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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an 17. 2024

카를로 로벨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나는 물리학을 좋아해서 물리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공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핵물리학을 배울 수 있는 학과로 가서 양자 역학과 핵물리학, 방사선물리학, 핵공학 등을 공부했다. 대학원에서도 방사선물리학 및 이의 응용분야에 대한 연구를 했지만 양자 역학 및 핵물리학에 대해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래서 양자 역학에 대한 교양서를 많이 찾아 읽는 편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답을 찾기 위해서.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다. 누가 양자 물리학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수식으로 나타내고 문제를 푸는 것이라면 낫다. 그러나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양자 물리학이 태동한 후 100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양자론적 해석에 대해선 아직까지는 코펜하겐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그 외에도 정말 많은 해석들이 나와 있고, 그중 어느 것이 맞고 틀림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과학은 그러한 여러 이론들이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는 것이기에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컨센서스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아직은 그러한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참고로 양자론적 해석은 현재 이러한 것들이 있다. 보른의 앙상블 해석부터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코펜하겐 해석, 드 브로이와 봄의 드 브로이-봄 이론은 고전적인 해석이며, 이후에는 좀 더 현대적인(?)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표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6%91%EC%9E%90%EC%97%AD%ED%95%99%EC%9D%98_%ED%95%B4%EC%84%9D


그런데 이 중에서 카를로 로벨리의 이름이 눈에 띈다. 그는 1994년에 관계적 양자 역학 해석을 내놓았다. 이는 양자 계의 상태가 관찰자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 해석이다. 즉, 상태는 관찰자와 계 사이의 관계이다. 이 해석은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 역학은 다른 계와 관련된 물리적 계의 물리적 설명에 대한 이론이며 이것은 세계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다."라고 말했다. (이상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A%B4%80%EA%B3%84%EC%A0%81_%EC%96%91%EC%9E%90_%EC%97%AD%ED%95%99)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중력이론, 특히 루프 양자중력이론을 연구하는 이론물리학자이면서 과학철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관련해서 많은 책을 집필하였고, 국내에도 여러 책들이 번역되어 있다. 그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 소개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호평이 이어지고 있고, 그의 책들을 찾아 읽는 독자들도 많아졌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으로서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들은 다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신간을 기다렸다가 읽게 되었다.




이론 물리학 연구에서 나의 주요 목표는 공간과 시간의 양자적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양자론을 공간과 시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발견과 일관되게 만드는 것이죠. 이를 위해 나는 양자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이 글의 내용이 내가 현재 도달한 지점입니다. 다른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관점인 양자론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이, 가장 유효하고 가장 흥미로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간의 제목은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의 전작 제목들도 다소 도발적이긴 했지만, 이 책은 특히 제목부터가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든다. 그는 전작에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뒤흔든 바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현실을 보는 시각을 뒤흔들려하고 있다.


이 책은 양자 물리학에  대한 책이다. 그는 서두에서 양자 물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책을 저술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적어도 3장까지는 그랬을 수도 있다. 헬골란트에 서 있는 하이젠베르크에서 시작하여 양자 물리학의 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양자 물리학의 이상한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기존의 해석들이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그러다가 4장에서부터 그는 자신이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바로 '관계'이다.


양자 물리학에서의 관찰자 혹은 관찰이 갖는 중요성이 양자 간의 얽힘에 대해져 양자-관찰자의 얽힘으로 연결되는 대목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그것은 정통(이라고 하는 코펜하겐 해석)은 아니었다. 더 나아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서로 상호 작용하는 그물망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루프 이론을 연구하는 그로서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일 수 있지만 일반인들, 그리고 적어도 학부 수준 이상으로 양자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아니다. 더구나 그물망이라고 한들, 두 물리적 대상이 어느 정도 거리에 있을 때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의 루프 이론에서 루프의 크기와 범위는 플랑크 길이 정도이다) 그리고 그 관계를 물리적으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그리고 에른스트 마흐와 보그다노프, 레닌의 이야기는 다소 동떨어져 보인다. 그의 논의를 끌어가기 위해, 이론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너무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그가 불교 승려인 '나가르주나'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책을 덮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나가르주나의 핵심 논지를 간단히 말하면,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원한 내용이 아니었다. 철학적으로 뻗어나간 그의 해석은 결국 불교의 '공'으로 이어진다. 


그는 양자 이론의 확률을 정보로 보고, 두 대상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러한 정보의 변화가 관찰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를 '맥락성'으로 표현했다. 결국 그는 이 세상도 나와 세상이 관계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므로 내가 없으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나 양자 역학을 통해 물리적 세계의 본질을 상관관계의 네트워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상관관계의 정확히 물리적 의미에서, 상호적인 정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사물은 제각각 고유한 속성을 가진 고립된 요소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우리가 위에서 이해한 의미와 지향성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상관관계가 생물학적 영역에서 나타난 특수한 경우일 뿐입니다. 우리 정신생활의 의미들의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둘 다 모두 관계인 것이죠. 우리가 정신적 세계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물리적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좁혀집니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지도, 개념적 구조를 업데이트하고 개선합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 우리가 현실에서 얻은 것 사이의 불일치에 대처하기 위해, 그리하여 현실을 더욱더 잘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죠. 때로 그것은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예상에 의문을 제기하여, 우리가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의 개념적 문법 자체를 건드리는 일이 되기도 하죠.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세계상을 업데이트합니다.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새로운 지도를, 세계를 조금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지도를 찾아냅니다. 이것이 바로 양자론입니다.


정보라는 측면에서는 큐비즘과 유사한 면도 있지만, 그는 큐비즘이 우리에게 보이는 것만을 해석하려 할 뿐 현실 세계를 그리는 것을 포기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더구나 큐비즘은 과학을 도구로 사용할 뿐이라고 하며 그 이론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른 해석에 비해 큐비즘에 좀 더 비판을 가하는 부분은 좀 의외였다. 그렇게 본다면 큐비즘을 주장하는 측에서도 관계적 양자 해석에 대해 같은 비판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양자 물리학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다. 위의 양자 물리학 해석에서도 일부 그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철학계에서도 양자 물리학에 대한 해석을 여럿 내놓은 바 있다. 그 어느 것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말이다.


철학자가 아닌 물리학자가 그런 해석을 내놓는다는 것이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이미 30여 년 전에 그러한 해석을 내놓았음을 생각하면 이는 그의 이론의 연장선 상에 있으며, 그의 이론을 더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이 책은 양자 물리학을 처음 접하는 초보자를 위한 책은 아니다. 양자 물리학과 그 해석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을 갖고 있어야 접근이 용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바를 액면 그대로 따라가기는 어렵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은 알겠지만, 속에서는 계속 거부감이 든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뒤로 갈수록 그가 말하려는 바를 따라가기가 점점 더 버거워지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명확하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의 전작들에 비해 실망스러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양자 물리학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이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그의 명성이 그러한 인식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소 우려는 된다. 양자 물리학의 해석은 여전히 많으며 이것은 그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얘기해줘야 할 것 같다.


양자 역학에 대한 긴 명상을 마친 후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물리적 세계의 견고함이 마치 프로스페로의 구름 덮인 탑과 화려한 궁전처럼 녹아서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현실은 거울들의 놀이 속에서 풀어헤쳐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위대한 음유시인의 화려한 상상력이나 인간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호소력이 아닙니다. 상상력이 지나친 어느 이론 물리학자가 최근에 한 엉뚱한 사변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것은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엄밀하게 기초 물리학을 끈기 있게 연구해 온 결과 이러한 실체성의 해체에 우리가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과학 이론이자 현대 기술의 기반이며, 그 신뢰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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