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매미 껍데기처럼 색이 없고 안쪽이 텅 빈 무엇...... 어쩌면 배고픔을 지나쳐 언제나 살짝발이 땅에서 뜬 듯한, 가시지 않는 어지러움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돌아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짚어 말할 수 없을 터였다.


나는 추리물을 그리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스케일이 크거나 살인 사건, 밀실 등 복잡한 것보다는 소소한 내용의, 일상 추리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요네자와 호노부와 같은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작년에 그의 <흑뢰성>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는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실존인물이었던 아라키 무라시게를 주인공으로 한 추리물이었다. 이 작품은 역사를 알고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본 역사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까지 이해하며 보기는 어려웠지만 추리물로서의 재미를 느낄 수는 있었다. 


정세랑 작가의 신작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여러모로 그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통일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했고, 설자은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여러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이 책이 나오기 전, 솔직히 통일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물이라는 얘기를 듣고 의아하면서도 불안했다. 과연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살려서 제대로 된 추리물을 쓸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좀 더 즐기기 위해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무리는 없다. 또한 금성(경주)의 지리를 상상하며 보면 더 재밌을 것 같다. 마침 얼마 전에 경주로 여행을 다녀왔던 터라 월지, 임해전 등은 반갑게 여겨지기도 했다. 감은사도 관련이 있고. 


왕과 왕비가 천을 재어보고 여자들을 치하하는 자리에 자은은 없었지만 도은에게 전해 들을 수는 있었다. 달빛 아래 두 천이 어찌나 아름답게 펼쳐지는지 분하고 심려했던 마음도 천의 끄트머리 너머로 미끄러져 버렸다고. 천은 도은의 편 것이 딱 한 뼘 길었다. 지나친 불행 쪽으로 아무도 떠밀지 않고도 이겼다. 비밀을 비밀로 둔 여자들이 서로를 축하하며 눈을 마주쳤다. 진 편에서 언제나처럼 회소곡을 불렀고 음식을 대접했다. 둥글게 손을 잡고 힘차게 뛰며 춤을 추었다. 그 춤만큼은 자은과 인곤도 멀리서 구경할 수 있었다. 보름달 아래, 팔월의 정점이었다.


때는 신문왕 시대. 문무왕 때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당나라를 몰아냈지만 아직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했고 구려와 백제 유민들도 아직 신라에 통합되지 못한 터였다. 그러한 시기에 강한 왕권을 확립하고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향해 나아갔던 왕이 신문왕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규모 숙청도 있었고, 반대세력을 처단했다. 왕은 그러한 역할을 할 인물이 필요했고 그 인물이 설자은이 된 것은 책의 말미에 나온다. 정세랑 작가도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해서 신문왕 시기를 작품의 배경으로 한 것 같다.


돌로 깎은듯한 머리와 봉황 같은 눈.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를 보고 있었다. 휘장을 흔들던 바람도 잦아들었다. 자은은 추가 달린 그물에 사로잡힌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선왕과 함께 삼한을 통일한 업적으로 미루어, 나이가 많고 겪은 게 많아 지친듯한 인상일 거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다. 호은보다 고작 몇 살 위로 보이나? 아니, 그보다는 나이를 알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왕의 온몸에서 발산되는 강고함은 많은 것을 즉시 이해하게 했다.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 나라의 기틀을 새로이 세우는 결정들을 연달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 태자시절부터 왕의 사람들이었던 이들이 여전히 변치 않은 것... 강고함이라는 것은 그토록 육체에 담기나? 자은은 불현듯 그것이 궁금해졌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진대, 상대가 아주 쉽게 이쪽을 죽일 수 있음을 알고 바라볼 때 더 잘 느껴지는 것일 수는 있겠다 싶었다.


작가가 밝혔듯이 이 책은 설자은 시리즈의 1 권격이다. 이후 작품도 집필 중이라고 하지만 얼마큼 계속 낼 것인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책이 잘 팔리면 계속 나올 수 있겠지만 일단 세 권 이상은 나오지 않을까?


이 책에는 네 가지의 사건이 들어 있다. 목차 순으로 '갑시다, 금성으로', '손바닥의 붉은 글씨', '보름의 노래', '월지에 엎드린 죽음'인데 이중 첫 번째 사건은 설자은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 사건은 지인(?)또는 가족에 의해 사건에 휘말리게 된 이야기다. 설자은의 지력을 보여주고자 했겠지만 그보다는 설자은과 목인곤 콤비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더 클 것이다. 마지막 사건은 궁에서 벌어지는 것이며 비로소 왕과의 접점이 생긴다. 


시리즈의 시작이어서 그런지 설자은의 인물 배경, 가족, 사이드킥인 목인곤과 만나게 된 계기, 그리고 왕의 지령을 받아 활약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그렸다. 또한 산아라는 이름의 부인이 등장하는데 원래의 자은과는 어떤 관계였는지도 아직은 불분명하다.


하지만 솔직히 추리물로서는 조금 약한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다. 정세랑 작가의 필력은 인정하지만 추리물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가 아니기에 그런 점에서는 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와 추리물의 결합, 그것도 조금은 생소하게 여겨지는 통일신라 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호기심을 자아내면서도 그 자체가 신비롭게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래도 당시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 같다. 작가가 당시의 자료를 많이 수집하고 고증을 하려고 노력한 것은 느껴지지만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부분이다.


그리고 약 1400여 년 전의 일들이지만 인물들의 말과 행동, 사건 해결 방식 등은 조선 이후 혹은 현대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가, 웹소설 같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세랑 작가의 스타일이 다소 그런 면도 있다고 해도. (물론, 그의 작품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명랑 미스터리 추리물'이라고 한만큼 보다 가볍게 읽히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 같다)


또한 설자은이 죽은 오빠를 대신하는 여동생이라는 설정도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도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이 시리즈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를 것이다. 이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어떠한 사건들이 전개될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식상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너무 과욕을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왕이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설자은."

자은의 이름을 불렀다. 자은이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게 나와 혀를 깨물었다.

"나의 흰매가 되어라."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들자, 칼이 하나 자은 앞에 놓였다. 단검보다는 길고 장검보다는 짧았다. 소매 속에 숨은 자은의 팔을 재서 만들어진 것 같은 길이였다. 칼자루의 형상은 하늘에서 사냥감을 향해 화살처럼 내리 꽂히고 있는 매였다. 손을 뻗어 그 칼을 드는 순간, 뒤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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